청 옹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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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거툴러허 후왕디 아이신기오로 인전

1. 서론 — 옹정제 즉위 전후의 사정과 당대의 과제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는 1661년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14세에 섭정격인 보정대신으로 전횡을 휘두르던 만주제일용사(满洲第一勇士) 과이가 오배(瓜爾佳 鰲拜, ᡤᡡᠸᠠᠯᡤᡳᠶᠠ ᠣᠪᠣᡳ구왈기야 오보이)를 처단하고, 오배를 축출한 뒤에는 1673년 발발한 삼번의 난을 사력을 다해 진압하였다. 1683년에는 정씨왕국을 무너뜨리고 대만을 정복했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와의 국경을 확정했다. 1688년, 몽골의 준가르부가 할하부를 침공하자 역으로 준가르를 공격하여 외몽골과 티베트를 종속시켰다. 내정에서는 황하를 치수하고 대운하를 보수했으며, 근검절약하며 민생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아니라 강희제는 집안이라 할 수 있는 궁중의 관리에 거의 실패했다. 2아거(阿哥; 만주의 황자)이자 적자인 윤잉(胤礽)을 총애하여 황태자로 세웠으나 태자가 비행을 일삼고 주위에 태자당이 형성되자 폐했다가 다시 복위시켰다가 다시금 폐했다. 그 와중에 대아거(첫째 황자) 윤시는 태자를 저주했다가 발각되어 구금을 당했다.1 8아거 윤사는 황태자의 지위를 넘보았고,2 한편으로는 폐태자를 복위시키라는 무리들이 있어3 두 무리가 충돌하였다. 궁중이 시끄러운 가운데 외몽골의 준가르가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준가르의 돈도브가 사막을 건너 티베트로 밀고 내려왔다. 세간에서는 강희제가 14아거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면 그를 태자로 삼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4

그러나 강희제는 원정대의 귀환을 기다리지 못하고 1722년 음력 11월 13일(양력 12월 20일) 붕어했다. 향년 69세. 임종을 지킨 이는 황자 8명과 대신 융과다(隆科多, ᠯᠣᠩᡴᠣᡩᠣ롱코도)였다.5 그리고 제위를 잇게 된 자는 첫째인 대아거도, 폐태자도, 황위를 노리고 있던 8아거도, 원정을 나간 14아거도 아닌 4아거였다. 그가 바로 청 제국의 제5대 황제 옹정제이다.

강희제의 재위 기간은 61년이었다. 아무리 강희제가 뛰어난 군주였다 하더라도, 단일 군주로서 지나치게 긴 재위는 점차적인 기강의 해이와 부패의 성행을 불렀고, 정치는 보수화되었다. 이는 강희제가 만년에 너그러움과 인자함을 표방했던 탓이었다.67 옹정제는 바로 이 상태의 제국을 물려받았다. 이제 존속 100년을 조금 넘긴 청나라가 서서히 발생하는 사회 부조리와 정치 불안정을 어떻게 해결할지, 그리고 정복왕조인 청나라의 필연적 과제인 만한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것이 새 황제에게 달린 것이다.

2. 본론

2.1. 황권강화와 사회개형

2.1.1. 황권강화의 과정

옹정제는 정당하게(일단 정사正史상으로는) 강희제를 계승하여 즉위했지만, 즉위하자마자 갖은 악질적 추문에 시달렸다. 옹정제는 과거의 위협이었던 형제들과 현재 위협이 될 수 있는 공신들을 제거하고 문자옥을 일으키면서 권력기반을 확실히 다진다. 뿐만 아니라 군기처와 태자밀건을 통해 제도적으로 권력강화를 뒷받침하였다.

2.1.1.1. 형제 숙청

강희제의 뜬금없는 유지로 옹정제가 황제가 된 것에 대해, 옹정제를 지지하던 황자들을 제외한 다른 황자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옹정제는 우선 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던 8아거 윤사를 표적으로 삼았다. 옹정제는 8아거에게 종친으로서 가장 높은 작위인 친왕 작위를 내렸는데, 8아거는 당연히 이를 경계하여 축하하러 온 자에게 “오히려 목숨이 붙어있을지 걱정스럽다”라고 말하였다. 자신에게 불만이 있음을 공공연히 드러낸 이 말이 8아거의 운명을 결정했다.8 옹정제는 8아거의 행동 하나하나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괴롭히다 끝내 황족의 적을 박탈하고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질려 버린 8아거는 자포자기해 버렸고, 뒤이어 연금에 처해졌다. 옹정제는 그뿐 아니라 8아거의 이름을 만주어로 ‘개’[犬]라는 의미의 ‘아키나’로 개명시켰다.9

옹정제와 사이가 나빴고 8아거와 가까웠던 9아거 역시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9아거는 옹정제의 즉위 공신인 총독 연갱요에게 감시를 받고 사는 생활에 대해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불만을 토로하였고, 이것이 발각되었다. 그 이후 9아거는 암호를 사용해 편지를 썼는데, 옹정제는 편지를 금지한 적도 없는데 암호를 사용하는 것은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것이라고 트집을 잡아 9아거의 황작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만주어로 ‘돼지’라는 의미의 ‘사스헤’로 개명시켰다.10

사스헤와 아키나는 옹정 4년에 병이 들었는데, 옹정제가 의원을 보내 주었지만 둘은 죽고 말았다. 여론은 말이 병사지, 사실상 감시자들이 황제의 의중에 따라 적당히 처리해 버린 것으로 생각하였다.11

강희제 말년, 준가르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 나갔다가 부황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14아거는 북경에 귀환하여 개선행사를 요구하였다. 옹정제는 단칼에 거절했다. 형제간의 예로 만날 생각을 하고 있던 14아거는 옹정제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았고, 옹정제의 시종들이 그를 붙잡아 억지로 자빠뜨렸다. 흥분한 14아거는 이것이 개선장군을 맞는 예식이냐고 따졌고, 옹정제는 그것이 황제를 대하는 예식이냐고 받아쳤다. 14아거는 좌천되었다가 이어 연금되었고, 건륭제가 즉위한 뒤에야 살아나올 수 있었다.12

옹정제의 형제 박해는 앞서 말한 셋 뿐이 아니었다. 과거 후계자 암투 때 옹정제를 지지한 13아거 윤상, 17아거 윤례와 장친왕의 양자로 내보내졌던 16아거 윤록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도 골고루 박해를 받았다. 강희제 때 이미 삭탈당했던 대아거 윤시와 폐태자 윤잉 역시 연금당한 상태로 죽고, 황위에 관심도 없었던 3아거 윤지는 강희제의 능을 지키라는 명령에 싫은소리를 했다가 연금당해 옹정 10년에 죽었다. 다른 형제들도 연금된 끝에 살해당하는 비참한 꼴은 당하지 않았어도 작위가 깎이거나 강희제의 능참봉으로 좌천당했다.13

옹정제는 자신은 황제로서 천하 최고의 권력이며, 그 권력에 도전하거나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이 누구이건 용납하지 않았다. 결코 권력을 공유하지 않는, 오로지 혼자서 군림하는 독재권력자로서의 옹정제의 모습은 앞으로의 여러 사례에서 계속 발견하게 된다.

2.1.1.2. 공신 숙청

강희 말년의 황자들 간의 파벌싸움으로 인해 조정은 비정상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옹정 초기 옹정제가 기댈 곳은 공신들과 자신을 지지한 동생들 등 소수 측근세력들이었다.14 옹정제의 즉위에 관여한 공신으로 외숙뻘이며 강희제의 고명대신인 융과다, 처남격인 장군 연갱요(年羹堯) 등이 있다. 융과다는 옹정제의 즉위를 지지하였고, 연갱요는 군무를 총괄하여 불온세력의 준동을 방지하였다. 때문에 이들이 옹정 초기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강희제 시기의 관대한 정치에 익숙했던 연갱요는 옹정제가 어떤 유형의 군주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사치와 횡령, 엽관을 일삼았다. 자신이 능력 있는 장군이고 또 자신의 누이가 옹정제의 후궁이라는 자신감도 그 이유였던 것 같다. 옹정 원년에 청해성에서 일어난 폭동을 연갱요가 악종기(당시 연갱요의 부하)를 시켜 진압하자 연갱요의 위신은 더욱 높아졌다. 자연히 연갱요의 주위에 세력이 몰려들었고, 지방에 군사를 주둔한 연갱요는 조정의 융과다와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었다.15

옹정제는 앞서 형제들을 숙청할 때 그랬듯, 연갱요가 올려 보낸 보고서에서 사용한 문장, 갖가지 과거 행적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으로 시작했다. 연갱요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계속해서 그를 주시했기에 증거는 그때까지 숱하게 누적되어 있는 상태였다. 연갱요는 변명할 사이도 없이 면직당하고 항저우로 좌천당했다. 옹정제가 연갱요를 내칠 기미를 보이자 다른 신하들도 벌떼같이 일어나서 연갱요의 죄상을 고해바쳤다. 연갱요는 삭탈관직 당한 뒤 평민으로 격하되었고, 이후 총 92개항에 이르는 죄상을 명목으로 자살할 것을 명령받았다(옹정 4년).16

노련한 정치인이던 융과다는 부정축재한 재물을 여기저기 나누어 보관하고 스스로 벼슬에서도 물러나는 등 눈치껏 행동했지만, 옹정제가 그를 찍어내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것을 피할 길은 없었다. 특히 융과다가 비밀리에 강희제의 8아거 윤이와 손을 잡았다가 발각된 것이 결정적이었다.17 옹정제의 융과다 제거 공작은 다른 신하들에게 융과다의 험담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신하들과 나누는 밀지에서 융과다를 연갱요와 같은 부류로 묶어 언급하며 대놓고 그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라는 둥, 그들은 소인배라는 둥 갖은 험담을 늘어놓았다. 최고 권력자가 누군가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어필함으로써 여론이 그를 떠나게 하려는 의도가 매우 노골적이다.18

옹정 4년, 융과다가 옥첩(황실 족보)을 개인적으로 챙기고 있었음이 우연히 밝혀졌다. 이것이 이전 연갱요 숙청 수순에서의 "트집"과 동일하게 작용했다. 당시 융과다는 러시아와의 외교 업무 때문에 외근을 나가 있었기에 잠시 기다려 보자는 일부 의견이 있었으나, 옹정제는 듣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융과다를 체포하였다. 옥첩을 사사로이 가진 죄부터 해서 불경, 기만, 당파 형성, 조정 문란 등등 갖은 죄상을 들어 융과다를 고발했는데 개중에는 "감히 건방지게 스스로를 제갈량에 비유한 죄" 따위의 황당한 것도 있었다.19

옹정제는 연갱요와 달리 융과다를 죽이지는 않았다. 다만 초가삼간에다 유폐시키고 한 발짝도 못 나오게 했다. 융과다는 그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옹정 6년에 죽었다.

옹정제와 융과다가 제거된 최대의 이유는 무엇보다 "무리를 이룬 점"일 것이다. 전술했다시피 옹정제는 철저한 독재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은 그 무엇이라도 존재를 허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일의 증정 사건과는 상이한 대응이지만, 증정이 옹정제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증정이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되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이며 오히려 이용가치가 충만하다는 옹정제의 판단이 내려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1.1.3. 문자의 옥

옹정제 역시 문자의 옥을 계속하였다. 옹정제의 시대에 문자의 옥으로 된통 당한 사람으로 왕경기(汪景祺), 전명세(錢名世), 사사정(査嗣庭), 그리고 증정(曾靜)이 있다.

왕경기는 연갱요의 서기였다. 그가 연갱요를 따라 서역으로 가면서 쓴 〈서정수필〉이라는 글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옹정제를 비난하는 것투성이였는데, 강희제를 무식하다고 비난한 것이 특히 심각했다. 아버지의 아들로써 보위를 이은 것에서 기본적 정통성을 얻게 되는 후임 황제로서 이것은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연갱요가 숙청당해 자살했을 때 왕경기는 목이 날아가고 가족들은 북만주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20

전명세 역시 연갱요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었는데, 연갱요가 티베트를 침공했던 것을 찬미한 시를 지었던 것이 역린을 건드렸다. 전명세는 죽지는 않았지만, 옹정제가 직접 "명교죄인"(名敎罪人―도덕적 죄인)이라고 쓴 액자를 만들어 그의 집 문 앞에 걸어두게 했다. 그리고 관리들 중 글 좀 쓴다는 자를 모두 모아 전명세를 비난하는 글을 쓰게 하여 모아서 문집을 만들고, 이것을 전명세의 자비로 출판하게 명령한 뒤 전국에 뿌리게 했다.21 전명세를 조리돌림으로써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린 것은, 목숨보다 명예가 귀한 줄 아는 선비를 길들이는 방법으로 매우 기발한 것이었다.

사사정은 과거의 첫 단계인 향시의 시험관으로 강서성에 파견된 사람이었다. 그가 출제한 시험문제에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구절을 넣었는데, 이것은 유교의 기본경전인 《시경》에도 언급되는 매우 흔한 구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유維"자와 "지止"자의 생김새가 옹정(雍正)의 위쪽 부분만 지워낸 글자이기 때문에, 이것은 옹정제를 참수해 버리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어 체포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얼토당토않았는지 바로 죽이지는 못하고 가두고만 있었는데, 사사정이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사사정의 시체의 목을 베어 효수하고 자손들은 귀양 보냈으며 재산은 몰수했다. 사사정을 벌한 구질이 너무 생트집 같았기에, 실제 죄목보다는 사사정이 융과다의 인맥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22

위의 세 가지 문자옥 사례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반청복명을 주장하는 한인 지식인에 대한 만주인 황제의 탄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세 경우 모두 옹정제 개인의 권위에 누가 되는 자들을 처분한 것이며―사사정의 경우는 너무 억지스럽지만, 숙청의 대상이었던 공신 연갱요, 융과다와 연결된 자들을 쳐낸 것이라는 점에서, 사상통제라기보다는 옹정제 개인의 권력 강화의 과정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증정 사건의 경우 그 성격이 세 문자옥과는 상이하기에 후술하도록 한다.

2.1.1.4. 태자밀건법

강희제 말년의 정치적 혼란을 유발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후계자 문제였다. 태자를 미리 세우자니 태자가 오만함에 빠져 비행을 저지르고 태자 주위에 당파가 형성되었고, 태자를 폐하니 제위를 노리는 다른 황자들의 주위에 당파가 형성되어 태자당과 대결하여 혼란을 유발시켰다. 만주족 전통 사회에는 군주가 후계자를 지명하는 관습, 즉 태자 제도가 애초에 없었다. 그렇다고 장자상속이나 말자상속 같은 원칙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강희제는 중국 문화를 모방하여 황태자를 세웠으나 결과는 붕당 간의 다툼만 격화시키게 되었고,23 결국은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내 시신을 방치한 채 황권을 다툴 것이다”라는 저주까지 퍼부었다.24

과거의 몽골 제국이 후계자 문제로 인하여 분열되고 갈등하여 붕괴된 것을 생각해 볼 때, 후계자 문제는 북방민족 특유의 병폐라고 할 수 있다. 옹정제는 이 병폐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옹정제가 고안한 태자밀건법은 후계자를 정하여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 액자 뒤에다 넣어두고 황제가 붕어한 뒤 그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후계자를 정하되 공개하지 않는 것을 그 골자로 한다. 태자밀건은 후계자를 오랫동안 공표하지 않기 때문에 강희제 시대에 벌어진 것과 같은 일을 방지할 수 있고, 미리 공표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라도 자유롭게 이름을 변경할 수 있다. 제위 계승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고, 그 사람을 지지하는 신하들 역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평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공작을 하기보다 공무에 힘쓰게 된다.25

이로써 태자밀건법은 태자를 미리 세워서 발생하는 폐단과 태자를 세우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폐단을 모두 해결하였으며, 그로 인한 당파의 형성을 막고 당파 형성으로 인해 분점화될 수 있는 권력의 초점을 황제 1인에게로 집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였다.

또한 옹정제 개인의 성향과 관련하여 생각하자면, 태자밀건은 군신관계의 틀을 가정에까지 끌고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황자들은 가정에서도 아버지에 대해 신하가 되어야 했고, 일개 신하로서 후계자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시험을 치러야 했다. 유일의 지존은 어디에서나 군신관계만 존재할 뿐, 부모자식간의 가정생활조차 없었다.26

2.1.1.5. 군기처

군기처는 본래 외몽골의 준가르를 정벌하기 위해 관련 업무를 논하던 군기방 또는 군수방이 그 전신이었다. 군기처는 처음에는 군사에 관한 사무만 관장하다가, 점차적으로 내각에 대해 우위에 놓이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군기처가 군사뿐 아니라 국내정치에 최종적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고, 내각은 군기처의 결정을 육부(六部)에 명령하는 중간기관으로 전락했다.27

군기처가 설립된 것은 황제전제가 극으로 치달은 것을 의미한다. 명나라 때의 내각은 황권에 대한 일정한 구속력을 지녔지만, 군기처는 내각대신과 왕공귀족을 모두 배제했다. 군기처를 통해 청나라 황제는 모든 국가기관을 독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28 그렇지만 군기처의 설립이 옹정제의 권력추구로 인해서 발생한 것만은 아니다. 옹정제가 군기처를 통해 권력을 강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기처의 부상은 만주족 정복왕조라는 청나라의 특성상 필연적이었다.

명대부터 유지되던 내각제도는 정복왕조인 청나라 때는 비효율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정복 초기에는 고위층이 모두 만주인이라 중국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보고문을 모두 만주어로 번역했어야 했고, 고위층 대부분이 중국어를 익히게 된 강희제 시기 이후에도 만주인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못한 청나라는 만주어로의 번역을 고집했다. 이 과정에서 일이 기민하게 처리되지 못했고, 기밀의 유출 위험도 있었다. 옹정제의 군기처에서는 군기대신 휘하에 만주족과 한족 서기관을 두어 만주어 문서는 만주족이, 중국어 문서는 한족이 처리하게 했다. 때문에 신속하게 업무가 처리되었고, 자연스럽게 국내정치까지 처리되는 중추기관이 된 것이다.29

그뿐 아니었다. 한족에 대한 차별정책을 실시한 원나라와 달리 청나라는 만한병용책을 실시했었다. 이것은 한족에 대한 회유책으로 작용했지만, 동시에 만주족의 우위를 위협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었다. 옹정제는 이 점에 기인하여 청나라의 독자적인 관료기구인 군기처를 설치한 것이다.30 이런 의미에서의 군기처는 후술할 ‘화이일가’, ‘화이무격’을 위한 청나라의 독자적인 관료기구이며 만주식 기관과 한족식 기관의 중간에 위치한, 만주인의 창의성이 반영된 기구라 할 것이다.3132

2.1.2. 사회개혁의 과정

전술하였다시피 중국사에서도 보기 드물 만큼 장기 집권한 강희제는 말년에 들어 보수적인 정치로 일관했고, 부정부패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후계자 다툼으로 인한 파당, 붕당이 형성되어 궁중 암투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 상태의 제국을 물려받은 옹정제는 하루 4시간만 자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업무에만 몰두하는 과로를 13년 동안 계속하였다.33

옹정제는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게 좋아한 순행 한 번 돌아다니지 않았고, 북경 바로 옆에 있는 승덕 피서산장에도 한 번도 가지 않았다.34 조상에게 예를 올리러 부수도인 심양에 간 것이 고작이었다. 재위기간이 60년을 넘는 아버지와 아들과 비교했을 때, 옹정제의 비교적 짧은 13년 재위는 어쩌면 황제 본인의 과로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황제는 일에 쫓기고 있었고, 하루를 쉬면 그만큼의 일이 밀려 다음날 더 고생을 하게 되었다. 황제가 이렇게 일하고 있으니 관리들 역시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히 정무와 행정의 성과가 올라갔다.35

2.1.2.1. 서신정치와 밀정정치

옹정제의 정치 방식을 대표하는 두 가지는 서신정치와 밀정정치라고 할 수 있다. 서신정치는 주비-주접으로 대표되는, 관료 개개인과 황제를 직접 연결하는 2차 루트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밀정정치는 궁궐 안팎은 물론 부임하는 지방관에게까지 스파이를 딸려 보내 그들을 감시하였다.

주접은 강희제 대 도입된 것으로, 지방 관료가 황제에게 의무적으로 제출한 사적인 상주문이다.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밀봉한 채 황제에게 바로 전해졌다. 옹정제는 이 제도에 더하여 붉은 먹으로 황제의 의견을 추가하고 관료의 의견을 첨삭한 주비를 쓴 뒤 돌려보냈다가 다시 황제에게 돌려보내도록 하여 보존하고,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주접과 주비를 모아 《옹정주비유지》를 편찬하였다.36

주접 자체는 분명 강희제 때 시작되었지만, 옹정제는 여러 신료들에게 수많은 주접을 걷고 그것들을 모두 교차검증하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했다. 옹정제는 각 지방에서 중앙정부로 올리는 공문서인 제본(題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광범위한 관리들에게 주접을 올리게 했다. 문관은 부(府)의 책임자인 지부(知府), 무관은 사단장급인 총병관(總兵官)들이 그 대상이 되었고,37 옹정제는 수많은 신하들이 올린 주접에 주비를 달고 유지를 쓰느라 매일 적으면 20 ~ 30통, 많으면 50 ~ 60통까지 밤중에 처리하였다.38

청나라는 만주에서부터 존재한 팔기군 조직이 황제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밀정정치를 행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밀정정치는 관리가 양심적인지, 능력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신뢰할 수 없는 여론보다 관리 개개인을 실제로 감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효과적이었다.39 어느 지방관이 임지에 부임하며 북경에서 하인을 고용해 데려갔는데, 알고 보니 그 하인이 궁궐의 시위장이었고 옹정제의 밀정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조정 대신들이 밤새 법으로 금지된 마작을 두다 패가 하나 없어졌는데 다음날 옹정제를 알현하자 황제가 없어진 패를 돌려주더라는 이야기는40 하나의 재미난 에피소드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옹정제가 그만큼 정교한 스파이망을 펼치고 있었고 또 이렇게 사소한 곳까지 감시의 눈길을 번득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신과 밀정을 통해 관료 하나하나를 일일이 마크해서 감시 내지 감독 내지 관리하는 옹정제의 통치방식은 향후의 대형사업에 요긴하게 사용되게 된다.

2.1.2.2. 지정은제와 사민일괄부역

옹정제의 개혁 조치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정은제는 국가 재정 수입 구조를 합리화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명나라 때의 일조편법은 토지세와 인두세를 각각 징수하였으나, 지정은제는 인두세를 토지세에 합하여 징수하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세가 토지세로 일원화되고, 땅이 없는 소작인들은 세금이 면해지게 되었다. 세금 징수 체계가 간결해지고 징세 대상자가 명확해져 세금을 효율적으로 부과하고 징수할 수 있게 되었다.41

뿐만 아니라 옹정제는 향신 본인만 부역을 면하도록 하며, 향신의 자손들이 부역을 회피하면 벌하게 하였다. 생원, 진사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을 담당하게 하여 그들의 특권을 폐하였다.42

당연히 기득권층의 반발이 잇따랐다. 과거만 보고 벼슬길에 나오지 않은 지방 향신, 신사들은 토호화, 호족화되어 관리들도 함부로 다룰 수 없었고, 향신들은 세금을 체납하고 거부함으로써 관리에게 불복종하고 평민들을 괴롭혔다. 강희제가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은 것과 달리, 옹정제는 그야말로 두들겨 패면서 말을 듣게 만들었다.

산동성에서는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반발이 심했는데, 옹정제는 산동성 향신 1천 4백 명의 공명을 모두 박탈해 버렸다.43 하남성에서는 황하 제방 공사에 옹정제의 사민일괄부역에 따라 신사층까지 노동력이 징발되자 생원 왕손, 무생 등이 지현을 협박하고 다른 생원들을 선동하여 향시를 거부하였다. 얼마 후 개봉에서 치러진 향시에서, 범호라는 무생이 답안지를 작성한 자들의 답안지를 빼앗아 찢어 버렸다. 옹정제는 주도자인 왕손과 범호를 잡아들여 처형하고, 앞으로 또 단체행동을 하면 영원히 응시자격을 박탈하겠다는 교지를 내렸다.44 이렇게 기득권자들을 철저히 짓밟은 결과 옹정제의 세제개혁이 이루어졌다. 인두세가 없어짐으로써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빈곤층의 부담이 덜어졌고, 세금이 두려워 호적을 등록치 아니하던 이들이 기어나와 청나라 인구는 급증하게 된다.45

2.1.2.3. 부정부패에 대한 대응

재물을 탐하는 것은 관리의 본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관료제의 부정부패는 뿌리 깊다. 옹정제는 세 가지 방향으로 이 문제를 접근했다. 첫째는 전술한 세제개혁을 통한 세금징수의 간결화이고, 둘째는 모선귀공과 양렴은으로 대표되는 정책적 방안, 셋째는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탐관오리를 잡아다 처단하는 것이었다.

모선(耗羨)은 명나라 때부터 지방에서 불문율로 내려오던 세수 정책이었다. 명나라 때와 청나라 때의 관리들은 워낙 박봉이었기 때문에, 국가에 필요한 세금 외에도 관리들이 부가세를 걷는 것을 역대 황제들이 거의 눈감아주고 있었다.46 강희제는 모선을 법에 명시하고 일정 범위에서만 걷도록 하는, 일종의 지하경제 양성화를 꾀했지만 부패 관리들은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47

옹정제의 모선귀공은 아예 모선을 전용하여 국고에 편입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지방에서 모선을 걷어 이것을 중앙에 상납하고, 이렇게 국고에 모인 모선을 다시 지방에 분배하는 것이 골자였다. 언뜻 보기에는 백성→지방관 절차가 백성→지방관→중앙→지방관 으로 번잡해진 것 같지만, 모선이 중앙에 상납됨으로써 횡령을 방지하고, 또 모선을 많이 걷어 봤자 중앙에서 최종적으로 나눠주는 분량만 받을 수 있으므로 지방관들의 과잉징수의 동기부여가 사라지게 되었다.48

그리고 옹정제는 부정부패의 근본적 원인이 관료의 박봉이라고 생각하여, 모선귀공을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일종의 보너스인 양렴은을 지급하였는데, 이 양렴은의 액수가 녹봉의 수십 배에서 백수십 배에 달하였다.49 하지만 양렴은의 재원이 결국 관리들이 걷어 바친 것을 도로 풀어주는 것이었으므로, 백성들에게는 원래 모선을 걷던 만큼 이상의 부담이 돌아가지 않았다.

2.1.2.5. 관료제와 붕당 견제

옹정제는 빈틈없는 절대독재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 누를 끼치는 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존재를 허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개혁정치를 수행할 손발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관료들마저 불신했다. 옹정제에게 관료란 사무 처리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문인 취미나 재산 축적 따위를 통해 특권계급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옹정제는 천자 이외의 만민은 모두 평등하며, 특권이란 오로지 천자 한 사람만의 독재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50

그렇기에 옹정제는 관료들이 모여 형성되는, 그리고 그들의 이익단체로 기능할 수 있는 붕당이 발생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관리 선발 과정이었던 과거제 역시 과거시험을 통한 학연과 인맥이 형성된다는 이유로 불신했다.5152 옹정제는 진사시, 즉 과거 출신들이 관직을 독식하는 당나라 이래의 현실에 불만을 가졌으며, 본보기를 삼아 이불, 양명시 등 덕망 있고 문장을 잘 쓴다고 칭송받던 자들을 잡아다 볶아쳤다.53 1724년에는 《어제붕당론》이라는 책을 지어, 붕당을 옹호한 송나라 때 문인 구양수(歐陽脩)를 사악한 자라고 공개 비난하였다.54

옹정제는 진사 붕당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그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이때 탄압당한 이들 중 건륭제 즉위 후 복권된 자가 몇몇 있는 것을 보아, 실제로 죄가 있든 없든 황제의 의도에 의해 계획적 탄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하들은 황제가 두려워 인물을 천거하거나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것도 조심하게 되었다. 이로써 옹정제는 사실상의 인맥, 학연으로 작동하던 붕당을 와해시킴으로써 관리들의 청렴도를 높임과 동시에 신하들의 정치력을 분산시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다.55

옹정제의 관료에 대한 견제와 불신은 다른 개혁정책의 기본적 바탕이 되고, 절대자인 황제 이외의 다른 누구도 인정할 수 없다는 독재군주 옹정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2. 사상통제와 화이무격

청조는 선대의 요, 금, 원과 같은 정복왕조이며, 그 근본이 오랑캐, 곧 이(夷)에 있다. 중국인의 화(華)와 오랑캐의 이(夷)를 칼로 벤 듯 이분하는 화이론 체계는 청조 체제에 반발하는 한족들에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여지가 다분하였다. 이것은 청나라 황제의 최대 약점으로, 지배 구조를 아무리 강화하고 지배 영역을 아무리 확대해도, ‘중화’에게 ‘오랑캐’라고 칭해지는 순간 그들은 ‘중화’를 지배할 정통성을, 황제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56

옹정제 이전의 황제들 역시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옹정제에 비해 관대한 정치를 하였다고 평가되는 강희제 역시 문자의 옥을 통해 한족에 대한 사상통제를 펼쳤다. 옹정제 역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것은 동일하였으나, 한 가지 사건에서 그의 색다른 대처가 눈에 띈다.

2.2.1. 증정 모반 사건의 전말

1728년(옹정 6년), 숙청당한 연갱요의 후임으로 재직하던 총독 악종기에게 장희라는 자가 서신을 전해왔다. 당신이 송나라 때 여진 오랑캐들과 싸운 악비 장군의 후손이니 나와 손잡고 청나라 오랑캐들을 몰아내자는 내용이었다. 화들짝 놀란 악종기는 장희를 잡아 가두고, 그를 패고 회유하고 하여 장희의 스승인 증정(1679년생)을 체포하였다.

증정은 그야말로 백면서생으로, 명말청초 때의 중화주의 사상사 여유량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 다짜고짜 악종기에게 편지를 보내 반란을 권했던 것이다. 당연히 씨도 먹히지 않았고, 악종기는 증정과 장희를 냉큼 잡아다 황제에게 넘김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했다. 또한 증정은 화이론에 의한 만주족 물러가라 정신 외에도, 자연인 옹정제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옹정제는 어찌된 일인지 증정과 장희를 능지처참해버리지 않았다. 그는 측근 오르타이에게 보낸 편지에 “이 같은 괴물을 마주쳤으니 한번 절묘하게 요리하려 한다. 그대는 살펴보기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황제는 이 반란 같지 않은 반란 사건의 처리를 반란 ‘진압’이 아니라 괴물의 ‘요리’로 생각하고 있었다.57

2.2.2. 증정의 처분과 대의각미록

형제와 공신에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듯 매정했던 옹정제는 증정을 살려주었다. 증정이 실질적으로 자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백면서생에 불과하며, 오히려 이용가치가 충만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옹정제는 증정을 관찰한 결과, 그가 실로 어리숙한 시골뜨기로, 포섭하기 매우 쉬운 자라는 것을 간파하였다.58

옹정제는 전술한 왕경지는 아버지 강희제를 비난했기에 살려둘 수 없었지만, 증정의 험담은 자신에 대한 것이고 어차피 다 사실무근이기에 피해본 것이 없다며 증정을 살려 주었다. 하지만 증정이 모반을 꾀할 ‘생각’을 품게 만든 여유량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이 모든 사건 처리에 5년이 걸린 대사건이었다.59

증정은 옹정제 앞에 끌려와서 몇 달에 걸쳐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며 논쟁을 벌였고, 처절하게 패배하였다. 옹정제가 산더미같은 주비주접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얼마나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황제인지 과시하자 증정은 진심으로 감동하여 자신이 하늘을 찌르는 죄를 지은 중죄인이라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강압이나 정신적 고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사상개조를 당한 것이다.60 증정은 황제가 도덕적으로 결백하며 엄청난 양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보고는 황제를 칭송하고 여유량과 같은 자들의 패역무도함을 통찰하게 되었다.61

옹정제가 증정이 모반할 ‘생각’을 제공한 여유량은 부관참시하고, 여유량의 ‘생각’을 주입받은 증정은 ‘사상개조’를 시켰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옹정제는 이번 기회에 만주족 황실을 경원시하는 한족들의 그 생각 자체를 뜯어고치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다. 강희제와 비교해 이것은 얼핏 소극적인 조치로 생각될 수 있으나, 무력에 의존한 사상탄압은 이미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문자옥의 대상자 역시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였다. 힘에 의존한 탄압이 계속되면 공포는 무뎌지고 한만 사무치게 된다. 그에 반해 교육을 통해 사상을 개조하면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한 번 효과를 발휘하면 그 효과는 지속된다.62 옹정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화이론에 도전했으며, 그 도전은 강희제의 철저한 탄압과 비교해 더욱 적극적인 대응이라 하겠다.

말인즉슨 옹정제는 몇 세기에 걸쳐 ‘중화’가 ‘오랑캐’에게 제시한 화이사상에 맞서, ‘오랑캐’의 입장에서 이론적인 반론을 ‘중화’에게 제시하려 한 것이다.63 그리고 그 시범 케이스인 증정이 오랑캐 황제 옹정제에게 사상개조를 당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황제와 역적이 공저한 사상 초유의 ‘반역의 책’ 《대의각미록》이다. 황제와 증정은 몇 달에 걸쳐 문답을 반복하고, 결국 증정이 자아비판하게 됨으로써 청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게 된다. 《대의각미록》은 그 재판의 기록이며64 동시에 교화의 수단이었다. 강희제가 명 홍무제의 ‘육유’를 모방한 ‘성유광훈’을 만들어 향촌의 민중을 교화 내지 일상적 세뇌(국민교육헌장과도 같은)를 하였는데, 옹정제는 이 소위 교화의 범위를 지배계층에까지 확대하고자 하였다. 앞서 언급된 《어제붕당론》은 관료들을 교화하기 위함이었고, 《대의각미록》은 화이론으로 청나라에 반대하는 한족 지식인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65

《대의각미록》은 화이론을 공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 옹정제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비난인 소위 십대죄상(애비를 모해하고[謀父], 어미를 핍박하고[逼母], 형을 죽이고[弒兄], 동생을 죽이고[屠弟], 재물을 탐하고[貪財], 살생을 즐기고[好殺], 술에 탐닉하고[酗酒], 색에 빠지고[淫色], 충성을 바친 자들을 내치고[懷疑誅忠], 아부와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한다[好諛任佞])66 에 대한 옹정제의 해명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해명으로 인해 긁어부스럼 격으로 십대죄상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을 수거하여 흑역사 취급하거나 증정을 다시 처분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의각미록》의 편찬의도와 그 논리에 대해 강력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2.3. 화이일가와 대중화주의

《대의각미록》에서 밝히는 옹정제의 주장의 요지는, 중국은 고대로부터 계속해서 영역을 확대하고 있으며, 그때마다 그 이전의 지역을 병합하여 새로운 중화로 성장해온 존재이기 때문에 고대부터 중화와 오랑캐가 함께 존재했던 다민족국가였다는 것이다. ‘중국은 다민족국가다’라는 전제가 가능해진다면, 그 다음부터는 청나라야말로 그 다민족국가의 이상적인 구현자가 되고, 지배자가 오랑캐라는 이유로 정통성을 상실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지배자인 황제에게 요구되는 것은 ‘천명’에 부합하는 군주로서의 덕의 유무일 뿐이다.67

이것이 소위 ‘화이일가’(華夷一家)이며, 옹정제가 고안해낸 청 제국의 국가표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역시 근본이 ‘오랑캐’였던 수당 시대의 화이무격(華夷無隔)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걸쳐 중원에 침투하여 한족과의 갈등이 많지 않았던 남북조시대 북조 국가의 후신인 수당, 또 급격하게 쳐내려와 한족에 대한 차별을 펼쳤던 정복왕조 요․금․원과 비교하여 둘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던 청나라는 오랜 고심 끝에 이런 결론을 이끌어냈다.

옹정제가 찾아낸 해답의 세계관에서 중화 세계 역시 거대한 전체 청나라 세계에 포함되는 하나의 세계에 불과했다.68 그런 의미에서 청나라는 세계제국이었다. 그런데 옹정제는 동시에 다민족 세계제국 청나라를 관료제기구라는 특성을 가진 전통적인 중국국가로 완성시켰다. 이시바시,69 그리고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화이일가의 세계관에서 치명적인 모순을 발견했고, 증정을 능지처참한 뒤 《대의각미록》을 금서처분하게 된다.

2.3. 황제 붕어, 그 이후

2.3.1. 의문의 붕어, 떠도는 헛소문

1735년 음력 8월 20일, 양력 10월 6일. 13년 가까이 절대권력을 휘두른 독재자가 돌연 쓰러졌다.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위독해졌고, 양력 10월 8일 새벽에 황제는 붕어했다. 신하들을 혹사시키고 또 자신을 혹사시키는 옹정제의 통치 방식을 생각해 보았을 때, 13년 끝의 과로사는 일중독 황제의 죽음을 설명하기에 별다른 의문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암살설에 독살설에 갖은 풍문이 돌았는데, 개중에는 증정 사건 때 멸문을 당한 여유량의 손녀 여사랑(呂四娘)이 무술을 배워 궁녀로 궐에 잠입하여 옹정제의 목을 베어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는,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까지 있다.70 이러한 유언비어들은 역사적 사실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소위 지식계급의 희망사항이 형상화된 것으로, 옹정제가 특정한 자들에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운 자였음을 짐작케 한다.71

2.3.2. 건륭제 – 내실 없는 팽창

옹정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6대 건륭제는 생애 열 번의 군사원정을 성공시켰다고 하여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자칭했다. 하지만 그는 걸출한 할아버지, 아버지와 비교해 볼 때 속빈 강정 같은 자였다.

건륭제는 강희제와 옹정제가 수행한 내정개혁의 위업을 이어받아 편안한 상태에서 즉위했으며, 두 황제만큼의 뛰어난 정치적 내정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의 정치는 대체로 무력에 의한 외정과, 이를 위해 국고를 소모한 것 외에는 특별한 점을 찾기 어렵다.72 그리고 건륭제의 장기간 외정은 국고를 궁핍하게 만들고 국력을 저하시켰다. 건륭제 만년에 청나라는 이미 혁신의 동력을 상실했고, 이후 아편전쟁 전후의 무능과 서태후의 반동정치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토양을 마련했다.73

강희제 말년에 잠시 싹을 틔었다가, 옹정제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혀 단속당했던 퇴폐성은 건륭제 말년에 다시 싹을 틔었고, 그것을 대표하는 존재가 건륭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엄청난 부정축재를 저지른 권신 화신(和珅)이었다. 건륭제는 생애 열 번의 원정을 십전무공이라느니 자랑했지만, 거듭되는 원정과 관료의 부패는 국력을 약화시킬 뿐. 심화되는 사회모순 끝에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양위한 바로 그 해(1796년) 백련교의 난이 폭발했고, 청나라는 꾸준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74

2.3.3. 건륭제와 《대의각미록》

전술했다시피 건륭제는 아버지의 역작이었던 《대의각미록》을 금서 처분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인지라, 《대의각미록》은 그 뒤에도 암암리에 계속해서 읽혀졌다. 이것은 옹정 연간, 《대의각미록》을 통해 구구절절 해명을 늘어놓은 것이 오히려 의혹을 사서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판단한 건륭제가 《대의각미록》을 아예 묻어버리려 한 것이라 설명된다.75

그런데 또다른 설에서는, 아버지의 명예 같은 추상적인 문제보다, 군주로서의 권력과 체제 유지에 직결되는 치명적인 문제 때문에 건륭제가 《대의각미록》을 금서처분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건륭제의 소위 십전무공은 1747년의 대금천 출병부터 1791년까지의 제2차 구르카 출병까지인데, 1758년의 회부(=신강) 출병을 기준으로 전후를 비교하면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1758년 이전에는 영토 자체를 넓히고, 실제적으로 최대 판도를 형성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이미 평정된 조공국과 번부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수준에만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건륭제 버전 문자의 옥이라 할 수 있는 《사고전서》 편찬이 1771년, 《대의각미록》 금서처분이 1776년으로 모두 회부 출병 이후의 일이다.76

회부 출병 이전의 건륭제의 대외원정은 《대의각미록》에서 주장하는 화이일가, 대중화주의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즉, 옹정제가 건륭제의 행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회부 출병 이후 건륭제는 《대의각미록》을 묻어버리려 하고 군사 원정도 이전에 비해 실질적 이득이 급감했다. 그 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앞서 언급하였듯 건륭제가 발견한 화이일가 세계관의 치명적인 허점은 다음과 같다. 옹정제는 ‘오랑캐’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며, “중국의 영역 안에서 중국화하고자 하지 않는 자를 오랑캐로 배척한 것”이라며 화이의 구분은 문화적 요소에 있음을 강조하여 혈통에 의해 화이가 불변하다는 한족들의 화이론을 공박하고, 자신이 중화의 군주로서 군림할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한다면,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하고, 중국어로 올라온 공문서는 고집스럽게 만주어를 번역하며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한 만주족은 스스로가 오랑캐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중화의 문화를 거부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로써 만주족 황제는 중화를 지배할 정통성을 다시금 상실하게 된다. 강희제, 옹정제만큼의 정치적 내정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던 건륭제는 통치 능력의 한계에 부닥쳤고, 이 치명적 허점을 발견하게 되자 공포에 떨게 된 것이다.77

3. 결론

옹정제는 강희제 말년의 보수성과 계승권 다툼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을 배경으로 즉위하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인 강희제의 유산, 그리고 청나라 황제의 필연적 과제인 만한 갈등을 해결해야 했다. 옹정제는 숙청과 태자밀건, 군기처 등을 통해 자신의 독재권을 확립하였다. 형제들의 이름을 개돼지로 개명시키면서 자신에게 절대복종할 것을 요구하였고, 자신의 권위에 누 또는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혹사시켜가면서 내정 개혁에 매달렸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청말의 장학성(章學誠)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전기(轉機)”라 했을 정도였다.78 증정의 모반사건을 처리하는 자세에서는 중국이 원래 다민족국가라는 발상 전환을 이루면서 한족의 화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군주 1인이 만들어낸 체제는, 군주 1인에 의해 붕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방관 개개인에게서 주접을 받고 주비를 보내고, 신하들이 서로를 감시하게 해 스파이로 사용하는 옹정제식 정치는 군주 개인의 혹사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옹정제가 죽고 나서 그의 고명대신이 된 장정옥과 오르타이는 옹정제의 정책을 계속 이어나가기는커녕 건륭제 시대가 강희제 식의 ‘관대한 정치’로 회귀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79 이것은 그들이 불충했거나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옹정 13년 동안의 긴장을 더 이상 유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옹정제에 이은 건륭제의 시대는 허울뿐인 십전무공과 보수의 시대였다. 옹정제의 혁신성을 상징하는 《대의각미록》을 파묻어 버린 것은 건륭제의 보수성을 상징하는 행위였다.80 건륭제 이후 청나라는 보수화했고, 화이일가 세계제국에서 다시금 중화제국으로 회귀했다.81 한낱 시골 서생에 불과한 증정의 목을 날려버리지 않고 그의 사상 자체를 개조하려 든 옹정제의 집요함은,82 천하의 모든 책을 취사선택하고 그 중에 들어있지 않으면 금서로 처분하는 건륭제의 《사고전서》로 대체되었다. 건륭제는 오랑캐 이(夷)라는 글자 자체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려 했고, 한족들이 청나라가 이민족 왕조임을 잊어버리게 하는 대신 만주족이라는 민족이 한족에게 흡수되어 흔적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옹정제가 그렇게 경계하였던 관료제는 더욱 공고해졌고, 관료제라는 괴물을 제어하지 못한 청나라는 부패와 혼돈 속에서 침몰하였다.

옹정제의 혁신성의 상징이라는 《대의각미록》을 통한 대중화주의는 건륭제의 대규모 군사원정의 명분과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 원정이 청나라의 국고 낭비와 국력 약화의 원인이 되었음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또한 끝까지 만주족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려 한 청나라 황제 옹정제의 대중화주의가 현대 중국에서 변용되어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지워버리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현대판 개토귀류로 되살아난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이며 기괴하기까지 한 일이라 하겠다.

4. 참고자료

국내 단행본

  • 東洋史學會 편, 《東亞史上의 王權》, 한울아카데미, 1993년.
  • 박한제 외 저,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2007년

외서 단행본 번역서

  • 둥예쥔 저, 황보경 역, 《옹정 原典 치국》, 시아출판사, 2004년.
  •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차혜원 역, 《옹정제》, 이산, 2001년.
  • 옌 총니엔 저, 장성철 역, 《대청제국 12군주열전 上》, 산수야, 2007년.
  • 이시바시 다카오 저, 홍성구 역, 《대청제국》, 휴머니스트, 2009년
  • 조너선 스펜스 저, 이준갑 역, 《반역의 책―옹정제와 사상통제》, 이산,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