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 일상

소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노을이 지고,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즐거운 듯 떠들며 교문 밖으로 걸어 나갔고, 건물들의 창문에 불빛이 하나씩 들어왔다. 하지만 소녀가 보고 있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소녀는 창문 너머 맻힌 자기 얼굴의 상을 보고 있었다.

길게 자란 생머리, 모공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 쌍꺼풀이 도드라진 큼지막한 눈, 높은 코와 분홍빛의 입술, 그리고 갸름한 턱. 무감정하게 닫혀 있던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소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쉬는 시간, 눈을 뜬 채 엎드려 있던 소녀의 귀에 들린, 성괴, 라는 두 글자. 그게 자신을 노리고 한 말이란 건 명백했다. 소녀의 반에 그런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되는 사람은 소녀 자신밖에 없었으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녀의 입가에 걸린 감정은 비웃음이었다. 소녀는 단지 계속해서 떠들게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에. 아마 그들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완벽한 얼굴, 완벽한 피부, 그리고 완벽한 몸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기분을.

아니,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겐 차가운 공기가 어울리지만, 너무 여유 부리는 것도 곤란하다. 소녀는 노을빛으로 물든 복도로 나섰다. 자그마한 속삭임들이 귀를 간지럽혔다.

거리는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점퍼나 코트 속에 몸을 움츠린 채 걸었고, 자동차들은 다급하게 노란 불이 들어온 신호등을 지나쳤다. 하교 시간이 꽤 지나서인지 정류장에는 이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남은 아이들도 바쁘게 스마트폰을 눌러 대고 있을 뿐이었다.

버스갸 도착하고, 사람들이 올라탔다. 소녀는 도로 쪽 좌석에 앉아 무심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새하얀 입김을 뿜으며 걸어가는 무채색의 인간들이 마치 보호색처럼 도시의 풍경에 녹아들고 있었다.

소녀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소녀의 공허한 시선에서는 모든 것들이 반짝이지 않는 돌멩이나 완전히 타오르지도 못한 채 버려져 길바닥에서 밟혀 부스러지기만 기다리는 성냥개비 같았다.

버스가 멈추고, 소녀는 내려서 집으로 걸어갔다. 소녀의 집은 높은 산 위에 있었다. 버스가 들어가지 않는 외진 곳이라, 정류장에 내리고 나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얼마 뒤 소녀가 도착한 곳은 두꺼운 쇠로 된 대문 앞이었다. 위압적으로 높게 쌓아 올려진 벽돌 담장과, 위협적으로 솟은 쇠창살. 소녀가 열쇠로 대문을 열자, 저택이 나타났다.

마녀의 집. 소녀는 문득 저택의 별명을 떠올렸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당연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나무들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데다, 조명은 죄다 고장나 있어 해가 떠 있어도 밤이나 다름없이 어두웠다. 더 큰 문제는,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저택의 문을 열었다. 저택 안은 어두웠다. 소녀는 불이 켜져 있는 거실로 들어가 가방을 던져 놓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몸보다는 마음 쪽이.

"민채야!"

누군가가 등 뒤에서 소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민채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오늘 피곤하거든요. 소연 씨."

소연이라고 불린 소녀는 팔을 풀고는 민채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오늘 학교생활 어땠어, 재밌었어?"
"궁금하면 직접 다니시면 되잖아요. 아직 나이도 고등학생 정도밖에 안 되시면서."
"무슨 일 있었어? 오늘 유독 쌀쌀한 거 같은데."
"글쎄요. 전 평소대로인 것 같은데."

민채의 목소리에선 이렇다 할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보다 언제까지 존댓말 쓸 거야? 같은 고등학생인데 말 놓으면 안 돼?"
"원하시면 명령하세요. 해드릴 테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면 싫은걸."
"그러면 안 되겠네요. 저한테는 마음 따위 없으니까요."
"무서워…"
"절 이렇게 만든 사람은 당신이거든요."

여전히 민채의 목소리에선 별 감정이 없었다. 그러자 소연이 토라진 듯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흥. 재미없게. 가서 밥이나 만들어 와."
"피곤한데 조금만 있다가 하면 안 되나요?"
"안 돼. 명령이야."
"그러면 별수 없겠네요. 매정하셔라."
"매정한 건 내가 아니라 민채잖아. 아, 그리고 오늘 인형 만들기 할 거니까 준비해."

민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잠깐 말없이 서 있다가, "알았어요." 라고 짧게 말한 후 부엌으로 갔다. 소연은 민채가 떠난 자리를 지켜보다, "칫." 하는 소리를 내고는 소파에 몸을 뻗어 드러누웠다.

공방은 저택의 지하에 있었다. 계단의 조명이 고장 나 있었기 때문에, 민채는 소연을 거의 안다시피 붙잡고 내려가야 했다. 아래에는 희미한 푸른 빛이 감도는 방이 있다. 깃털 빠진 셔틀콕, 깨진 화분들 같은 잡동사니들과 청소 도구들이 널려 있는 텅 빈 공간. 겉보기에는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는 방이다. 어디까지 겉보기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소연은 방의 중심에 서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빛이 밝아지며 공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법적인 푸른 조명이 돌긴 했지만, 공방은 대체적으론 실험실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깔끔한 플라스틱 작업대와 새하얀 선반, 그 위에 정리정돈되어 놓여있는 작업 도구들과 시약, 마법 도구들.

소연이 손짓으로 민채를 불렀고, 민채는 작업대 앞에 섰다. 무감정한 인형의 몸이 작업대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마네킹처럼 특징 없는 얼굴과 매끄러운 몸. 정확한 개성은 없었지만, 기본적인 틀 자체는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민채는 인형이 싫었다. 소연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평생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명령 때문에 인형을 만들고 있는 지금도 인형을 만지며 조작을 할 때마다 끔찍하게 몸서리가 쳐졌다.

나도 여기서부터 시작된 걸까.

"자, 그럼 시작하자. 일단 저번에 기본적인 건 다 마쳤으니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근데 지금부터가 진짜 중요한 과정이야. 인형이 하나의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소연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민채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태어나다니, 그 말은 정말로 이상하게 들렸다. 나이도 먹지 않고 번식도 할 수 없는 데다 주인의 명령에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인형을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민채는 이 인형이 어떤 인형으로 태어났으면 좋겠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소연의 얼굴을 민채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왜 그래, 아직 못 정했어? 전에 분명 생각해두라고 했잖아."
"여기까지만 하면 충분하잖아요. 대체 제가 이런 걸 해야 하는 이유가…"

말하다 말고 민채는 입을 다물었다. 이유? 이미 몇 번이나 설명해 주었다. 자기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꼭 민채가 인형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물론, 그 원대한 계획이 뭔지는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몇 대를 이은 오래된 인형사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소연은 태어나서 이 집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인형을 만들기 위해서만 태어났고, 교육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자립할 수 있게 될 때쯤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다.

교통 사고였다.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나들이를 가다가 당한 사고였다고 했다. 자기는 운이 좋았다는 말 외에는 사고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약해진 것도, 그때 병상에 오래 누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그녀의 원대한 계획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네.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어쩔 수 없네, 그러면. 만들고 싶은 인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소연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민채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괴상한 사람이야 많다고 하지만, 인형에게 인형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소연 혼자일 것이다. 어째서 자신은 이런 주인 아래서 만들어진 걸까. 다른 인형들처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면 적어도 고민할 일은 없었을 텐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민채는 문득 처음 공방에서 깨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던 소연의 긴장한 얼굴.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하자 천천히 번져나가던 미소. "성공이야!" 라고 외치며 좋아하던 모습을 보며, 민채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민채는 처음부터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나이대의 소녀가 가지고 있을 법한 지식 및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전부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갓 태어난 아기처럼 삶을 습득할 필요도, 부모님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었다.

이후로 그녀는 주위에서 소연을 돌보며 살아가게 되었다. 소연은 열 일곱살 여자아이기 이전에 인형사였다. 그 지역에서 가장 유서 깊은 인형사 가문의 후계자인 만큼 다른 마술사들에게서 인형 주문도 많이 들어오는 편이었고, 민채는 그래서 꽤 바쁘게 일해야만 했다.

소연이 인형 만드는 것을 도우며 민채는 조금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들은 왠지 자신과는 다르게 어딘가 불완전한 모습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힘이 약하거나, 지능이 떨어지거나, 혹은 명령을 받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식으로. 민채도 명령을 받긴 했지만, 그것은 강제적이라기 보다는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약속에 가까운 편이었다.

하루는 그 이유를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왜 자신과 다르게 그 인형들은 어딘가 결함이 있느냐고. 그러자 소연은,

"그건 사람들이 인형을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서 그래."

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자 민채는 더욱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손해가 되는 행동을 일부러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완벽하지 않은 인형을 주문하는 이유가 뭔가요?"

작업이 끝나고 쉬는 동안 민채는 소연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연은 살짝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 곤란한 걸까. 그러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던 찰나, 소연이 말했다.

"그건… 사람들이 인형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래. 언제든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인형은 보통 인간보다 강하거든. 그러니까 두려워하는 거야."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자신이 인형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 때가. 굳어 있는 표정의 민채를 보자, 소연은 당황한 듯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런 표정 짓지 마.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 뿐이고, 난 민채를 믿어."
"소연 씨는 제가 두렵지 않나요?"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고 밝게 웃는 소연의 얼굴을 보며,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민채는 이른 아침 잠에서 깨었다. 차가운 햇빛이 방을 푸르게 물들였다. 이불 밖으로 나가자 한기가 피부로 스며들어 왔다. 여름이 가까워오건만 저택의 아침은 여전히 추웠다. 하지만 그녀는 춥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잠옷 차림으로 방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샤워 후 민채는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부엌에 들어가서 소연의 식사를 준비했다. 소연은 언제나 정오가 지나서 잠에서 깼다. 그래서 나중에 간단하게 전자렌지에 데우기 좋을 정도로 상을 차려둔 후, 민채는 코트를 걸치고 저택 바깥으로 나왔다. 전혀 필요없었지만, 이거라도 걸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숲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민채의 숨결에서도 안개가 흩어져 나왔다. 대문 밖으로 나와 길을 걸어 내려가며 그녀는 아침의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미니어처 같은 건물들 사이로 바쁘게 걸어 다니는 자그마한 인간들과 자동차들. 그녀의 눈에는 그 모습이 샌드박스 위로 굴러가는 모래알처럼 보였다.

마침내 산을 다 걸어 내려오자 큰 도로가 나왔다.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잠깐 서서 기다리자 버스가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는 한산했다. 창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두 사람,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세 사람. 그리고 무감정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는 민채.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티비도 컴퓨터도 없는 저택에서 사는 민채에게 바깥세상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었지만 그녀는 뉴스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전쟁, 도발, 평화, 경제 같은 파편적인 단어들만이 의식을 잠깐 스쳐 갈 뿐이었다.

버스가 학교에 도착하고 민채는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몇 분만 있으면 아이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민채는 그 정적을 좋아했다. 곧 깨져 버린다는 걸 알기에 더욱 사랑스러웠다.

몇 분 뒤 소란스럽게 떠드는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몇 분 뒤 교실은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고, 몇 분 뒤 수업이 시작되었다.

민채는 수업에 별 관심이 없었다. 선생들이 떠들어 대는 말들은 시시한 것들밖에 없었다. 소연의 명령만 아니었으면 학교 따윈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시시한 것들을 들으러 다녀야 하는지. 물어볼 때마다 소연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사각사각, 필기 소리 한구석에서 쪽지를 교환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려 하지 않아도, 민채의 눈은 이미 유리창에 비친 교실의 모습에서 그 쪽지의 내용을 읽어내고 있었다. 허세, 짜증, 재수, 냉혈 등의 단어가 보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말 따위, 상관없다. 민채는 교실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살짝 고개를 들어 태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마지막 단어는 조금, 아팠다.

햇빛이 점점 온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눈이 부셨지만 민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태양빛이 밝다고 해도, 자신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태양은 예로부터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렇다면 생명체가 아닌 자신이 굴복할 이유가 없는 건 당연했다.

학교를 마치고 민채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바깥이나 저택 안이나 마찬가지로 쌀쌀한 걸 보니 보일러를 틀지 않은 듯했다. 민채는 이불을 덮어쓴 채 소파에서 떨고 있는 소연 옆에 앉았다.

"보일러도 안 틀고 뭐 해요?"
"아, 아깝잖아. 혼자 있으면서 보일러 트는 거."
"그러다 감기 들어요. 몸도 약하면서."
"그땐 민채가 간호해주면 되잖아. 전염될 일도 없을 거 아냐."

웃으며 말하는 소연을 보며 민채는 한숨을 쉬었다. 알기 힘든 사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일러를 올렸다. 웅— 하는 소리가 들려와 민채는 이마를 찌푸렸다.

"왜, 어디 아파?"
"아뇨. 단지 좀 신경 쓰여서."
"아, 민채는 다 들을 수 있겠구나."

소연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 민채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소연이 기습적으로 민채를 끌어안았다.

"차가워!"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민채에게서 몸을 뗐다. 민채는 한숨을 쉬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4도 정도 낮은 체온. 병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쓸데없는 프로세스가 없기 때문에 열이 덜 나는 것뿐이다. 이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끈한 피부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하지만 신경쓰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민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녁이나 만들러 갈게요. 기다리고 있으세요."
"오늘은 안 피곤해?"
"피곤해요."
"그럼 쉬어. 오늘은 내가 만들게."
"그건 싫네요. 소연 씨가 만드는 음식을 먹느니 학교 급식을 먹는 게 낫지."
"어, 그 정돈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안 되는 거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소연은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민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국을 떠넣는 모습은 신비하게까지 느껴지는 우아함이 깃들어 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소연의 시선을 느낀 민채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맛 없어요?"
"응? 아냐. 민채가 해 준 요리가 맛이 없을리가 있어."
"그러면 안 먹고 뭐 해요?"
"민채 보고 있었지."
"밥이나 먹어요. 다 식겠다."

민채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소연은 문득 팔을 식탁 너머로 뻗어 그녀의 볼을 쓸어내렸다. 민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며 말했다.

"갑자기 왜 이래요? 징그럽게."
"내가 만들었는데도 정말 예쁘다 싶어서."
"제가 그거 때문에…"

민채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소연이 "응?" 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민채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요즘 돌아올 때마다 표정이 어둡던데."

그 정도도 읽히고 있었나. 민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표정을 숨기는 덴 능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에겐 어쩔 수 없나 보다.

"아, 그보다 반말 좀 쓰면 안 돼? 이러니까 진짜 엄마 같아서 어색해 죽겠단 말야."
"따지고 보면 그리 틀린 것도 아니죠."
"난 싫어. 아직 스무 살도 안 됐는데…."
"싫으면 명령하세요. 해드릴 테니."
"그건 더 싫어."

소연의 표정을 보며 민채는 말없이 살짝 웃었다. 이렇게 아이 같은 사람이 주인이라니, 그녀로써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 놓고 대할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민채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도 민채는 인형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어떠한 개성도 갖지 못한 인형. 아무런 소리도 없는 인형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앞에서 민채는 말없이 서 있었다.

"아직도 생각 못 했어?"

소연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민채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네, 전혀요."
"으음. 물론 이게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고민하는 얼굴의 소연을 보며, 민채는 문득 그녀가 원대한 계획에 대해 예전에 말했던 것들을 생각했다. "모두들 민채가 만든 인형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거기에 자신이 인간인 척 살아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민채가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민채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일이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 점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물어보아도,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인지는 전혀 말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민채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소연이 그것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민채는 다시 인형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얼굴을 겹쳐보았다가, 문득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끔찍하게 싫었다. 나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생겨나다니.

그녀는 이 세계에선 이레귤러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것을 아무리 숨기고 살아간다고 해도 언젠가는 들키게 될 것이다. 몇 년도 아니고, 수십 년을 나이 먹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심받는 게 당연할 것이다. 나만 아니라, 이 인형도 비슷한 운명을 갖게 되겠지. 문득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먼저 좀 올라가 볼게요."
"어? 잠깐만!"

소연이 부르는 소리에도 민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달리듯 걸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갔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걸, 억지로 삼켰다.

민채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이런 건 또 왜 쓸데없이 인간적인 걸까. 쓸데없이 소연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보일러 소리, 바람 소리, 걷는 소리 등. 소음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 사이에서,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민채야."

문 바깥에 있는데도, 소연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고생시켜서."

민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연은 잠깐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다가, 문에 등을 기대 앉아서 말했다.

"난 아직 초보라서 인형에 대해 잘 몰라. 그래서 민채를 처음 만들 때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어. 효율이 좋고, 예쁘고, 강하면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소연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이만 갈게."

소연이 저런 태도를 보일 때마다 민채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그녀가 날 이렇게 생각해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가끔 그녀가 친구처럼 느껴질 때마다, 민채는 이유 모를 혼란을 느꼈다.

다음 날 수업엔 체육 시간이 있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불평하는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체육 선생은 수업을 강행했다.

체육 시간이라고 크게 다른 건 아니었다. 준비 운동 격으로 하는 달리기에서도 민채는 선두에 서서 달렸고, 세 바퀴를 돌고 난 다음에도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다음부터는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운동장 한구석에선 야구부들이 야구를 하고, 중앙에선 남자애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스탠드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피구, 줄넘기 등을 했다. 민채는 그 어느 곳에도 끼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모두가 너무 느려 보였다. 아이들의 동작도, 날아가는 공도, 휘둘러지는 배트도. 그녀가 체육부에 들어가길 거부한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운동이라고 시시하지 않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쪽 구석에선 드라마, 연예인 등에 대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쪽에선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또 다른 쪽에선 전쟁, 데모 등의 뉴스 이야기. 그리고 다른 쪽에선 자신에 대한 험담.

외모나, 잘난 척을 한다거나, 태도가 재수 없다느니,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그렇게나 할 이야기가 없는 걸까. 자기들은 정작 더 많은 걸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것에 대해선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입가에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이 걸렸다. 언제나 그랬다. 처음 자신이 전학을 왔을 때부터 그랬다. 단지, 그들이 갖지 못한 걸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공격당했다.

직접적인 공격은 괜찮았다. 보통 인간들 따위 수십 명이 달려든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실제로도 몇 번 실력 행사를 하자 노골적인 괴롭힘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말은, 들려오는 소리는 전혀 막을 수 없었다. 자신들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더욱 끔찍했다.

과연 그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는지… 아니, 알지 못하는 것도 괜찮다. 알려주지 않는 것도, 작은 복수가 될 수 있겠지.

그때 잘못 맞은 타구가 민채의 얼굴 정면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맨손으로 공을 잡았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곧이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야구부에 공을 던져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정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수업종이 울렸다.

버스에서 내린 민채는 정류장에 서 있는 소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를 보자마자 소연은 손을 흔들며 달려와 팔짱을 끼었다.

"무슨 일이에요?"
"쉿. 바깥에선 반말 써."
"그게 하라고 한다고 바로 되는 줄…"
"명령이야."

이렇게 나온 이상 별수 없었다. 민채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서 왜 나왔어."
"그냥, 나들이나 좀 하려고."
"설마 그렇게 입고?"
"안 어울려?"
"그렇진 않은데…"

소연의 옷차림은 그녀와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하얀색 블라우스와 파스텔톤의 분홍색 치마. 하지만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감기 들어. 날씨도 이렇게 추운데…"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가냘픈 몸. 당장 지금만 해도 떨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민채는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입고 나온 거야. 추운 거 잘 견디지도 못하면서."
"하지만 이렇게 안 입으면 민채 옆에 있을 수가 없는걸."
"뭐?"
"민채가 너무 예쁘니 이렇게라도 안 입으면 비교당하잖아. 그건 싫어."
"아니, 그건…"

네가 날 비현실적으로 예쁘게 만들어 놓은 탓 아닌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없이 코트를 벗어 소연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이거 입으면 다 가려지는데…"
"잔말 말고 입어."
"하지만…"
"하라는 대로 해, 좀."

소연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민채가 원한다면."

그렇게 말하고는 민채의 팔을 끌어안고 머리를 기댔다. 소연의 체온이 느껴졌다. 가볍고, 따뜻하고, 살짝 떨리는 느낌이 마치 병아리 같다. 주인이면서, 너무 약하다는 생각만 든다.

"버스 오는 거 보여?"

소연이 도로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민채는 그쪽을 쳐다보며 살짝 인상을 썼다. 신호등 두 개는 더 지나야 할 거리에 버스 한대가 서 있었다.

"응. 103번이네."
"그러면 저거 타면 되겠다."
"학생들이 너무 많아. 다른 거 타자."
"어떤 걸로?"
"음. 108번이 좋을 거 같아. 그쪽에는 초등학교밖에 없거든."
"그럼 그렇게 하자."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소연은 태연한 듯 웃고 있었지만, 몸의 떨림마저 감추진 못했다. 내가 조금만 더 따뜻했다면 좋았을 걸. 민채는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바깥에서 음식을 사 먹거나, 전시회를 돌아다니거나, 서점에서 책을 골랐다.

하지만 가장 많이 들른 곳은 옷 가게였다. 괜찮은 옷이 보일 때마다 소연이 민채를 끌고 들어가 입혀보곤 해서 귀찮아 죽을 정도였다.

"아, 많이 샀다."

쇼핑백을 잔뜩 든 채 두 사람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해는 벌써 졌지만, 거리는 여전히 밝았다.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몸을 움츠린 채 걸어 다니고 있었다. 거리 저편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몰려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거 다 정리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겠네."
"괜찮아. 민채가 다 해줄 거잖아."
"그래, 다 내 일이지…"
"그런데 반말 쓰니까 좋다. 친구 같아.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안 돼?"
"그거, 명령?"
"아니, 부탁."

소연의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을 보며 민채는 복잡한 감정에 잠겼다. 그녀가 나에게 바라는 게 뭘까. 자기가 만든 존재에게 평등을 요구하는 이유가 뭘까. 인형을 만들어 본다면 나도 알게 될까. 어쩌면, 그녀의 원대한 계획과도 관련이 있을까

"…노력해 볼게."
"정말? 고마워!"

소연의 얼굴이 정말 기뻐 보였기 때문에 민채는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때 거리 저편에서 보이던 불빛의 행렬이 카페 앞을 지나갔다. 그 불빛의 정체는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촛불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많이 죽겠지."
"응?"
"아무것도 아냐."

전쟁.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들고 있는 팻말에는 전쟁과 관련된 글귀들이 쓰여 있었다. 문득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느낀 민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자. 버스 끊기겠다."
"응."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갔다.

정류장 앞은 혼잡했다. 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소연은 민채의 팔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떨림이 느껴졌다.

"추워?"
"조금."
"그러니까 좀 두껍게 입고 오지."

소연은 말없이 웃었다. 민채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려운 사람이다.

"저기, 혹시 아직도 화난 거 다 안 풀렸어?"
"내가 왜?"
"어제 있었던 일 말야."
"그 때문에 이렇게 나온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살짝 어색해진 소연의 표정을 보며 민채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거 때문에 화난 적, 없어."
"정말?"
"응. 나쁜 의도로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럼 됐어."
"고마워."
"뭐가?"
"믿어주는 거."

민채는 대답 없이 도로 저편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원한다면 믿음이 아니라 신봉까지도 받아낼 수 있을 텐데.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날씨였다.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소연의 떨림도 더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감기 걸릴지도 모르는데, 버스는 언제쯤에야 오는 걸까. 민채의 걱정은 전혀 모르는지, 소연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도 또 나오자."
"그땐 이렇게 춥게 입고 오지 않기야."
"따뜻한 날에 나오면 되지."
"그때도 마찬가지야. 몸 생각은 안 하고…"

그때, 도로 저편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고 퍽, 하는 소리가 따라왔다.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돌아봤다. 민채는 반사적으로 헉, 하는 소리를 냈다.

멈춘 자동차 앞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팔다리가 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등 쪽에서는 피가 번지고 있었다. 소란이 일어났다. 비명이 들리고, 복잡하던 거리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민채는 문득 팔을 잡은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녀는 재빨리 쓰러지는 소연의 몸을 받쳤다.

소연이 눈을 뜨자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민채의 모습이 보였다. 왠지 머리가 멍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따뜻한 물수건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의 방이었다. 분명 거리에 있었을 텐데… 그녀는 잠깐 눈을 깜박거리더니, 멍한 목소리로 민채에게 말했다.

"내가 왜 여기 있어?"
"기억 안 나?버스 기다리다가 쓰러졌잖아."
"어, 그랬나?"

잠깐 그녀는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래, 분명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끼익 소리가 들리고…

"아, 그랬구나. 그럼 여기까지 업고 온 거야?"
"응."
"안 힘들었어?"
"별 일 아니니까."

민채는 간단하다는 듯 말했다. 소연은 뭔가 말하려다 기침이 나와 한참을 콜록거렸다. 민채가 그녀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간신히 기침이 멎은 소연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민채가 물수건을 다시 대야에 담아놓은 물에 적시며 말했다.

"미안해."
"응, 민채가 왜?"
"내가 조금만 더 따뜻했다면 감기도 안 걸렸을 텐데."
"그런 걸로 사과하지 마. 그건 민채 잘못이 아니잖아."
"하지만…"

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물수건을 적시고 있던 민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이마에 얹었다.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아, 시원하다."

민채는 문득 얼굴에 뜨거운 것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소연의 열기가 옮겨온 것 같았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떼, 적신 물수건을 소연의 이마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그럼 가볼게. 혹시 아프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계속 옆에 안 있어 주는 거야?"
"저택 안에선 다 들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짐 정리도 해야 하고."
"그러면 별 수 없네."

소연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민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민채라면 피할 수 있었겠지?"
"응?

그때, 소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채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동차 사고 말야. 민채라면 자동차가 아무리 빨라도 순식간에 피할 수 있었겠지?"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은 너무 약한 거 같아. 모두 민채 같은 인형이라면 좋을 텐데. 늙지도 않고, 강하고, 감기에도 안 걸릴 거 아냐."

문득, 소연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대답할 말은 떠오르지 않아, 민채는 말없이 서서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소연이 얼버무리듯 웃으며 말했다.

"아, 맞다. 지금부터 계속 반말로 부르는 거야?"
"당분간은. 아프다고 누워있는 꼴을 보니 아무리 봐도 주인처럼은 안 보이네."
"그럼 감기 나으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야?"
"그건 하는 거 봐서."
"고마워."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민채는 살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말없이 소연의 방에서 나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소연의 숨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문득 그녀는 지하의 인형 공방으로 내려가 자기가 만들고 있던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그 무개성의 가면 아래 어떤 얼굴이 숨어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흐릿하게나마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