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정조와 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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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털보 돼지

정조에 대한 통념과 반박

  • 계몽군주: 깨우친 임금
  • 실학군주: 실학자라는 사람들이 거의 정조 밑에서 일했으므로 그들을 후원했을 것
  • 절대군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탕평

→ 한 마디로 "근대화"에 이바지할 수 있었던 왕

만년떡밥 독살설

  • 가장 유명한 사람이 이덕일 (교수님 가로되 "학자가 아닌 사람")
  • 정조는 즉위후 사도세자 죽음에 연루된 자들을 내쳤고 그 증거가 수원화성이다
  • 빈번한 암살 위협:
    •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정통성 불안요소
    • 영조는 정조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킴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정치보복의 시도?
    • 실제 정조는 거의 모든 세력을 포용
    • 그들을 모두 내치면 정치를 진행할 수가 없으므로, 군주로서 그러기는 불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다.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불이본[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인정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다. 향사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에게도 마땅히 경외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또한 대비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론하고 결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아, 선대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해당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대왕의 능에도 고하겠으니, 모두 다 알아야 할 것이다.

군사론

군주성학론

  • 군주 역시 인간이며 사대부 중 하나로 태어날 뿐이기에 후천적 노력(성학)으로써 성군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
  • 그 노력 = 공부 = 경연의 강조, 그 경연을 주도하는 것은 사대부
  • 국왕수신서(이이의 성학집요, 이황의 성학십도)
  • 이데올로기(학문과 도덕)의 주체는 사대부

군사론

  • 군사(君師)란 군주이자 스승

총명하고 지혜로워 하늘에서 받은 인의예지 본성을 능히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하늘이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만백성의 군주와 스승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쳐서 본성을 회복하게 한다.

「대학장구서」

  • 정조는 그 이전까지의 경연의 주도권을 뒤집어, 군주가 스승의 위치에 서는 것을 추구
  • 학통(도통)과 왕통의 일치화. 학문과 도덕의 주도권이 군주에게 넘어감
  • 프로토타입: 영조의 황극( = 군극; 북극성) - 왕은 북극성 같고 나머지는 그 주위를 도는 존재일 뿐
  • 정조는 영조에서 더 나아가 유교의 도통 자체를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

우현좌척론(aka 의리탕평): 현인을 가까이하고 척신을 구축한다. 송시열의 후계 유림을 자신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송시열을 성인으로 선포

주자학 보급과 각종 출판

주자서 선본 편찬

  • 주자회선, 주자회통, 자양자회영, 주서백선, 주자서절요, 양현전심록, 주문수권, 어정주서분류

주자전서

  • 정조의 주자서 애독

어릴 때부터 주자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입으로 그 구절을 외우며, 마음 속으로 그 뜻을 강구하고 사색했다.

『홍재전서」 182권

  • 주자의 저작을 모두 모으겠다는 사업
  • 사업 진행 중에 정조가 죽은 뒤 흐지부지

송자전서

  • 『우암선생문집』 증보 및 재간행 - 본집 158권 60책, 별집 9권 3책
  • 송시열을 "송자"로서 성인의 반열에 올림
    • 당대에도 조선에서 멋대로 성인을 정할 수 있느냐면서 참람되다면서 말이 많았음
  • "군사"로서 송시열을 정치적 학문적 지향성으로 삼고, 송을 비롯한 산림들의 춘추대의(조선중화, 화이론)를 계승
  • 주자에서 송자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주장

결론: 학문적으로 철저히 성리학과 중화사상을 따르던 꼰대였던 정조

사학 배척

문체반정

文 이란

  • 문은 理가 나타나는 무늬
  • 그렇기에 문 역시 곧 유교 문화를 의미함
  • 유교적 이념에 따르면 글자 하나하나에는 모두 이치가 담겨야 하고 도가 남겨야 하는 것이다
  • 글을 짓는 행위 = 의를 실천하는 행위
  • 그러므로 문체란 이치를 담은 형식이며, 그 문체는 지켜져야 한다.
  • 당송팔대가를 비롯한 표준 문체가 있었고 그 문체 대로 따라하면(또는 따라해야) 되는 것

문장은 한 시대의 체제가 담겨 있어서 세도와 더불어 같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그 문장을 한 번 읽어보면 그 문장을 낳은 세상을 논할 수 있다. 주나라의 도가 쇠퇴하자 모사들이 자유분방한 문장을 구사하였고, 한나라의 위업이 크게 일어나자 서경의 문체가 바르고 우아해졌다.

문체반정의 배경

  • 옛날에도 다를 바 없었던 서울 공화국화(귀경천향)
  • 한양에 근거지를 둔 경화사족 형성 - 관료를 배출하고 청나라를 사신으로서 왕래
  • 청나라의 문화, 특히 최신의 정보를 담은 들이 경화사족들을 통해 서울을 중심으로 유통 - 곧 북학의 형성
  • 정조가 본 북학의 세 갈래
    • 명청의 소설과 패관잡서, 서양의 수학과 천문학, 도자기 등의 사치품
    • 이 중 가장 문제시한 것이 첫 번째 것.
    • 자유로운 문체를 계속 접하면 그런 것을 쓰기도 할 것이며 문체가 자유로우면 글에 도리를 담을 수 없으며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염병할 놈들의 구체적 예

  • 박지원의 『열하일기』
    • "춘추대의(북벌대의론)을 거스르는" 문제의 작품
    • 박지원에게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박지원이 카더라로 전해들음
  • 박제가의 『북학의』
    • 박지원보다 더 심한 당괴(唐魁; 중국빠)
    • 친구인 이덕무마저 만주인과 티베트인의 글 따위를 어찌 읽을 수 있냐고 까댐(마음쓰는 것이 어찌 그처럼 한결같이 크고 넓으시오?)

문체반정 조치

  • 중국서적 수입금지령(1791년)
    • 문제시된 패관잡기 뿐 아니라 경전과 역사서마저 금지(why?)
    • 당시 중국 책들은 문고판 정도 크기라 편하게 볼 수 있었음. 그러나 어찌 감히 성현의 말씀을 편한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느냐?
  • 과거에 합격해도 문체를 따르지 않으면 탈락시키고 앞으로도 과거 못 보게 해라
  • 불똥 맞은 사람들
    • 이옥: 과거에 장원급제 했으나 문체가 엉망. 그러나 내용은 좋아서 정조가 새로 써서 내면 합격시켜 주겠노라 했는데 조까라 하고 평생 과거를 보지 않음
    • 남공철: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인 남유용의 아들이나 얄짤없이 혼나고 문체 고치지 않으면 경연 들어오지 말라고 함
    • 박지원: 만악의 근원. 지방관 재임 와중 문체를 경고하자 장황한 반성문을 제출. 그러나 말로만 반성하고 이후로도 지 꼴리는 대로 글쓰고 살았다.
    • 김조순: 무협지(「오대검협전」) 써서 읽다 걸려서 반성문 제출. 그 반성문의 문체가 워낙 좋아서 눈에 들고 나중에 외척까지 됨 하여튼 만악의 근원 정조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옥 같은 사람들이 그 이후 쏟아져나옴. 오늘날 국문학계에서 그것들로 먹고살고 있다.

천주교 탄압

  • 1785년 정약용 형제가 천주교 교리를 두고 토론하다 형조에 적발됨
  • 1791년 충청도에서 윤지충(얼마 전 교황 왔을 때 시복됨), 권산영이 신주단지를 우상이라고 태워 없앰 → 처형하고 천주교 서적 압수 후 소각
  • 천주교 탄압은 정조 당대보다는 정조 이후에 흥함
  • 정조에게는 먼 바깥에서 온 천주교보다 내부의 적, 곧 자유문체(박지원 따위)나 사이비(양명학 따위)가 더 암적인 존재로 인식

그렇다고 정조가 무시무시한 보수반동적 존재였는가 하면 그런 단정도 정조를 개혁군주라고 하는 것만큼 곤란
이러한 의식은 정조 뿐 아니라 일부 반골을 제외한 대다수 사회 상층 엘리트의 시대정신이었고 정조는 권력자로서 그것을 제도화한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