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

차 안은 너무 편해서 불편했다. 달리는 느낌도 나지 않을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고, 빗소리 말고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어색했다. 내 육체는 사라지고 영혼만이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 앞에서 차가 멈추고, 나는 무심코 문을 열었다. 빗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자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복을 입은 사람이 재빨리 우산을 내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이것 또한,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문이 열리고 집의 모습이 나타나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문득 내 모습이 바보같이 느껴져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보는 것은 괜찮다. 들어가서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을 뿐이었다.

"이 쪽으로 오세요, 아가씨."

처음으로 인사를 해 준 사람은 메이드였다. 아가씨라고 불려본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옷장, 책상 등… 별로 다를 건 없다고 생각되었다. 전의 집에서 쓰던 물건들도 다 옮겨왔다. 다만, 너무 넓을 뿐이었다.

메이드가 나가자, 이 공간에서 나는 혼자가 되었다. 침묵 가운데 빗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잘 꾸며진 정원과 담장. 바깥 세계와는 단절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 곳으로 넘어온 이상, 나갈 수는 없게 된 걸까.

나는 방 밖으로 나갔다. 메이드를 따라 오느라 보지 못했지만, 이곳에는 방이 많았다. 게다가 꽤 넓었기 때문에 잘못하다간 길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돌아다니며 집 안을 살펴보았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문득,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똑같은 문들이 너무 많았다. 어디가 내 방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길을 물어볼 만한 메이드도 없었다. 소리쳐서 불러 볼까? 첫날부터 그런 꼴사나운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서 되돌아 나왔다. 방들이 지나가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좋아, 들어올 때 본 기억이 난다. 나는 천천히,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내 방을 찾아 나섰다.

그때,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홀짝이고 있는 소녀가 눈에 띄었다. 이마에서 단정하게 일자로 자른 길고 곧은 생머리, 크고 둥글면서 살짝 날카로운 눈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고고함이 느껴지는 차분한 표정. 예쁜 애였다. 잠깐,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원래 보던 것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생각났다는 듯 날 쳐다보았다. 마치 시선에 속박되기라도 한 듯,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천천히 내 앞까지 걸어온 다음,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내 새언니야?"

순간 깨달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소녀는 이 집안의 상속자, 주현이라는 것을.

"으, 응…."

나는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왠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귀엽네, 생각보다."

주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무리 한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해도, 일단은 내가 언니인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내 얼굴을 보며 그녀는 비웃듯 말했다.

"난 귀여운 거 좋아해. 그렇다고 널 좋아하게 될거란 뜻은 아니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라 짜증도, 화도 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때 갑자기 주현이 손가락을 뻗어 내 뺨을 살짝 쓸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피부도 생각보단 매끄럽네. 생각한 거랑 좀 많이 다르네, 재미있어."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또다시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목을 잡아채며 말했다.

"뭐 하는 짓이야!"

손에 잡히는 여린 느낌에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자 주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거칠게 손을 잡아빼더니, 노려보듯 눈을 마주쳤다.

"저, 미안. 난 좀 당황해서…."
"너,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싸늘한 목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방금 전의 인상은 사라지고, 얼음장 같은 분위기만이 남았다.

"여긴 내 집이고, 이 집안에 있는 건 모두 내 꺼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돌아섰다. 긴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런 것들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해."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삶은 단 한번도 내게 원하는 것을 쥐어준 적이 없었다.

작은 장난감도 가져본 적 없었고, 예쁜 옷이나 맛있는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이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넣는 것을 보며, 어릴 때는 이상한 박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조금 나이가 들고서는 그런 것도 사라져 버렸다. 마치 다른 세계의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아버지가 찾아온 건, 정확히 그런 순간의 한복판에서의 일이었다. 엄마가 누워있는 병실에서, 아버지는 내게 모든 것을 쥐어줄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것까지 잃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지갑 속에 들어 있는 단 한장의 카드. 나는, 이것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낯선 촉감의 교복을 입고, 알아서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하고, 우산마저 들 필요가 없는 등교길을 가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회장님께선 일정이 조금 늦으실거라고 합니다."

운전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원래 일정도 세 달이었는데, 버틸 수 있을까. 한숨이 나왔다.

학교는 의외로 편했다. 학기 중간에 뜬금없이 전학생으로 들어오게 됐지만, 다들 자기 일에 바쁜 탓인지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예전에도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게 나에겐, 더 좋았다.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점심 시간이 되었다. 뷔페식으로 된 식당에서 적당히 음식을 골라 빈 테이블에 앉았다. 음식을 먹으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금수저들이 다니는 학교답게 애들의 얼굴, 표정, 걸음걸이, 자세 등 모든 것들이 고등학생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토끼를 따라간 적도 없었는데, 나는 왜 이런 곳이 빠져버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가 앉은 테이블의 나머지 자리를 채웠다.

여자애 세 명이었다. 반에서 어렴풋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내 앞에 앉은 여자애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안녕?"
"아, 안녕…."

무슨 생각일까. 보통 이런 상황에는 으레 귀찮은 일이 따라붙게 마련인데….

"이름이 슬기 맞지? 반가워. 난 예리라고 해."

이름과 비슷한 인상의 여자애였다. 고등학생이라기엔 살짝 어려 보이는 얼굴. 금발로 물들인 머리카락. 빨간 머리 앤처럼 밝아 보이는 애였다. 성가신 일은 아닐려나. 조금 안심이 되었다.

"으, 응…."
"갑자기 전학 와서 학교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텐데,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줘."
"괜찮아, 난…."
"부담가질 필요 없어. 반장이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

반장, 이었구나. 어차피 뭔갈 묻게 될것 같지도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은 여자애들과도 적당히 인사를 하고, 식사를 재개했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인지, 조금은 불편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혼자 먹는 게 나은데.

"저, 근데.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비켜."

그때, 테이블 옆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접시를 든 주현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주, 주현아. 너도 같이 먹을래? 여기 의자를 옮기면…."
"비키라고, 너희 셋 다."

예리의 사교성도 주현에겐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난감한 듯 웃고는, 다른 애들 둘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주현이 접시를 내려놓고 앉았다.

무슨 할 이야기라도 있었나 싶었지만, 그녀는 딱히 말을 걸진 않았다. 시선이 이 쪽으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신경 쓰인다. 더 불편한 상황이 형성되고야 말았다. 뭔가를 더 먹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주현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앉아."

무슨 생각인지. 나는 다시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고 앉았다. 그러자 주현은 비웃듯 말했다.

"말 잘 듣네, 서민이라 그런가?"
"뭐?"

잠깐 의미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엄청난 짜증과 굴욕감이 밀려왔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잘 하고 있는 거야. 칭찬해 줄게."

말문이 막혀왔다. 그녀의 가늘게 뜬 눈빛이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면 목숨은 부지하고 살 수 있을 거야. 명심해."

어쩌다가, 이런 곳에 떨어져버린 걸까.

멍한 상태로 첫날 수업이 끝났다. 수업 내용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다만, 다른 생각들이 머리에 꽉 차 있어서 그랬던 것 뿐이었다.

"슬기야, 잠깐만!"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예리가 날 불러세웠다.

"왜?"
"저, 식당에선 미안했어. 아무래도 주현이 말은 거부하기가 힘들어서…."
"괜찮아. 그런데 거부하기가 힘들다고?"
"아, 넌 전학온지 얼마 안 돼서 모르겠구나."

그녀는 주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국내 최대의 재벌인 DS그룹의 현존하는 유일한 상속자이며, 이 학교에 몸담은 사람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예산 집행안에까지 참여한다는 이야기도 있어. 단순히 유언비어라기에 구체적인걸 보면, 아마 사실일 거야."
"응, 그랬구나."

사실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다만, 교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학생이 아니라는 점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슬기야. 너네 아버지는 뭐 하는 분이셔?"
"어? 그, 그건 왜…."
"보통 여기는 학생들이 변하는 일이 거의 없거든.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처음 들어온 학생들이 변동 없이 그대로 같이 졸업하는데, 너처럼 학기 중간에 들어오는 경우는 잘 없어."
"아…."
"사실, 교내에 많은 사람들이 널 신경쓰고 있어.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그렇다면 무관심이라고 느꼈던건 사실 나에 대한 경계였던 걸까. 그렇게 신경쓸 만한 인간이 아닌데,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별로 특별한 건 없어. 난…."
"야, 너 여기서 뭐 해!"

교실 문 앞에서 주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교실이 조용해졌다. 주현은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손목을 잡고는 말했다.

"지금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야? 너 때문에 다들 기다리잖아."
"그게 너랑 무슨 상관…."
"내가 말한 거, 벌써 잊었어?"

소름이 끼쳐왔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이런 것까지도 내 멋대로 할 수 없단 말인가. 한숨이 나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멍하니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학교와 집 사이에는 거리가 꽤 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40분 정도는 걸릴 것이었다. 여전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 치워."

옆에 앉아 있던 주현이 말했다.

"응?"
"손 치우라고."

어딜 어떻게 치우라는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양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몸을 기울이더니, 내 허벅지 위에 머리를 눕혔다.

"어…."
"말 시키지 마. 집에 갈 때까지 잘 거니까 불편하게도 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들었다. 피곤했던 걸까,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가만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쁜 애였다. 치밀어오르는 짜증마저 사라지게 할 정도로. 그곳에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은 없었다.

"내려다보지 마, 기분 나쁘니까."

황급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짜증났다.

어두운 방에 홀로 누워 있으려니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넓었다. 어둠 저 너머로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귀신 따위는 믿지 않지만, 너무 생소한 공간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저 너머에, 무언가가 숨어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베개를 끌어안고 한참을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그것마저도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대가 넓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짜증이 날 정도였기에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밖을 내다보자 달빛이 비치는 정원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꽤 복잡해 보였다. 길을 잃을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뭐 해?'

예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잠깐 고민하다가, 나는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 누워 있었어.'
'응. 그러면 머릿속으로 양을 세어 봐. 그러면 잠이 올지도 몰라.'
'그것도 해 봤는데, 잠은 안 오더라고.'

그보다 양을 세라니, 대체 어느 시대 이야기인 거야.

'그러면 잠 올때까지 잡담이나 하자. 아, 교실에서 했던 이야기 있잖아.'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복도의 빛 중간, 주현의 실루엣이 보였다.

"안 자고 뭐 해?"

그녀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는 너는?"
"일이 있어서. 질문한 사람은 나였던거 같은데?"
"그냥, 잠이 안 와서 누워 있었어."

잠옷을 입은 모습이 예뻤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다.

"메이드한테 말하면 멜라토닌을 가져다 줄 거야. 필요하면 그거 먹고 자."
"어? 아, 고마워."

무슨 일이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더 당황스러웠다.

"학교에서 졸면 내가 곤란하니까. 아, 그리고 애들한테 아빠에 대해 말하지 마."

쾅, 하고 문이 닫혔다. 그럴 줄 알았지. 이유없이 찾아올 리가 없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예리가 새로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혹시 너네 아버지가 뭐 하시는 분인지 가르쳐줄 수 있어?'
'아무래도 좀 곤란해서… 미안.'
'응, 어쩔 수 없지. 그럼 전학 오기 전에는 어디 다녔어?'
'그건….'

예리와 밤이 깊도록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날 등굣길에서도 주현은 내 허벅지를 베고 학교에 갔다. 사실은 나야말로 자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엎드리고 싶은 충동을 힘들게 참아내며, 겨우 학교에 도착해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한참을 엎드려 자고 나서 깨달은 건, 이 학교에선 선생들이 자는 학생을 깨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곳에 다니는 학생들은 다들 높은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꼭 그것만은 아냐. 다들 집안에서도 따로 배우거나 하는 게 있으니 쉴 틈이 없거든."

그런 이야기를 하자, 예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나 같은 경우에는 딱히 그런 게 없어서인지 공부에만 집중하는 편이야. 그리고 최신 트렌드 파악하는 정도? 어차피 이건 취미같은 느낌이기도 하니까."

예리의 아버지는 대형 연예기획사의 사장이라고 했다. 그러면 아이돌들도 많이 만나겠네, 라고 묻자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다들 각자 하는 일이 있구나. 조금, 초조해졌다.

"아이돌 가수들 만나 보면,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생각도 가끔은 해. 그래도 나랑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런가? 내가 보기엔 충분히 예쁜 것 같은데…."

그러자 예리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아, 아냐. 직접 만나보면 티비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잘생기고 예쁜걸. 그 사람들에 비하면 난 좀 부족해."
"그런가? 안 만나봐서 잘 모르겠네."
"나중에 너도 소개시켜 줄게. 아, 맞다. 주현이 정도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 예쁘긴 하지."
"뭐, 걘 그런 건 필요없는 위치니 상관 없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밝게 웃는 예리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아이돌에는 그녀가 훨씬 어울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공부?"

내 질문을 듣자마자, 주현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렇게나 이상한 질문이었나. 뭐, 식사 시간에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응. 여기 애들은 다 열심히 하진 않는 것 같더라. 그래서 넌 어떤가 싶어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
"응? 아, 그, 그래…."

조금이라도 친해져보고 싶었던 건데.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재개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중학교 때 다 끝냈어. 그 이상은 필요없으니까."
"응?"
"더이상 말 시키지 마. 피곤하니까."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는 주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얼굴이 있을 뿐이었다.

"내려다보지 말라고 했잖아."
"아, 미안."

나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갑자기 말을 할 기분이 들었던 건가. 종잡을 수 없는 애였다.

일단은 호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별 이유는 없었다. 단지, 며칠간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았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휴일이었다. 나는 잠에서 깬 다음에도 한참을 베개를 끌어안은 채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휴일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완벽하게 꾸미고 차려입은 주현이 들어왔다. 나는 멍한 상태로 그녀가 침대 옆까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녀의 얼굴을 반짝이게 했다.

"예쁘다…."

생각할 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잠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며 말했다.

"이, 일어나. 같이 가 볼 데가 있으니까."
"어디?"
"회사. 거절하는 건 허락 안 해."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방 밖으로 나갔다. 멍하니 있다가, 나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좀 일어나!"

어느새 돌아온 주현의 외침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화장도 하고, 또 평소에는 입어본 적 없는 옷을 입고 나는 그녀를 따라 회사에 갔다.

그곳은 마치 작은 제국 같았다. 단지 주현의 뒤를 따라갈 뿐인데, 보디가드들이 주위를 지켰고 사람들은 인사를 했다.

다들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하긴, 저렇게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을 보면 누구나 그런 기분이 들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누군가를 그렇게 본 기억이 없는 내겐 이해가 되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을 부르고,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알아듣지도 못할 용어들을 쓰며 복잡한 일들을 처리하는 그녀의 모습은 멋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또다른 감정을 들게 했다. 명확하게 말로는 표현하긴 힘들지만, 어쨌거나 있긴 한 감정을.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이번에도 내 무릎을 베고 눈을 감았다. 문득 의문이 들어, 나는 말했다.

"날 데리고 온 이유가, 이거였어?"

그녀는 살짝 눈을 떴다가, 이내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그제서야, 그녀와 나 사이에 있는 간극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소녀가 있다.

정확히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쁜 옷이나 맛있는 음식, 혹은 장난감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사회적 지위, 명예, 인맥같은 것들까지 거의 모든 것을, 그녀는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는 상태로 태어났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이다. 그 태도마저도, 자신이 그래도 된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호의마저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기에.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두운 방 안에서 누워 있었다. 이젠 어느정도 적응도 되어서 적막함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잠이 올 때까지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질 무렵,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주현이 방으로 들어왔다.

"어, 주현아. 무슨 일이야?"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침대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빈 공간에 털썩 쓰러지더니, 내 베개를 뺏어가 베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했다. 엄마가 쓰러진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온기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안도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그녀도 그런 게 그리웠던 걸까. 아무리 나와는 다른 인간이라고 해도, 같은 인간인 이상 그런 감정 정도의 공통점은 갖고 있지 않을까. 그래야만 한다.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강하지 못했다.

이후 며칠간은 별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갔다. 주현과 등하교를 하고, 학교에서는 예리와 만나고. 친구도 조금 생겼다. 여전히 점심 시간에는 주현과 둘이서만 식사를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허벅지로 베개를 해주고, 저녁 식사도 함께 한다. 밤이 되면, 그녀는 내 옆에서 잠든다.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또다른 루틴이 완성되었다. 이런 삶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그것도 나쁜 삶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금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고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예리가 찾아왔다.

"슬기야. 혹시 시간 있어?"
"왜?"
"내일 휴일이잖아. 그래서 오늘 같이 놀수 있을까 싶어서."
"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주현이 생각나긴 했다. 하지만, 이런 일까지 신경써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데 어디 갈려고?"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그녀의 차에 타고 있었다.

꽤나 정신없이 놀았던 것 같다.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서로 옷도 맞춰주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무작정 거리를 걷고, 카페에서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커피를 마시며 수다도 떨었다.

예리와 함께 있으면, 그 잠깐동안은 우울한 것들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 목소리, 사소한 동작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어두운 것들을 걷어내 주는 것만 같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또다시 걱정거리가 불쑥 고개를 내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주현이 있는 곳에. 그녀는 날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신경을 쓸 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잦아지더니, 이내 세상이 빗소리로 가득찰 정도가 되었다. 어느새 집 앞 골목이 나타났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우산 빌려줄까?"
"괜찮아. 오늘 즐거웠어. 안녕!"

나는 가방으로 머리를 가린 채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온몸이 빗물로 흠뻑 젖어 들어갔다. 대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빨리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그리고 현관의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잠겨 있었다.

"저기요!"

문을 두들기며 너머로 보이는 메이드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소리가 안 들리나? 방음이 잘 되는 모양이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딸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다. 벨 소리가 끝나도록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시 눌렀다. 받지 않았다. 또 다시, 아무도.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는 저택의 옆으로 돌아갔다. 비가 머리카락을 흠뻑 젖게 했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기분 나빴다.

창문을 통해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메이드들은 평소대로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온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 초인종이 고장이라도 난 걸까.

창문을 밀어 보았다. 잠겨 있었다. 다음 창문도, 그 다음 창문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집안의 모습은 너무 평화로웠다. 이곳에서는, 귀청을 찢을 듯한 빗소리만이 가득한데.

다리에 힘이 풀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축축한 진흙이 기분 나쁘다는 생각도, 뼛속까지 스며든 빗물이 차갑다는 생각도. 다만, 멍하니 집 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돌아보자, 우산을 쓴 주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잊었어?"

아니다.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마주보았다. 물기 하나 없는 머리카락.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주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나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단지 화가 났을 뿐이었다. 그녀의 물기 없는 머리카락, 들러붙지 않는 옷, 지워지지 않는 화장, 비가 내리지 않는 우산 속. 그 간극이, 분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호텔로 들어갔다. 물이 뚝뚝 흐르는 상태였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쉬고 싶을 뿐이었다. 가장 비싼 방을 골랐다. 들어가자마자 옷을 전부 벗어 코인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자, 미뤄두었던 한기가 확 펼쳐졌다.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나는 한참 동안이나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샤워를 끝마치고, 가운을 둘러메고 밖으로 나왔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차가운 어둠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질 나쁜 농담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집에 들어간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이.

엄마가 눈을 감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주현을 만난 그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난방이 되고 있는데도. 나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래도, 추웠다.

그런데 왜. 손바닥의 아픔이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빨개진 뺨도, 놀란 표정도, 흔들리던 동공도. 나는 단지 나 자신을 지키려 했던 것 뿐인데, 왜.

급작스럽게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꿈도 없이 한참을 잤다. 눈을 뜨니 어느새 창밖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쇼핑에서 샀던 옷과 신발을 챙겨 입고, 젖은 옷과 신발은 가방 속에 쑤셔넣고, 열쇠를 챙겨 로비로 나왔다.

머리가 멍했다. 온 몸이 뜨겁고 기침이 나왔다. 키를 반납하고, 잠깐 데스크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일단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어지러웠다.

"손님, 체크아웃 시간이 지나 추가요금을 내셔야 합니다."

직원이 말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다. 직원은 리더기에 카드를 읽혔다. 몇 번이나 카드를 읽히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사용정지된 카드라서 결제가 불가능합니다."
"네? 어제도 그 카드로 결제했었는데요?"
"오늘 정지된 모양입니다. 아무튼 현금은 없으신지요?"

나는 지갑을 꺼내 현금을 살펴보았다. 턱없이 모자랐다. 눈을 감고 크게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온몸의 힘마저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손님? 추가요금은…."
"여기, 이걸로 결제해줘요."

눈을 떴다. 주현이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직원은 의아한 듯 잠깐 그녀를 쳐다보더니, 카드를 리더기에 읽히고 결제를 끝마쳤다. 카드를 받고, 그녀는 날 똑바로 쳐다보며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잊고 있었나 보네. 날 때려놓고, 그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

끝까지 들을 기력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머리가 무거웠다. 세상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쓰러지듯 안겼다.

이후로는 기억이 흐릿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모습, 거의 끌려가듯이 걸어가던 나, 정신없이 흔들리는 세계, 의사, 약, 그리고 링겔.

그리고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침대 위.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공간이었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했다.

목이 말라 갈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맡의 장식장 위에 놓여 있던 물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걷잡을 수도 없게 되어,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주 같았다. 도저히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아있던 마지막 열쇠마저도 그녀는 간단하다는 듯 빼앗아갔다. 그 대가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앞으로도 나는, 영원히 그녀에게 붙잡힌 채 살아야 하겠지. 마치 인형처럼, 줄에 엮인 채로.

끼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제는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주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을 살짝만 뜨고 몸을 웅크렸다. 침대 옆까지 걸어온 그녀가 말했다.

"자?"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없겠지만. 주현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와 내 옆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잠들었다.

문득, 그녀의 가녀린 목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져버릴것만 같은. 손을 뻗어 살짝 잡아 보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 원망은 안 할 거니까."

눈을 감은 채 주현이 말했다.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아빠 자식은 나 말고는 너밖에 없고, 또 내가 죽으면 좋아할 사람들도 많아.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게,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햇살에 눈을 떴다. 새하얀 침대보가 빛났다. 주현은 여전히 규칙적인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데, 피로했던 걸까.

멍하니 주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과 분홍빛 입술. 건드려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렀다. 이곳이 마왕성이라면, 그녀는 마왕이겠지. 공주가 되기엔 나는 너무나도 모자라지만.

나는 그녀를 증오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잘 이해해 버렸다. 그녀의 감정도, 내 감정도. 나는 그녀를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우리 둘 사이에 패인 간극이 너무나도 깊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상반되는 감정들이 부딪쳐 폭발할 것만 같았다. 괴로웠다. 나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차라리 내가 진짜 인형이었다면. 그녀가 원하는대로, 아무런 감정도 없이 움직이기만 하는 인형이었다면. 차라리 감정이 없는 게 나았다.

나는 주현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는다는 게, 가능할까. 그녀가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졸린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안 깨우고 뭐 했어."
"자고 있어서."
"몸은 괜찮아?"
"조금."

입술을 깨물었다. 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내가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월요일이 되고, 또다시 일상의 루틴이 시작되었다. 주현과 함께 학교에 가고, 반에서는 친구들과 떠들고, 점심시간에는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다시 수업을 듣고, 함께 돌아가고, 밤이 되면 함께 잠들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해프닝 하나로 변하기에는, 그녀는 너무나도 거대했으니.

적응이 된 건지, 이상하도록 마음이 편했다. 그녀의 말투, 그녀가 짓는 표정, 행동, 그 모든 것들이 당연히 그랬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고쳐먹은 덕분일까, 모든 것이 편했다. 그렇게, 아무런 일도 없이 며칠이 흘렀다.

"슬기야. 너 주현이랑은 무슨 관계인 거야?"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같이 걷던 예리가 말했다.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전에 데려다 준 데도 주현이 집 근처였고, 하교도 같이 하는 거 같고, 혹시 친척이기라도 한거야?"
"으, 응…."
"정말? 사촌이야?"
"아니… 정말 먼 친척이야. 뭐라고 부르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정말 먼 친척이란건 사실이었다. 그녀와 나 만큼 거리감을 가져야 하는 사이는 드물 것이다.

"그럼 혹시 집도 같은 데 사는 거야?"
"응.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그러면 주현이가 자는 모습도 볼 수 있겠네? 아침에 머리가 헝클어진 모습이라던가."
"그, 그렇긴 해."
"신기하다. 난 걔 처음 알았을 때부터 똑같은 모습밖에 못 봤거든. 너무 완벽해서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뭐 그런 거 말야."
"사실 집에서도 비슷해."
"정말?"

예리는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긴, 그 정도 기업의 후계자가 되려면 그정도 관리는 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네. 아, 저기 주현이 기다리고 있네, 먼저 가 봐."
"알았어. 교실에서 봐."
"응."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주현의 앞에 가서 앉았다. 조용히 음식을 입에 넣는 그녀를 보며 문득 생각났다. 그녀는 특별한 친구도 없는 걸까. 학년이 다르긴 햇지만 가끔 봤는데, 그때마다 매번 혼자였던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 했어?"
"응?"
"아까, 예리랑."
"그냥. 별 이야기 없었어."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주현의 얼굴에 어떤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포크를 떨어뜨릴 뻔 할 정도로 놀랐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만한 사람이었나?

주현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시를 정리하고, 그녀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 표정의 의미가 무엇이었을지 너무 신경이 쓰였다. 나는 분명 그녀가 내게 원한 모습대로 행동했을 텐데, 지난 며칠간은, 특히.

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차의 뒷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조금 늦게 마칠 모양인가 보다. 나는 문을 닫고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그러자, 자동차가 출발했다.

"어라, 주현이는요?"
"주인님께서는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아가씨."

창밖에서는 풍경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식당에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것은, 확실히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나랑도 상관있는 일일까.

문득, 나는 그 얼굴이 창문에 비친 내 얼굴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며칠간, 나는 주현의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나보다 먼저 등교하고, 또 먼저 하교했다. 집에서도 마치 다른 공간에 사는 양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멀리서 잠깐 본 것을 빼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단 학교는 나오는 걸 보면 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거의 의도적으로 날 피해다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최근 1학년 수업시간표가 바뀌었다는 것도 그렇고, 일부러 동선 자체를 나와는 마주치지 않는 방향으로 바꾼 것 같았다. 뭐, 자의식 과잉인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스케쥴에 맞추지 않아도 되었기에 잠도 더 잘수 있었고, 남는 시간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 맞다. 슬기야. 너 혹시 우리 회사 아이돌중에 좋아하는 그룹 있어?"

함께 복도를 걷던 예리가 말했다.

"그건 왜?"
"이번 학교 축제에서 초대가수로 부를 수도 있을것 같은데, 누가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런 건 투표로 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빠가 내가 좋아하는 그룹 하나쯤은 더 불러줄 수 있다고 했거든. 그런데 난 정하기가 좀 힘들어서 그래."

과연, 사장 딸의 힘이란 건가. 예리는 생글생글,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일단 행사가 많아지면 그룹한테도 좋은 거니까."
"그러면 혹시 레드…."

그때,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던 주현과 눈이 마주쳤다.

"응, 누구?"

나는,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예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아무래도 소녀제국이 제일 괜찮지 않나 싶어."
"남자 아이돌 말고?"
"멋있잖아."
"그건 그래."

사실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갑갑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가슴팍을 무언가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목도 졸리는 것 같았다. 머리가 멍했다. 상반신을 일으키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가위인가. 잠깐 나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둠에 눈이 적응되고, 그제서야 나는 주현이 내 위에 올라탄 채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그녀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너무 황당했던 나머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침대 위를 기어오더니 내 목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의 양손을 잡아챘다.

"놔."
"너 미쳤어? 갑자기 왜 이래?"
"놓으라고!"

그녀는 거칠게 손을 잡아빼고는, 다시 내 목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왼손으로 팔을 잡아 등 뒤로 꺾고 다른 팔로 등을 눌러서 그녀를 제압했다.

"으윽…."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랫입술이 하얗게 될 정도로 깨물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손을 놓았다. 역시, 힘 쓰는 일은 잘 못하는가. 그녀는 멀찍이 떨어져 앉아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또 덤빌 거야?"
"…아니."
"그럼 갑자기 왜 이러는지나 말해봐. 뭐 때문에 한밤중에 사람을 죽이려 들어?"
"언니야말로 왜 그러는데!"

그녀의 외침을 들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전에 없던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이나, 말투 때문은 아니었다.

"너무 이상하잖아. 다른 애들한테는 그렇게 잘하면서, 왜 나한테만 무성의하게 대해? 요즘 보면…."

다른 이야기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언니'라는 두 글자만이 명확했다. 순간, 둑처럼 막아두었던 감정들이 터져나왔다.

나는 주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고, 동시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너뜨리고 싶었다. 나는 양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므, 머야."

발음이 새어나오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손가락에 힘을 더 주었다. 그녀의 황당하다는 표정이 어느새 일그러지더니,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 팔을 쳐내고, 그녀는 외쳤다.

"진짜 아프단 말야!"

그게 무슨 상관인지. 나는 또다시 그녀의 양 볼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진심으로 화난 목소리로 내게 달려들며 외쳤다.

"너 진짜…!"

이후는 난장판이었다. 그녀가 내 볼을 꼬집으러 달려들고, 나는 요령 좋게 밀쳐내며 꼬집었다.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즐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잠깐 방심한 틈에, 나는 주현에게 깔아뭉개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밀쳐내지도 못하도록 무릎으로 팔도 눌린 상태였다.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채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니, 또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왜 웃어?"

물음표와 느낌표가 절반쯤 섞인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웃기지 않은 점을 찾기가 더 힘든 상황인데.

"귀엽네, 생각보다."

내 말에, 주현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마저도,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무너져내리듯 내 품에 안겼다.

가슴팍에서 축축한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자유로워진 팔로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이상을 하기에는, 아직은 너무 어색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그 사람이 돌아왔다. 여전히 내게선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지만, 주현이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그 사람이 나오고,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도 나는 그녀의 등 뒤에서만 숨어 있었다. 그 사람도, 내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고, 그 사람은 짐을 들고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언제쯤 적응되게 될까. 그때 갑자기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행이구나."

무슨 의미일까. 머리가 멍했다. 그러다 문득, 손에 느껴지는 주현의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중간중간 보강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나 내가 이걸로 돈벌일은 없기에 하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