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좋아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그 남자는 재미없기로는 학교에서 최정상을 달리는 남자였다. 그렇다고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친구가 많을 만큼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닌 조용히 책이나 읽다가 공부나 하는,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아웃사이더에 지나지 않았다.

“1억이야, 어때?”

그러니까 일종의 게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스카웃 방식으로 운영되는 인기 있는 여성들의 비밀 모임 같은 곳에 가입되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여기저기서 돈이다 명품이다 바쳐 오는 남자들 때문에 돈이 썩어나는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제안을 한 것인데. 그 제안이 뭐였냐면, 1년동안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어 보이는 그 남자와 연애를 하면 1억을 주겠다는, 그런 제안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무리 재미있고 잘생긴 남자라 해도 한 달도 지겨운데, 이렇게 재미없는 남자와 1년이라니. 하긴, 그 년들도 내가 절대로 버티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이런 제안을 해 온 게 틀림없겠지만. 웃기지 말라지, 1년 뒤, 그 년들은 땅을 치며 아울렛을 뒤지고 있을 것이며, 나는 백화점 명품관에서 무슨 백이 좋을지 고르고 있을 것이다. 정말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어머, 견딜 수 있겠어?”

“그건 걱정 마시고, 너네들 돈이나 준비해 두셔.”

그러자 모여 앉은 그년들이 가증스럽게 웃는 게, 아주 짜증이 났다.

어쨌거나 아까까지만 해도 내 앞에 서 있던 그는 어버버거리다가 전화번호를 받고 돌아갔고, 며칠 후 그와 나는 사귀게 되었다.

그와의 데이트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지루했다. 그는 술 같은 것은 전혀 마실 줄 몰랐고, 자기가 먼저 데이트 코스를 정할 줄도 몰랐으며, 심지어 먼저 만나자고 하지도 않았다. 왜 그러냐고, 내가 좋지 않으냐고 물어보니 그건 아니라 쑥쓰러워서란다. 나 참, 웃기지도 않지. 게다가 무뚝뚝하기는 정말 무뚝뚝해서 애교를 부려도 대충 웃고 말 뿐 제대로 받아주는 적도 없고. 그야말로 연애란 것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남자 같았다. 그런 상황은 거의 한 달 가까이 지속되었다. 옷 입는 센스는 자기 딴에는 신경써서 입는다는 것 같은데 상하의와 신발의 부조화가 가히 초현실주의에 가까웠으며, 머리 스타일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지 더벅머리에 이리저리 엉클어져 아주 못 봐줄 지경이었다.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도 이런 놈이랑 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괜히 내 격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흘긋흘긋 쳐다보는 게 마치 어떻게 저 여자가 저런 남자 옆에 붙어 있을까, 여자가 아깝다, 이런 표정들이 눈으로 보이는 정도였다.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닌데. 그래서, 거의 개조에 가까운 관리를 시작했다.

“오빠, 할 말이 있는데.”

“응? 뭔데?”

“그게….”

나는 대충 설명했다. 아무래도 스타일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도저히 말로 해서 알아들을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다짜고짜 그의 손을 잡고 미용실로 갔다.

“어서오세요, 손님! 아, 몇 달이나 머리를 깎지 않으신 건가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 그게….”

“원장님!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보나마나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을 때 대충 적당히 깎아달라고 할 그였기에 그에게 맡기면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내가 전두지휘를 맡았다. 아무리 봐도 촌스럽게 생긴 게 긴 머리가 어울릴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머리를 짧게 깎았다.

“와, 오빠 정말 멋있다!”

“그… 그런가?”

정말 멋있다 수준은 아니고 그나마 봐 줄 만하네 수준이었긴 했지만.

“근데… 오빠. 또 부탁이 있는데….”

“응? 뭔데?”

“옷 말야….”

나는 또 대충 둘러대며 설명해야 했다. 물론 아무 옷이나 입고 있어도 멋있지만 그래도 좀 다른 옷을 입으면 더 멋지겠다고. 내 말에 그는 조금 곤란해하더니

“그게, 돈이….”

라고 했다. 이 남자, 능력도 없다. 그래도 별 수 없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자. 대략 0.1초동안 머릿속에서 그런 계산을 마치고는 나는 웃으며 내가 사주는 거라고 말했다. 조금 속이 쓰라렸으나 게임에 이긴 후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웃었다.

그렇게 몇 년은 입은 듯한 옷들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나름 봐 줄 만한 모습이 되었다. C-가 B0가 되는 정도면 뭐 거의 혁명적인 발전이라 할 수 있지. 나 같은 A+급 여자에는 한창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지만.

하지만 그렇게 겉껍데기를 바꾼다고 속알맹이까지 바뀌지는 않는 법, 그는 여전히 지루했고 그와의 데이트는 여전히 고역이었다. 언제나 나의 표정을 살피는 듯한 그의 표정이 짜증났고 불확실하게 “어디가 좋을까.” 하고 묻는 그의 말에는 화가 났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도 몰라 이리저리 헤맬 때는 진짜 헤어지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오려다 말았다. 하지만 그 같이 둔감한 남자가 표정의 균열을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내게 티켓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오빠?”

“어, 그러니까… 밴드 공연 티켓인데….”

나는 티켓을 들여다보았다. 밴드 이름 치고는 세련되지도 않고 밴드가 아니라 무슨 초등학생용 애니메이션 제목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뭐야, 이게….”

그때쯤 나는 거의 지쳐 있어서 진짜 그동안 투자한 원금 어떤 식으로든 회수하고 때려칠까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이 놈은 그런 분위기도 파악 못하고 이런 공연에나 데려가려 하다니,

“오빠.”

“왜?”

“헤… 아니, 그게 아니라. 뭐 하는 밴드인데? 유명해?”

“아니, 유명한 건 아니고… 근데 노래는 좋아.”

또 재미없을 게 분명하다.

“싫어?”

“아, 아니… 괜찮을 거 같아….”

그래도 일단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코스였기에 이번에는 또 시간 날리는 셈 치고 가 보기로 했다.

공연장에는 50명 정도 되는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역시, 소수의 매니아들이나 좋아하는 인기 없는 밴드인 것 같았다. 어느덧 공연장의 불이 켜지고, 얼뜨기같은 사람 몇이 들어왔다. 벌써부터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오늘 오빠들이 1위 하는 날인데 이 지루한 공연이나 보고 있어야 한다니.

별 재밌지도 않은 멘트를 쳐대는데 하품만 나왔다. 유머도 센스도 없다. 나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 내 옆에 앉아있는 그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엉겁결에 나도 박수를 따라 쳤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밴드는 강렬한 가창력을 가진 건 아니었다. 아니, 노래는 못 부르는 편에 속했다. 그렇다고 춤을 잘 추는 것 또한 아니었다. 잘생기지도 않았다. 노래가 신나는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들었다면 30초 만에 꺼버렸을 노래. 사실 시작은 좀 지루했다. 하품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한 곡 한곡이 흐르면서 그 노래들의 분위기에 빠져들어가며, 나는 내가 그 노래들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사람은 살면서 한 번 쯤은 자신의 삶을 바꾸는 순간을 만난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내 삶을 바꾸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문득 옆에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문득, 그와 이 밴드, 그리고 밴드의 음악이 매우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밴드의 공연이 끝나고 나는 그에게 물어봤다. 예전부터 이런 데 자주 왔었냐고. 그러자, 그는 겸언쩍은 듯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시디로만 들었어.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때 같이 오고 싶었거든.”

손발이 다 오그라들 정도로 유치한 말이었다.

사실 지난 몇 달간 재미는 없었지만, 대신 마음은 편했다. 매일 밤을 클럽에서 뛰어다니고,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고, 힐이 부러지도록 쇼핑을 다니고, 좋아하는 아이돌을 따라다니거나 하고. 가끔은 이렇게 살고 싶었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젊을 때 이렇게 놀아야 한다고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고. 그 삶의 반복. 그럴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잊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세상에는 좋지만 소외받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건 나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한 걸음을 떼었을 뿐이었다.

이후로 나는 나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바뀌어갔다. 같은 클럽이지만 댄스 음악이 아닌 밴드 음악이 나오는 클럽을 찾았다. 몰랐는데 그는 보기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내게 음악을 추천해주고, 또 음반을 선물했다. 재미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다른 영역에 살고 있던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영역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와의 데이트도 더 이상 지겹지 않았다. 이전에는 싫었던 그의 수수함,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 것, 로맨스가 아닌 영화를 보는 것, 그런 것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느낀 것일까, 뻣뻣했던 그의 태도도 조금씩 부드러워져가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서 어색함이 물러나고, 대신 편안함이 그 자리를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다.

“아, 오빠. 저번에 준 음반 잘 들었어.”

“어땠어? 난 사실 별로 좋아하는 음반은 아닌데.”

“뭐야? 그럼 재고 처리 였던 거야?”

“아, 아니… 그냥 취향 차이 같은 거 있잖아. 이쪽에서는 나름 유명한 아티스트기도 하고.”

“음… 확실히 좋긴 좋더라. 누구나 좋아할 만한 노래 같고. S는 아니지만 A는 되는 느낌?”

물론 그와 가장 많이 나누었던 이야기는 밴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와 자주 공연장에도 다니고, 차분히 앉아 노래를 듣기도 하고 노래방에서 뛰어 놀기도 하면서 나는 점점 더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와의 첫 키스는 정말로 뜬금없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평소와 마찬가지로 어떤 밴드의 공연을 보고 있을 때였다. 조금 철학적인 느낌의 제목의 노래였는데, 그 밴드의 보컬이 갑자기 중간에서 노래를 끊더니

“혹시 여기 연인들 있나요? 그렇다면….”

그러면서 다음 가사를 이었는데, 그 노래 가사를 조금 바꾸는 것이었다, 너네들이 연인이란 증거를 보여줘. 라는 가사. 그러자 주변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서로 키스를 했다. 그중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인도 있었고, 고등학생 커플도 있었고, 나이 든 중년 커플도 있었고, 남남, 혹은 여여 커플도 있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모르겠다는 듯, 매우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으휴, 답답한 놈.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다 시간은 지나갔고, 다시 노래는 재개되었다. 그렇게, 좀 어색한 기분으로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빠.”

“왜?”

“나랑… 키스하기 싫어?”

그러자 그의 얼굴이 단번에 빨개졌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가만히 있었던 건데?”

“그게… 너도 좋아할지, 잘 모르겠어서….”

너무 달랐다. 그 동안 만난 남자들 중 이런 걸 내게 물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문득, 첫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설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내 머리를 끌어안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살짝 실눈을 떴다. 도저히 어느 거리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불이라도 난 듯 새빨개져 있었다. 정말, 달랐다.

아무래도 먼저 받긴 무리인 것 같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를 잡아당겼다. 서로의 입술을 깊게 눌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어색했다. 그는 연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서로가 별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그가 좋아 죽겠다는 듯 웃는 얼굴이. 다음 날 그는 이마에 반창고를 하고 있었다. 전구를 갈다가 다친 거라지만, 사실은 날뛰다가 그렇게 된 게 분명했다.

“너, 요즘 아주 좋아 죽더라?”

비밀 모임의 회장은 아니고 이사 격인 여자가 문득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하긴, 약속했던 기한이 거의 남지 않았는데 헤어질 기미도 없으니, 당황할 만도 하겠다.

“왜, 불안해?”

“아아니? 우리가 이길 게 분명한데 뭐가 불안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웃는 얼굴에는 균열이 가 있었다. 쌤통이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아니, 별 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서. 너, 혹시 그 남자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지?”

“그건 왜 궁금한 건데?”

“그냥, 워낙 재미없는 남자와 붙어 다니다 보니 덩달아 눈도 낮아진게 아닌가 싶어서.”

그 목소리에는 허세가 잔뜩 담겨 있었다. 나는 문득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의문이 들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는 걸까? 이 남자와 나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고. 그러자 그녀는 흡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이야. 아, 안녕하세요. 친구세요?”

“아, 네. 잠시 할 말이 있었거든요. 용건 다 봤으니 돌아갈게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돌아갔고, 나는 잠시 멍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가 걱정스러운 듯 물어봤고,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전과는 다른, 조금 어색한 감정으로 시간이 흘렀다. 이전의 조금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나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정말 내가 그를 좋아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그와 내가 어울리는지에 대한 의문은 더 컸다. 그도 그걸 알았는지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어색해진 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을 흘러갔고. 어느새 일년이 거의 다 흘러 하루 전날이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우연히도 그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고급 레스토랑에 가는 것 대신, 그의 집에서 생일 파티를 열기로 했다. 그의 집은 쓸쓸할 정도로 아무 것도 없었다. 조금 좋은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오고, 촛불을 켜고, 처음 함께 들었던 그 밴드의 시디를 듣는다. 촛불을 끄고, 생일 축하를 하고, 케이크를 먹고, 그의 집의 바닥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러고보니 생각나네, 일 년 전 이 날. 그 날 난 혼자였어. 여기에는 이렇다 할 친구도 없었고, 누굴 사귀지도 못했거든. 축하 문자 보내주는 사람 한 명 없었고. 진짜, 진짜 외로웠어. 죽어 버릴까 싶을 정도로.”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쓸쓸한 듯 미소지었다. 그 표정이 문득, 가슴 아팠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네가 좋아한다고 말해준거야. 진짜, 무슨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어. 넌 정말 천사같이 예뻤으니까.”

“지금은 안 예뻐?”

“지금은 더 예쁘지. 처음에는 의심했어. 너 같이 예쁜 여자가 나한테 고백해 올 리 없다고. 무슨 장난 같은 게 아닌가 싶었어.”

순간 뜨끔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혹시 신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거야. 만약 그렇다면 너무… 놓치기 아깝잖아. 장난이면 뭐 어때. 잠시 쪽팔리면 되는거지. 그런 생각으로 난 전화했고, 이렇게 일 년이 지났어.”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문득 몸을 돌려 나와 마주보았다.

“고마워, 나 같은 남자와 일 년이나 만나 줘서.”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웃었다.

다음 날, 잠들어 있는 그를 내버려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밀 모임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의 표정은 상당히 기분 나빴다. 하긴, 상황이 상황이니까.

“기억하지? 일 년 동안 저 남자랑 사귀면 1억을 주기로 한 게임 한 거. 그리고 일 년이 지났어.”

그러자 그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왠지 기분이 좋았지만 오늘 여기에 온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했다.

“그 게임, 그냥 포기하기로 했어.”

그러자 그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서로 서로 벌떼마냥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내버려두고 바깥으로 나왔다. 기분이 홀가분했다.

문득 전에 내게 이상한 소리를 했던 그 여자가 내 어께를 잡았다,

“왜?”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좋아해야 할 상황 아닌가? 그녀는, 의문스럽다는 듯 말했다.

“무슨 생각이야? 우리는 진짜로 네게 그 돈을 줄 생각이 있었어. 그런데, 왜 그런 거야? 1억이 작은 돈도 아닌데?”

역시, 그게 궁금한 거였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를 만나기 전에 나도, 이랬을까.

“그냥, 그 남자,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남자가 아니었거든.”

그러자 그녀는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 얼굴이 재밌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그들의 기준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남자였다. 1억이 아직까지도 조금 아까웠다. 하지만 그 돈을 받았다가는 내가 그의 앞에서 떳떳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약간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남자를 좋아하고, 이 남자는 나한테 어울린다는 것을. 이 남자랑 함께하고 싶다는 것을. 그 정도면 포기하기 충분한 이유였다.

“미안해….”

문득,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 때였다. 문자가 왔다. 그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동안 붙잡아서 미안, 이제 그만 놓아줄게. 행복했어.’

세상이 무너졌다.

“미안… 원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사실, 말했거든. 그 남자한테 이게 다 게임이고, 너는 돈을 받기 위해 사귀고 있는 거라는 걸… 그래도 그 남자는 괜찮다고, 자기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별 수 없겠다 싶었는데. 네가, 이럴 줄은 몰랐지… 나는 정말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단 말야….”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맘만 같아서는 먼지 나도록 두들겨패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급한 게 아니었다. 그의 집으로 달려가며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리샘에 연락하라는 말이 나오도록 받지 않았다. 젠장, 별 수 없었다. 나는 문자를 보냈다.

‘지금 당장 전화 안 걸면 죽어 버릴거야!’

문자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오빠! 지금 어디야!”

그러자 그는 놀란 듯 잠시 어버버거렸다. 그러다 침착하게 말했다.

“난 괜찮아, 너만 행복….”

“누가 오빠만 괜찮으래? 지금 집이지! 집이면 거기 가만히 있고 아니면 당장 집으로 와! 아니면 나 죽어 버릴 거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달려갔다. 하이힐이 불편해서 벗어던졌다. 발이 아팠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벨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문 열어!”

이래서야 무슨 인민군 같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문득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었다.

나는 문 옆에 앉았다. 인터폰에서 보이지 않을 사각지대에. 그리고 때만 기다렸다. 생각보다 그는 참을성이 없었다. 5분도 되지 않아 문이 열렸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빼꼼하게 내밀었다. 그러다, 나를 보더니, 당황하며 문을 닫으려 했다.

“잠깐!”

나는 문틈에 핸드백을 끼워넣었다. 그 안에는 그에게 줄 시디들이 들어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그가 말했다.

“어차피 게임이었잖아. 장난이었고. 사실 너도 나 별로 좋아한 거 아니….”

“무슨 남자가 그래! 그렇다고 해도 일단 잡아보려는 노력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오빠도 나 좋아한다며! 그리고 그 전에 이 문 열어! 시디 부서져!”

그러자 문이 열렸다. 우두커니 서 있던 그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진짜, 바보 같다.

“왜… 너도 헤어지길 바랬을 거 아냐… 무슨 더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내 말은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화도 좀 내고!”

“그, 그건… 상처주기 싫어서… 그런데 너, 발….”

“그게 무슨 바보같은 소리냐고! 키스하고 싶어하는 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오빠가 안다는 건데! 좋아한다며, 그러면 잡으려고 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문득 눈물이 나왔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허둥지둥했다.

“일단 그 발부터 어떻게 치료하자, 피 나….”

“됐어, 일단 대답부터 들어야겠어. 오빠, 나 좋아해, 안 좋아해.”

“그, 그건….”

그는 당혹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흐릿하게 말했다.

“나 같은 남자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

“시끄러워! 난 좋아하는지 아닌지만 물었어.”

“…좋아해.”

그는 말했다. 이전과는 다른, 좀 더 또렷한 목소리로. 그리고, 확인이라도 하듯, 다시 말했다.

“좋아해!”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오빠가 잘 모르는 거 같아서, 다시 말하는 거야. 난, 말야. 오빠를.”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좋아해.”

새파란 진심이었다.








연애를 해 본적이 있어야 로맨스를 쓰건 말건 하지…

초반부는 단편호흡인데 후반부는 장편호흡이라 좀 갈아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