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어둠 속에 있다

벌써 십년도 더 된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소년, 진경수는 일요일인데도 평소보다 더 빠르게 잠에서 깼다. 왜냐면,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사실 소년이 다니는 교회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교회와는 다른 곳이었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본질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구체적인 면에서 그 집단은 일반적인 종교보단 조금 더 광신에 치우친 형태를 띄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이비였던 것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교회당에 앉아 교주의 미사를 듣다 보면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점멸하는 의식 사이로 조금씩 들리는 문장들도 대부분은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몇 번이나 들어, 지금까지도 기억하게 된 한 문장이 있었다.

악마는 어둠 속에 있다.

악마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랐고, 교주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한 건지도 몰랐지만, 소년에게는 그 한 문장이 어느새 깊숙히 각인되었다.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골목이나, 살짝 열린 옷장의 틈새를 보면 불현듯 그 문장이 생각나곤 했다. 저 안에는 악마가 살까. 물론, 소년이 어둠 속에서 악마를 발견한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

다시 교회로 돌아가서, 소년은 그날도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새 성경에 이마를 댄 채 잠들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부모님이 때려서라도 깨웠겠지만, 그날은 어쩐지 귓속에 아무런 소리도 들지 않을 때까지 잠들 수 있었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소년은 주위가 기묘하게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다. 고개를 든 소년은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하다.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 저 앞에 있는 교주도, 옆에 앉아 있는 부모님도, 교회당에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도.

어쩌면 다들 자기처럼 졸려서 낮잠이라도 자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문득 성경 옆에 종이컵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목이 말랐던 그는 손을 뻗어 종이컵을 잡으려 했다. 그때, 문득 느껴지는 이상한 향기에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아몬드 향 같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의 손끝에 종이컵이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 내용물이 흘러내려 성경과 바닥을 적셨다. 소년은 황급히 성경을 치웠지만, 이미 푹 젖은지 오래였다.

별 수 없다고 생각한 소년은 성경을 펴서 액체를 닦아냈다. 그리고 의자에서 내려와 교회 바깥으로 나왔다.

하늘에서는 맑은 햇살이 내리쬐고, 정원의 나무에선 새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좋은 날이었다. 소년은 벤치 위에 앉아, 멍하니 성모 마리아 동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인자한 미소를 보니,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콧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이 낮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

새벽, 경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밖에서는 희미하게 가로등 불빛이 비쳐 들어온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의지해 그는 문을 열었다.

집은 고요했다. 침실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숨소리를 제외하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수는 발걸음을 죽이며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갔다.

새벽의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번화가도 아닌 곳이라 가게들도 전부 불을 껐기 때문에 스산한 기운까지도 느껴졌다. 드문드문 자동차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쳐간다. 경수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거리를 걸었다.

마침내 그가 도착한 곳은 5층짜리 상가 건물이었다. 상가라고는 해도, 공사가 덜 되어서 겉 자재도 덜 발려 있었고 입주한 가게도 없다. 주변에 가게도 없는데다 뒷편에는 짓다 만 아파트까지 있어서 꺼림칙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경수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계단을 걸어 올라가 5층에 도착해 쇠로 된 현관문을 열자 희미한 불빛으로 밝혀진 사무실이 나타났다.

컴퓨터 몇 대와 티비가 켜져 있고, 복판에 있는 쇼파에서 소녀가 무료한 표정으로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다. 경수가 들어서자, 그녀는 흘깃 돌아보고는 말했다.

"과자 사 놨어. 먹어."
"고맙지만 됐어."
"먹어. 안 그러면 내가 먹어야 하는데 밤에 뭐 먹으면 살찐단 말야."
"넌 좀 쪄도 되는데."
"안 돼. 그러니까 먹어."

그렇게 말하고 민정은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경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모니터 앞에 놓여 있던 과자 봉지를 집어들었다.

처음 민정과 만난 날, 경수는 진짜 악마와 마주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의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골목이나 건물의 틈새 같은 어두운 곳들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재미없게도, 그곳에선 도둑고양이 같은 것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둠은 무섭지 않았다. 다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어차피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지나가듯 한 말일 뿐인데, 나는 왜 그 문장에 매달려 있는 걸까.

그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이 상가 건물이였다. 어딘가 기분 나쁜, 축축한 공기가 맴도는 건물이다. 그 순간, 직감 같은 것이 들었다. 어쩌면 저곳에서는 악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사무실의 문을 연 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경수는 정말 악마와 만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래서, 띄워놓은 기사들은 읽었어?"
"응."
"어떻게 생각해?"

민정이 띄워 준 것은 연쇄 범죄 사건이었다. 며칠 간격으로 뒷통수에 상처를 입은 채 쓰러진 사람이 발견되는데, 큰 이상은 없으나 왠지 그날 밤의 기억이 깨끗하게 빠져나가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일반적인 사건은 아닌 것 같네."
"J강박증의 증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글쎄…"

J강박증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강박증의 일종으로, 병을 가장 처음 발견한 박사의 이름 앞글자를 따서 지어졌다. 증상은 강박증에 걸리면 보통 인간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는 것으로, 강박으로 인해 뇌의 습관 고리가 변하고, 특정 부위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하며 그런 것들을 하게 해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능성은 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하룻밤의 기억을 깨끗이 뽑아내 버리는 건 불가능하니. 그러나 단정짓기엔 아직, 이르다.

"마술사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마술사들은 이런 식으로 일을 수상해 보이게 처리하진 않아."
"어설픈 마술사일 수도 있지. 또 그렇게 따지면 어떤 강박이 특정한 사람들의 기억만 지워야 하게 만든다는 건데?"
"그러니까 정신병이지."

민정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지."
"알았으면 됐고. 그래서 다음 사건은 어디에서 일어날 것 같아?"
"응?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보단 네가 잘 알겠지. 사건 장소도 너네 동네잖아."
"그렇긴 한데, 음…"

기사에 사건 현장이 상세하게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로는 무리다. 물론 이 동네의 뒷골목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한 것 같은데…"
"혜영 씨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으, 별로 그러고 싶진 않은데…"
"말이라도 해 봐. 이런 거 아니면 별 쓸모도 없으면서."

사실이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노력은 해 볼게."
"기대할게."
"그런데, 너는 뭘 할건데?"
"나? 난 이미 인형들을 풀어뒀어. 혹시나 수상한 거 있으면 보고하라고."
"결과는?"
"아쉽게도, 아직은."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무실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등교 시간까지는 꽤 오래 남아 있었다.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엔 조금 아깝게 느껴져서, 경수는 방향을 조금 틀어 동네의 구석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민정이 인형을 풀어뒀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녀의 인형과 마주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보통 사람들이랑 구분이 되지 않으니 알아볼 수도 없겠지만. 인형사라면서, 정작 그녀가 만들었다는 인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사무실의 문을 연 순간 갑자기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문에 일종의 결계 같은 걸 쳐서 몸을 묶어놓은 것이라고 했던가. 그랬던 기억이 난다.

민정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서랍에서 나이프를 꺼내 경수의 목에 갖다 대며 말했다.

"너, 누구야?"

그 말을 들은 순간, 경수는 그녀가 악마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거짓말 하지 마. 보통 사람이 이런 데 올 수 있을 리가 없어."

이것도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그녀는 이 건물 전체에 결계를 쳐서 일반인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들어올 때 느낀 기분 나쁜 공기가 그것이었다고.

"협회가 보낸 첩자인가? 특별한 마나는 느껴지지 않는데… 아니면 교회? 어쩌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보다 나이프 좀 치워 주면 안 될까."
"그래서, 목적이 뭐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온 거지?"
"목적? 어, 그건 좀… 믿어줄 지 모르겠는데."
"말해."
"악마를 찾으러 왔어."
"뭐?"

놀라는 그녀에게, 경수는 자신이 어릴 때 겪은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녀는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도 나랑 비슷한 걸 찾나 보네. 좋아, 믿어줄게."

이후 어쩌다보니 지금 같은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정작 진전은 전혀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골목을 걷던 경수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170cm 정도의 날씬한 여성이다. 그는 황급히 뒤돌아섰다.

"거기 서, 진경수."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체념한 듯 뒤돌아서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혜영 씨."

날카로운 인상의 미인이 이마를 찌푸리며 경수에게 걸어왔다.

"안녕은 됐고, 너 지금 여기서 뭐 해?"
"음… 산책이요."
"거짓말 하지 말고. 너, 또 그 악마니 뭐니 찾아다닌다고 이러는 거지."

역시 이 사람은 속일 수 없다. 경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이랬다. 자신 같은 인간은 훤히 꿰뚫어보는 느낌.

혜영과 경수는 십년 전의 사건에서 처음 만났다. 경수의 부모가 속해 있던 집단자살 사건의 담당 형사가 그녀였던 것이다. 중요 참고인이었던 경수는 별 수 없이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J강박증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넌 어쩜 그렇게 겁이 없냐? 혹시 이상한 거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혜영 씨는 이 시간에 왜 이런 데 계시는데요?"
"나는 이게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일이라면… J강박증 관련인가 보네요."
"맞아. 요즘 이 동네에 이상한 일이 생겨서. 너도 알고 있지?"

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요 며칠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야근 중이거든."
"고생하시네요."
"넌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하잖아."
"뭐, 그건 그렇죠."

그는 씁쓸한 듯 살짝 웃어 보였다.

"아, 혹시 그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장소라던가, CCTV나."
"아직 없어. J강박증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들은 이야기고."
"아쉽네요."
"그리고, 이런 일에 괜히 관심갖지 마.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네? 기껏해야 기억을 잃고 쓰러져 있는 정도 아닌가요? 만나도 별 위험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세상에 무방비로 쓰러져 있는것 자체가 위험해. 그거 때문에 다들 야근중이라고."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혜영은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어디 싸돌아다닐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집으로 가. 너 같은 인간이 돌아다니는 것도 충분히 신경쓰이니까."
"안 그래도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너네 집이 이 방향이 아닌 걸로 아는데?"
"그건 그런데…"
"나중에 전화해서 확인해 볼 거다."
"…알았어요."

경수는 순순히 방향을 틀었다. 아무래도, 집으로 전화하는 건 역시 좀 곤란하다.

해가 뜰 때까지 경수는 컴퓨터로 기사를 찾았지만 딱히 더 쓸모있는 자료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명종이 울렸고, 그는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오빠, 잠깐!"

먼저 걷고 있던 그의 등 뒤로 연주가 달려왔다. 경수는 잠깐 멈춰서서 그녀가 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빨리 나가는 게 어딨어."
"너무 푹 자고 있어서 학교 안 가는 줄 알았지."
"놀리지 마. 어제는 카톡좀 하느라 늦게 잤어. 그리고 오빠가 그런 말 하는 건 반칙이잖아."
"그래? 숙모님에게 휴대폰 좀 뺏으라고 해야겠네. 딸이 밤에 잡담하느라 잠을 못 잔다고."
"그런 거 아냐. 현지 상담해주느라 어쩔수 없었단 말야."
"상담? 니가?"
"뭐가 어때서!"

경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무튼, 무슨 내용이었는데?"
"그냥, 성적이 떨어져서 고민이라는 이야기."
"걔 반에서 일등이잖아. 왜 상담을 너한테 해?"
"몰라. 나 말고 별로 친한 애가 없어서 그런가."
"그보단 네가 성적이랑은 별 상관없는 삶을 사니까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오빠!"

낄낄대며 웃는 경수의 등짝을 연주가 세게 후려쳤다.

학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같은 교실로 들어갔다. 연주는 먼저 도착한 여자아이들과 합류해 잡담을 했고, 경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는 멍하니 교실을 돌아보다 문득 앞자리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이현지, 반에서 1등이자 전교 석차도 3등 이내를 놓치지 않았다. 별로 성적 때문에 고민할 것 같은 아이는 아닌데.

그녀는 일초의 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책을 보고 있었다. 아마 친구가 없는 데는 저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도 아마 한몫 할 것이다.

언제나 완벽을 기하는 성격이고, 그러니 조금의 실수도 납득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고민은 자신 같은 범인의 이해 바깥에 있는 것이다- 경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경수는 수업을 들으며 그녀를 관찰했다. 수업 시간에는 매일같이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는다. 쉬는 시간에는 복습 및 예습. 점심시간에는 혼자서 빠르게 밥을 먹고 정리를 한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교문 앞으로 자동차가 찾아와 태워 간다. 목적지는 아마도 학원이겠지.

성적이 잘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경수는 생각했다. 저렇게 공부할 수 있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저 정도의 성적은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의 경우에는 어딘가 쫓기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경수가 집으로 들어가자 숙모가 말했다.

"다녀왔니? 연주는?"
"친구들이랑 어디 놀러 간대요."
"학교는 어땠니?"
"뭐, 별 일 없었죠."

두 사람은 간단한 잡담을 나누었다. 경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컴퓨터를 켜고 사건에 대해 기사를 찾아보았다. 여전히 쓸만한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모니터를 끄고 그는 침대에 누웠다.

숙모는 좋은 사람이었다. 삼촌도 그렇고. 그 날 이후, 부모님을 잃고 갈 곳이 없어진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준 사람도 그 둘이었다.

어릴 때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끌려가도 되지 않았으니 더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지금 되돌아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래도 이것은 평범한 가정이 아니기에, 더 이상 부담을 지울 수 없다는 생각 또한 있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 되자 경수는 어김없이 집 밖으로 나왔다. 다음 날이 휴일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어제보단 사람이 많았으나, 사건 탓인지 여전히 한산한 편이었다. 드문드문 경찰들도 보였는데, 늘어난 인파 때문인듯 했다. 휴일 전날에도 야근. 고생한다 싶기도 했다.

"혜영 씨는?"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민정이 한 말이었다. 경수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만났는데 아직은 넘겨줄 정보가 없대."
"그럼 정보도 없으면서 왜 왔어?"
"어, 그냥 갈까?"
"됐어. 날씨 추우니까 좀 앉아 있다가 가."
"지금 여름인데."
"아, 아무튼."

민정은 살짝 당황한 듯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의아하게 느껴졌다. 경수는 컴퓨터 앞에 앉으며 말했다.

"네 수확은 좀 어때?"
"전혀. 조금이라도 이상한 거 있으면 보고하라고 했는데 아직 하나도 없어."
"으음. 대체 어떤 강박증이 기억을 지우게 만드는 걸까."
"나도 생각해봤는데 별 건 안 떠오르더라. 혹시 자신이 암살자라는 강박증에 시달린건 아닐까 생각도 해 봤는데, 그거라면 단순히 보이지 않게 되는 게 더 빠른 게 아닌가 싶고."
"J강박증 증상으로 그런 것도 있어?"
"아직까진 관측된 바 없어. 다만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로썬 알아낼 방도가 없긴 하겠지."
"흠. 그 말 들으니 어쩌면 안 보이는 환자들이 이곳저곳에 득시글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너, 변태야?"
"누구나 그런 생각 한번쯤은 하잖아?"

으휴. 민정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기억을 지워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얼마나 거창한 이유이길래 이렇게 집중하나 궁금하네."
"말했잖아. 걔네들은 정신병자라고. 어쩌면 사소한 이유일지도 모르지. 단지 12시 44분에 아무도 마주치면 안 된다는 강박만으로도 그 정도 일을 저지를 수도 있지."
"그런 생각은 해결에는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중요한 건 동기를 추적하는 것보단 실제적인 증거란 의미야. 어차피 그걸 알아낸다고 해도, 거기에 들어맞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전화 좀 해봐."
"누구한테?"
"당연히 혜영 씨지. 하루 지났으니 좀 더 알 거 아냐?"
"무리야.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도 들었다고."
"정말 쓸모라곤 없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메세지를 보냈다.

"누구한테 보내는 거야?"
"경찰서에 심어둔 인형. 자료 좀 보내라고."
"대체 왜 나한테…"
"쓸모있는 일 하나쯤 하게 해주려고. 근데 안 됐네."
"…미안."
"알면 됐어."

에휴. 경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료가 도착하고, 민정은 컴퓨터로 지도를 띄워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표시한 후 경수의 컴퓨터에 전송했다. 지도 군데군데 찍혀진 점을 휴대폰에 저장한 후, 경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 내일 휴일인데."
"응? 여기 가 보라는 뜻 아니었어?"
"아니, 그걸 보고 아무거나 좀 알아내 보란 뜻이었는데."
"이걸로 뭘 어쩌라고…"
"잘 살펴보면 패턴이 나올 수도 있잖아. 사건이 일어나는 환경이라던가, 혹은 장소가 어떤 식으로 변하는가나…"
"아무래도 난 몸으로 부딪치는 쪽이 나아서."

잠깐 경수의 얼굴을 쳐다보다, 민정은 컴퓨터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가. 수상한 거 있으면 말하고."
"알았어."

경수는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사건이 일어난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조금 더 어둡고, 조금 더 축축한 공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딱히 특별한 점은 느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민정의 방법론이 옳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시 휴대폰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장소들 간의 연관성을 찾아보았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선을 이어보거나 했지만 딱히 그 패턴 자체에서 무언가를 찾아보긴 힘들었다.

J강박증에 대해서는 이미 의학적인 해석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는데, 민정 같은 마술사도 그랬다. 그녀는 J강박증의 증상은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한 거라 믿었고, 그것은 마술로만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난 날, 경수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설명해준 이야기였다.

하지만 악마는 데이터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자신처럼 밖으로 나가서 그 무언가를 찾아보지 않고, 단지 데이터에 의지하려는 걸까.

다음 날, 경수는 해가 뜨고 나서 다시 현장을 돌아보았다. 현장은 전날의 어둠이 걷히고 나니 평범한 골목처럼 보일 뿐이었다. 단지 느낌일 뿐이었나. 어쩌면 자신은 그 한 마디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악마는 어둠 속에 있다.

어쩌면 그 강박이, 가공의 악마를 만들어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악마를 직접적으로 본 적이 없으니, 그 구체적인 모습을 만들어내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도, 자신의 불면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십년 전의 그 사건 이후로 단 한번도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신과에 상담도 해보고 수면제도 써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직까지 수술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마취를 해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게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쉬어야 한다는 감각을 느낀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잠들지 않는다고 딱히 불이익이 생긴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깨어있을 수 있으니 이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자신에게 씌어진 강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잠이 사라져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민정은 그 때문에 경수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정신병자라고 해도, 이 정도로 사고의 인과가 떨어진 건 생각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아직까지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 것 같지만.

“죄, 죄송합니다…”

그때, 지나가던 집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현지다. 이 근처에 살고 있었던가. 매일 하교시간이 되면 엄마가 차를 교문 앞에까지 끌고 와 태워 갔기 때문에 어디에 사는지도 알지 못했다. 흥미가 생긴 그는 창문 옆 벽에 등을 기대 대화 내용을 엿들었다.

길게 혼내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요점은 이랬다.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교 등수가 10등까지 떨어졌는데 네가 불성실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잠깐 듣다보니 괴로운 기분이 들어서 그는 벽에서 몸을 뗐다. 저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친구를 갖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현지가 집 밖으로 나왔다. 울상지은 얼굴로 그녀는 경수를 잠깐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골목 저편으로 달려갔다. 집 안에서 "현지야!"라고 외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찮게 됐다. 그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상가 건물은 낮에도 썩 들어가고 싶은 분위기를 주는 곳은 아니었다. 버려진 건물에 있을 법한 그 흔한 낙서나 담배꽁초도 없었다. 그 정도로 기분 나쁜 곳이라는 의미겠지. 경수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사실이었지만.

사무실의 문을 열자, 쇼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민정이 보였다. 커튼이 쳐져 있는 사무실은 언제나 밤인 듯 햇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낮에는 이렇게 자는 건가. 마술사의 삶은 이런 것일까.

“어, 왔으면 좀 깨우지.”

컴퓨터를 하고 있다 보니 어느덧 민정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냥, 자는 사람 깨우는 건 취미가 아니라.”
“뭐, 이해해. 직접 현장에 가 보니 어땠어?”
“글쎄, 잘 모르겠던데. 너는?”
“나도 아직은 자료가 영 부족해서. 그래도 다음 범행이 일어날 곳이 어딘지는 대충 파악했어.”
“어디?”
“여기 있어. 파란 색으로 찍힌 점들이 그거야.”

그녀는 복잡한 선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보여 주었다.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찍은 빨간 점들을 수많은 선들이 통과하고, 그 교점에 파란 색으로 점이 찍혀 있었다. 장소는 다양했다. 학교, 골목, 상점, 빌딩 등…

"너무 많잖아…"
"어쩔 수 없어. 자료가 부족하니까."
"그러면 직접 가봐서라도 자료를 얻으면 되잖아."
"넌 아무것도 못 봤다며."
"네가 직접 보면 좀 다를 수도 있지."
"난…"

갑자기 민정이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뭐 곤란한 이유라도 있어?"
"그, 그건 아니고."
"아니면?"
"무서워서…"

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뭐가 어때서! 그런 데 아무렇지도 않게 가는 네가 이상한 거야!"
"아니, 더 무시무시한 마술도 쓸수 있으면서 왜 그런 걸 무서워하나 싶어서."
"그거랑 그거랑은 별개야. 생리적인 문제라고."
"…알았어."

경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져서 어두웠다. 오늘은 평소보단 빠른 귀가다. 돌아가면 씻고 게임이나 할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경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오빠, 어디야?"

연주였다. 어딘가 다급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바깥인데, 왜?"
"현지가 없어졌대. 혹시 본 적 있어?"

집 밖으로 달려나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전화는 해 봤어?"
"집에 두고 갔대. 현지 부모님이 휴대폰 확인하고 나한테 온거 아니냐고 물어봐서 알게 된 거야."
"경찰에는 신고했어?"
"현지 부모님이 신고한다고 했어."
"그럼 경찰에게 맡기면 되잖아."
"하지만…"

연주는 말끝을 흐렸다. 끄응. 귀찮은 일엔 끼고 싶지 않은데. 잠깐 고민하던 경수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지금 어디야?"
"나? 학교 가는 중이야."
"알았어. 교문 앞에서 만나자."

전화를 끊은 경수는 문득 민정이 보여준 자료에 학교도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불이 꺼진 학교는 음산했다. 주위에는 상가 하나 없는데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저 안에 무언가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연주가 달려왔다.

"빨리 왔네."
"마침 근처에 있었거든. 근데 학교에는 왜 오자고 한 거야?"
"현지가 갈 만한 곳이 그렇게 많진 않아서 여기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워낙 얌전해서 PC방이나 카페 같은 데도 가본 적 없는 애인데 달리 갈 곳이 없을 것 같아서."
"알았어. 일단 들어가자."

운동장을 지나,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가로등 불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휴대폰 라이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경비 할아버지 어디 갔지?"
"글쎄. 일요일이라 안 나오는 거 아닐까?"
"그런가?"

일요일에는 경비도 쉬는 거였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휴게실, 교실, 동아리방 등. 하지만 어디서도 현지의 모습을 찾아볼 순 없었다.

"학교엔 없는 거 같은데."
"그러게… 아, 옥상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옥상? 거기 잠겨 있지 않았어?"
"원래는 그런데, 자물쇠가 망가진 곳이 있거든."
"그거 고쳐야 하는 거 아냐?"
"맞는데, 다들 알면서도 넘어가는 분위기야."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특히 더 어두운 것 같았다. 무언가, 어둠이 더욱 끈적하게 들러붙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오를수록 농도가 높은 액체 속을 헤엄치는 느낌.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니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나왔다. 문손잡이가 어쩐지 차가웠다. 꺼림칙해진 경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연주를 막았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나 먼저 들어갈게."

대답도 듣지 않고 경수는 문을 살짝 열어 옥상으로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그는 옥상을 둘러보았다.

달빛이 비치고 있었기에 옥상은 생각만큼 어둡진 않았다. 운동장 쪽을 보니, 난간에 기대 웅크리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현지다. 경수는 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현지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세상이 암전했다. 달빛도, 별빛도, 도시의 빛도, 모두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 중에, 오직 현지의 모습만이 명확하게 보였다.

정전인가. 아니다. 이건 분명 이상이다. J강박증이 이런 일도 할 수 있었던가? 세계를 조작한 게 아니라면, 이건 그녀가 보여주는 환각일 것이다. 빛은, 존재한다는 뜻이다.

"어, 너는… 연주 오빠네."
"여기서 뭐 해? 다들 찾고 있는데."
"찾았어? 왜?"
"날도 어두운데 전화도 안 받고 집에 안 들어오니까 그러지."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 날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뒤돌아보려 했지만, 고개가 돌려지지 않는다. 마치 그녀의 눈에 시선이 고정되어버린것만 같다. 경수는 천천히 뒷걸음치며 옥상의 문을 찾았다.

"저기, 많이 고생했어? 연주는?"
"아, 아니. 그렇지 않아. 금방 찾았는데."
"여기 있는 건 연주가 말해준 거야?"
"어, 어…"
"어쩌지… 폐를 끼치고 말았네…"

그때, 시야 가장자리에 무언가가 희미하게 보였다. 마치, 쓰러져 있는 남자 같은…

"저, 저쪽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뭐야?"
"어, 경비 할아버지네. 왜 저기 계시지?"

현지가 고개를 돌렸다. 속박에서 풀린 듯 고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빛이 되돌아왔다. 경수는 뒤돌아서 옥상의 문고리를 잡았다.

"들어가도 돼, 오빠?"

그때 문 너머에서 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고리에서 손을 놓았다. 이대로는 연주가 위험하다. 그는 문을 잠갔다.

"연주도 같이 왔어?"
"아, 아냐. 나 혼자 온 거야. 연주는 집에 있어."
"하지만 연주 목소리가 들렸는데."

현지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경수는 문 앞을 막았다.

"착각이겠지. 이렇게 어두운 데 있을 리가 없잖아."
"아냐. 분명히 들었어."
"분명 잘못 들은 거…"
"비켜!"

순간적으로, 엄청난 힘이 경수를 밀쳤다.

머리가 아팠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았다. 피가 흘러나가는 게 느껴졌다. 시야가 점점 가물가물해져가고 있었다.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서서히 하나의 의문이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악마는 어둠 속에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면, 무엇이 되는 걸까.

세상에 완전한 어둠이 없다는 것 정도는 경수도 알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이나 커튼을 친 방이라도 희미하게나마 약간의 빛이 들어오게 마련이고, 눈을 감는다고 해도 눈꺼풀 사이로는 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 저 한없이 어두워 보이는 우주 공간이라도, 실은 별빛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전부 자신이 빛을 인식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만약, 한순간이라도 의식이 사라지게 된다면, 빛 따윈 인식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때의 자신은 무엇이 되는 걸까.

"어, 경수야. 미안.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큰 폐를 끼쳐 버렸네…"

현지가 경수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왠지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 목소리만이 또렷했다.

"어떡하지. 엄마가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오늘은 너무 많은 폐를 끼쳐 버렸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쓰러진 경수의 머리맡 앞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녀는 말했다.

"아, 그럼 지워버리면 되겠다."

그녀는 손을 들어 경수의 머리에 찔러넣었다. 그의 의식은 완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만약 어둠 속에 빠져든 게 나라면, 나는-

경수의 몸이 터져나갔다. 그의 몸은 검은 색의 안개로 화해, 현지를 휘감았다.

"뭐, 뭐야 이거…"

그녀는 당황한 듯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끈적한 타르 속에 갇힌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민정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지."
"경수야?"

안개 속에서 경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거나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 건, 무언가에게서 도망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언제든 도망칠 수 있기 위해 잠들수 없는 거고, 거기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데는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고도 했지."

현지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져갔다.

"자, 잘 모르겠으니 좀 놔 줘."
"그러면서 이런 말도 했지. 어쩌면 내겐, 그게 악마인지도 모르겠다고."

마지막 한마디에서, 깊은 곳에서 올라온 목소리가 겹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미안. 나도 어쩔 수가 없네."

암흑이, 세계를 집어삼켰다.

연주에게 들은 바로는, 갑자기 옥상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당황한 그녀는 혜영을 불렀다. 경비실에서 열쇠를 꺼내 간신히 문을 열자, 옥상에는 경수와 현지와 경비 할아버지가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 가 그 애의 강박이었어."

사무소에 들어가자마자 민정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걔네 엄마가 그 애를 엄청나게 엄하게 키웠던 모양이더라고. 성적이 떨어지면 안 된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 어머니 말은 잘 들어야 한다. 아마 거기서 저 한 문장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나 봐."
"넌 괜찮냐는 말도 한 마디 안 하냐?"
"알고 있었거든."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빠르기도 하네. 근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거랑 기억을 지우는 게 무슨 상관이야?"
"아무리 조심해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폐를 끼칠 수 밖에 없게 될 때가 있잖아. 그 사실을 지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억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 또, 걘 이미 있는 피해자들에 대해선 어떻게 폐를 끼쳤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나 보더라. 완벽하기도 해라."
"그렇게 멋대로 남의 기억을 지우는 것 자체가 폐가 된다는 생각은 못 한 걸까?"
"말했잖아. 그러니까 정신병자라고."

민정은 간단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그 현지란 애는 어때? 정작 발견되고 나서는 이미 J강박증의 증상이 사라져 버렸다던데."
"걔? 잘 지내. 어… 예전보다 좀 더 나아진 것 같기도 해."

현지는 확실히 나아진 것 같았다. 강박적으로 공부에 매달리던 모습도 사라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예전처럼 교문 앞으로 엄마가 그녀를 태우러 오지도 않았다. 또, 소극적이지만 남들과 좀 더 어울리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야기를 듣고, 민정은 말했다.

"그럼 결과적으론 잘 된거 같은데? 과정이 좀 괴상하긴 했지만."
"그건 그런데, 왠지 나만 보면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것 같더라고."
"그게 왜? 관심 있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왠지 더 큰 공포로 작은 걸 덮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상관 없잖아. 악마를 만나는 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

나도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덧붙였다.

확실히 그것은 옳은 말이다. 평범한 사람에겐, 악마보단 J강박증이 훨씬 더 현실적인 공포이다. 악마를 만나는 건, 벼락을 일곱 번 맞고 살아남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겠지.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쩌면 내가 강박적으로 느끼던 가공의 공포가, 가공의 악마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라고."

그렇다면 자신은, 현지에게 또 다른 악마를 심어준 게 아닐까. 하지만 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가설일 뿐이잖아. 확정되지도 않은 것에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사실이라면?"
"그땐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넌 도와주기나 해."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빙긋 웃었다.


아 내가 이딴 글을 쓰려고 며칠을 날렸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