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박물관 답사

남양주 실학박물관의 상설전시실은 총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전시실의 이름은 순서대로 ‘실학의 형성’, ‘실학의 전개’, ‘실학과 과학-천문과 지리’이다. 제1전시실에서부터 순서대로 제2, 제3전시실 순서로 관람하고 밖으로 나오게 되는 구조를 각 전시실의 이름과 함께 생각해 보면, 박물관이 전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의는 비교적 자명하다. 이 동선에는 실학이 형성되고 전개된 결과에서, ‘과학’이라는 요소를 읽어내고자 하는 욕구가 선명히 드러나 있다. 실학에 대한 여러 통상적 인식 중에서 가장 가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꼽으라면 무엇보다 실학과 과학, 정확히는 서양 과학(‘서양 문물’)의 상관성이라 할 것이다.

박물관 현관 바로 바깥에는 실제 발사가 가능하다고 자랑스럽게 쓰여 있는 홍이포 복원품이 놓여 있으며, 큰길에서 박물관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거중기가 놓여 있다. 유리장 안에 들어 있는 자그마한 유물들과 비교하면, 비록 복원품이라 할지라도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홍이포와 거중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또는 전달할 수 있는 의미는 작지 않다. 이 둘은 모두 실학에 관한 통상적인 인식의 단면 중 하나인 과학기술적 면모를 상징하는 물건들인 것이다.

제3전시실의 전시물은 ‘지리’와 ‘천문’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이는 이 두 분야가 서양에서 전해진 ‘문물’들 중 전통 세계에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전통 세계의 세계관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는 데 성공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지리’ 전시물들과 ‘천문’ 전시물들의 칸막이 구실을 하고 있는 큼직한 곤여만국전도를 보면 이 지도를 처음 보았을 조선인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할 수 있다. 박물관 측의 설명에 따르면, 곤여만국전도가 1602년 전래되면서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곤여만국전도를 통한 놀라움의 크기가 세계관에 금을 낼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을까? 1602년은 명나라 만력 30년이다. 명나라가 부패하고 쇠하기는 했으나, 멸망하기까지는 아직 40년도 더 남았다. 곤여만국전도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중국이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고(마테오 리치의 배려로), 조선은 그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조선에 이 지도가 처음 들어온 1603년에 어떤 식자가 지도를 보고, 중국이 세상의 가운데 있고 거기서 멀어질수록 야만하다는 종래의 의식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곤여만국전도의 바다나 미지의 남방대륙(‘테라 아우스트랄리우스’)으로 눈을 돌려보자. 바다에는 기괴한 모습의 물고기와 고래가 그려져 있고, 남방대륙에는 용이나 키메라와 같은 괴물들이 그려져 있다. 미지의 범위가 태평양 한가운데나 저 멀리 남극 같은, 아직 서양인들에게도 밝혀지지 않은 공간으로 밀려났을 뿐, 여전히 그 의식 자체는 중국에서 먼 곳은 괴물딱지가 들끓는다는 『산해경』의 그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의식은 당대 서양인들 역시 아직 탈피하지 못했던 바이다. 곤여만국전도가 사상적으로 미친 영향이 전무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명나라의 멸망과 ‘야만족’ 만주인이 중원을 지배하게 된 대사건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작을 것이다.

지리 쪽의 전시물이 곤여만국전도를 시작으로 해서 김정호 등이라면, 천문 쪽의 전시물은 단연 담헌 홍대용의 「의산문답」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땅덩어리가 둥글다(즉 ‘지구’)는 사실은 홍대용보다 한 세대 앞선 성호 이익도 말하고 있는 바이며, 지구의 개념은 이미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1 그러나 이익은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한 중국과의 접촉을 통하여 이러한 정보를 습득하였고, 때문에 지구의 회전을 부정하고 수정천구 같은 것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서양에선 과학혁명의 선구자들에 의해 폐기되어 가고 있는 것이 조선의 지식인에게는 새삼 새로웠던 것이다.2

이 지점에서 홍대용은 다른 지식인들이 생각하지 못하던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낸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그 구면 위에 중심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지구가 돌고, 저 하늘의 별 하나 하나가 우리 해-지구와 같은 세계이다. 이러한 숱한 세계에서 중심을 따로 비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며, 사실적으로 옳지도 않다. 때문에 중국이 중심이라는 기존의 세계관은 부정되고, 조선은 중심에 예속된 변방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중심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의산문답」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담헌의 의식은 당대에는 노장과 비슷하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생소한 것이었으며, 그의 생존 시기인 영조 말 정조 초에 이와 유사한 발상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산문답」의 내용이 보여주는, 현대 천문학과의 유사성에 감탄하기 전에, 「의산문답」의 구체적인 내용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또 그것이 과학적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의산문답」에서 말하는 소위 지전설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코페르니쿠스의 그것이 아니다. 홍대용은 지구를 제외한 다섯 행성들(오위)이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했다.3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설과 전통적인 천동설을 모두 부정한 튀코 브라헤가 내놓은 대안가설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지구가 돈다면 어째서 사람이 땅에 붙어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땅이 돌면서 땅의 기와 우주 공간의 공허의 기가 서로 부딪혀 갈마들고, 마치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분리되기에 노른자인 땅에 우리는 붙어 산다고 하는데 이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인 혼천설과 거의 다를 것이 없으며 그나마도 용어가 불분명하게 처리되어 있다. 즉 담헌의 지전설은, 엄밀히 말해 튀코 브라헤 우주론과 동양 전통의 혼천설이 결합된 것으로, 그렇게 정교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또 담헌보다 먼저 지전설을 주장했던 김석문은 지구의 자전만 주장한 담헌과 달리 지구의 공전까지 긍정하고 있다. 그리고 담헌이 튀코 브라헤 설을 『오위역지』 등 한문서학서를 통해 배우게 된 것임을 생각하면,4 이익이 범했던 우를 재차 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원설과 지전설 그 자체보다 거기서 이끌어내는 중심이 따로 없다는 결론과 우주무한론은 마치 중국이 중심이라는 것을 해체하고 마치 악라(시베리아)와 진랍(캄보디아)과 그리고 조선이 ‘가장자리’에서 벗어나 각자 주체적인 ‘중심’으로서 존재한다는 의도로 쉬이 읽힐 수 있다.5 그러나 그것만이 담헌의 의도를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일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의문을 가져 보자. 담헌은 노론 낙론으로서 인물성동론 계열이었고, ‘가장자리’와 ‘중심’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인물성동론에 따른 이기론적 고찰에 따른 것이었다. 비록 결론만 놓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읽어낸 것과 다르지 않겠으나, 그 과정과 배경에서 성리학을 거세해낼 수는 없으며,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은 담헌 역시 18세기 조선인이었으며 그의 사유도 당대의 시대정신과 당대의 학문적 논쟁에 따른 결과였음을 무시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의산문답 맞은편에는 혼천의가 세 개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각각 조선의 것과 중국의 것, 일본의 것이었다. 그쪽을 따라가면, 중국의 고증학과 일본의 고학을 조선의 실학과 동일선상에서 언급하고 있는 꼭지가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정치경제의 개혁에, 중국에서는 고증학과 철학에, 일본에서는 과학과 기술에 치중하였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실학자들 중 과학과 유사한 활동을 한 사람의 비중과, 동시대 일본에서 난학에 종사한 학자들 중 과학에 유사한 활동을 한 사람의 비중이 거의 동일했던 것처럼 서술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본 박물관의 제3전시실만 해도, 절반은 지리와 관련된 것이고, 과학과 관련되었달 사람은 홍대용과 최한기가 중심인데, 그나마 이 둘의 사이에는 거의 100년의 시간간격이 존재하고, 홍대용보다 앞서 지구자전 뿐 아니라 지구공전까지 이야기했던 김석문은 홍대용보다 반세기 앞서 살았던 사람이다. 홍대용이 김석문과 독자적으로 자신의 사유를 풀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하나의 학문적 전통을 형성하지 못하고, 간극이 큰 각자의 시대에 점점이 존재했던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더구나 ‘천문’이라 함은 전근대 사회에서도 충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국의 과학전통이 마치 조선시대까지 소급되는 것처럼 서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제3전시실의 끄트머리로 가면 이제 커다란 대동여지도가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려진 채 누워 있고, 그 위에는 ‘실사구시’, ‘자아의 발견’, ‘조선학’, ‘문명세계를 향하여’라고 적혀 있다. 이 판을 따라가면 전시실 출구이다. 즉 실학이란 문명세계를 향하여 가는 출구였으며, 이것이 서양의 과학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전구물은 되는 존재이며, 오늘날 이루어지는 과학활동과 전근대의 학문행위 사이의 과도기적 가교라는 것이 박물관이 전달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결론인 것이다.

앞서 담헌이 지구가 자전하는데 사람이 날아가지 않는 이유를 다소 애매하게 얼버무렸음을 지적했는데, 「의산문답」의 다른 내용들도 대개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사변에서 이끌어낸 결과를 논하고 있다. 담헌에 따르면 자석이 철을 잡아당기고 호박이 티끌을 잡아당기는(정전기) 것은 근본이 같은 것들이 서로 당기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자석과 철의 근본이 무엇인지, 호박과 티끌의 근본이 무엇인지, 양자의 근본은 같은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담헌의 결론이 현대 천문학의 결과와 유사한 점이 많고, 또 담헌의 주장에서 과학적 고찰과 유사한 것을 읽어낼 수 있겠으나, 그것이 성리학적 논변이 어쩌다 보니 현대과학의 그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닌지, 또는 과학이라는 소위 “근대성의 필수요소”가 우리의 과거에도 존재했다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근거를 취사선택한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담헌 뿐만 아니라 모든 ‘실학자’들에게 해당되는 바일 것이며, 이러한 의구심이 해결되지 않은 채 박물관 출구에서 이야기하듯 “이미 실학의 단계에서 학문은 종합학문에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의 분과학문으로 분화될 소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단정하는 것은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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