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

어떤 여자가 성훈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지수가 등 뒤에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교실로 들어갔다.

쉬는 시간이 되자 지수는 복도로 나와 옆 반으로 갔다. 교실의 문을 열자 성훈이 그 여자와 친근한 듯 떠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점심 시간이 되었다. 지수는 접시에 음식을 담아 몇몇 여자들과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하던 그녀의 눈 앞으로 성훈이 지나갔다. 지수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성훈이 여자의 앞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테이블이 흔들렸다. 그녀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성훈의 옆으로 갔다. 자리에 앉으며, 그녀는 성훈의 앞에 앉아있던 여자에게 말했다."자리 좀 비켜줄래? 지금 약혼자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야."

"으, 응…"

여자는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시를 잡는 그 팔을, 성훈이 잡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비켜!"

"앉아 있어!"

두 사람의 고함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정적이 깔렸다. 성훈은 한숨을 쉬고는, 손을 들어 지수의 팔을 잡았다.

"안 되겠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미안."

그렇게 말하고 성훈은 앞자리의 여자에게 윙크했다. 황당해하는 지수를 끌고 그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너 뭐야? 아까 걘 또…"

"뭐긴 뭐야. 여자친구지."

"지금 누구 약올리는 거야? 우리 약혼한거 전교생이 아는거 뻔히 알면서 그러는 건 무슨 수작이야?"

"글쎄, 질투심 유발?"

"지금 농담하는 걸로 보여?"

성훈은 휘파람을 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성훈을 바라보았다.

"할 말 끝났어? 그럼 간다.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말야."

"…도대체 몇 번째야."

"글쎄. 안 세어봐서 모르겠는데. 네가 좀 가르쳐 줄래?"

"너 지금 바람피다가 걸린 거야. 그런데 뭐가 그렇게 뻔뻔해?"

"넌 그러면 고작 계약결혼 가지고 뭘 그렇게 심각하게 굴어?"

"뭐?"

지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성훈을 바라보았다. 성훈은 씁쓸한듯 웃으며 말했다.

"피차 좋아서 맻은 약혼도 아니잖아. 말하자면 M&A, 집안 사이의 인수합병을 위해 내세운 구실에 사랑 따위가 들어갈 틈은 없다는 거, 서로 잘 알잖아."

그렇게 말하는 성훈의 말투는 차가웠다. 지수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어차피 깨질 가능성도 없는 거, 너도 나 신경쓰지 말고 다른 남자 만나던가 해. 아니, 제발 좀 그래주라. 그럼 난 밥 먹으러 간다. 넌 좀 있다가 들어와라."

그렇게 말하고 성훈은 지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등을 향해, 지수는 말했다.

"…열 다섯 번째."

"뭐?"

"열 다섯 번째라고. 아까 그 여자애."

"기억하기 귀찮았는데, 고맙다. 다음번에도 물어볼 것 같으니 잘…"

"난 안 돼?"

"뭐?"

성훈이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봤다. 지수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말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다섯 명이야. 걔네들이 다 나보다 잘난 것도 아니고, 너도 진지하지 않잖아. 그런데 왜 나는 그 열 다섯 명 중 하나가 될 수 없…"

"안 돼."

"왜!"

"아내랑 바람피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성훈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식당 쪽으로 걸어가며, 그는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건, 다 너 때문이니까."

성훈이 식당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수는 멍하니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그녀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주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

성훈은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시시한 잡담을 하거나, 서로 장난을 치는 둘의 모습은 썩 즐거워 보였다.

성훈이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멈추어 섰다.

"왜 그래?"

여자친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표정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변했다.

"쟤 지수 아냐? 옆엔 또 누구야?"

그곳에는 팔짱을 끼고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지수가 있었다.

"잠깐만."

성훈은 여자친구의 손을 놓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지수는 성훈을 보고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약혼자 씨. 뒤에 있는 사람은 열 아홉번째?"

"그렇게 많진 않을텐데."

"내가 기억하기론 아닌데? 민하, 지연, 수진, 지민, 윤하, 정민, 주희, 유리, 승아, 재경, 정희, 슬기, 혜교, 순규, 하리, 미영, 채린, 설하, 나미, 희정. 다음 쟤 아냐? 아, 스무 번째인가? 요즘 애들은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잘 모르겠네."

"야, 너!"

성훈은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여자친구가 도망치듯 달리고 있었다.

"잠깐만!"

그의 외침에도 여자친구는 점점 멀어져갔다.

"어라, 잘 모르고 사귀었나봐? 미안."

당연하지만 별로 미안하다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성훈은 한숨을 쉬고는, 지수에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니가 팔짱끼고 있는 남자는 누구냐?"

"보면 몰라? 남자친구지."

"너 이거 때문에 나 피하고 다닌 거였냐?"

"내가 널 왜 피해? 니가 못 찾은 거겠지."

성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 할 말 없지? 그럼 난 이만 지나갈게."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지나치는 지수의 팔을 성훈이 잡았다.

"어머. 왜 이래? 들러붙는 남자 취향 아닌데."

"너 나랑 대화 좀 하자."

"지금 우리 가야 할 데 있는데."

"제발 좀!"

성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수는 성훈을 잠깐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놀아줘야겠네. 미안한데 먼저 가 봐, 자기. 난 좀 있다가 갈게."

그렇게 말하고 지수는 남자친구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성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너 지금 뭐 하냐?"

성훈이 지수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뭐 하긴? 그냥 서 있지. 안 보여?"

지수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대답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게 그런 거…"

"니가 다른 남자 만나보라고 했잖아. 그래서 만난 건데, 뭐 어때서 그래?"

"야…"

말문이 막혔다. 성훈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지수를 쳐다보았다.

"아니면, 설마 직접 보니 생각한 거랑 달라? 뭐 질투심 같은 거 생겨? 우리 사이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먼저 말한 건 너였던 거 같은데?"

"너 제법 늘었다?"

"너 보고 배웠거든."

지수가 매서운 눈초리로 성훈을 노려보았다. 그는 잠시 팔짱을 끼고 있다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지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더 할 말 있어?"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성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섰다.

"뭐?"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넌 이만 가 봐. 남자친구가 많이 기다리겠다."

성훈은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묻어나왔다.

-

눈 내리는 거리 한복판에서 지수와 성훈은 운명처럼 마주쳤다. 둘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하얀 입김이 조용히 새어 나와 공기에 녹아들었다.

"안녕."

지수가 말했다.

"안녕."

성훈이 말했다.

"여긴 뭐 하러 나왔냐?"

"그냥, 쇼핑 하러 나왔지. 너는?"

성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수는 팔짱을 끼며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너 남자친구는 어디 두고 혼자 나왔냐?"

"아, 걔? 찼어."

"왜?"

"그냥. 지내보니 좀 안 맞더라고. 성격 차이라고나 할까."

"무슨 이혼 사유냐?"

"그건 너랑 내가 해야 할 거고. 그러는 너는, 스물세 번째 여친은 어디 두고 혼자 나왔어?"

"스물하나거든? 그리고 아직 안 만들었어."

"왜?"

"그럴 기분 아니라서."

"니가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도 있어?"

"야, 넌 날 뭘로 보는 거냐?"

"말했다간 상처받을 텐데?"

"이미 충분히 받았다…"

성훈은 풀죽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고, 지수에게 걸어갔다.

"너 당장 할 일 있냐?"

"당장은 없는데, 왜?"

그 말을 듣고, 성훈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수의 팔짱을 끼었다.

"그럼 잠깐 나랑 데이트나 하자."

"너 갑자기 왜 이래? 뭐 잘못 먹었어?"

"피차 애인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그러면 약혼자랑 데이트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않냐?"

"뜬금없긴. 전엔 해달라고 해도 안 해줬으면서."

"그땐 내가 여자친구가 있었고."

"결국 난 보험이라 이거네."

"혹은 비상식량?"

"너 진짜 맞는다."

"아까 나도 상처받았으니 쌤쌤인 셈 치자. 응?"

그렇게 말하고 성훈은 웃으며 지수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한숨을 쉬었다.

지수와 성훈이 카페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예약이라도 한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 두 잔과 케이크가 나왔다. 지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괜찮네. 그런데 예약이라도 한 거야?"

"그냥 자주 와서 다들 기억하는 거지."

"지루한 남자 취향 아닌데."

"야, 일단 케이크나 먹어보고 말해라."

지수는 포크로 케이크를 작게 썰어 입 속에 집어넣었다. 얼굴에 금새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성훈을 깨닫고, 금새 표정을 고친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괜찮네, 이 정도면."

"얼굴 보니까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맛있네. 응."

지수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 누구 데리고 오는 건 네가 처음인데."

"진짜? 네 스물 두 명의 여자친구들은…"

"스물이라고 했지? 걔네들에겐 좀 보여주기 아까워서 말야."

"사람들도 많이 다니는 카페 가지고 생색은."

"야, 전 세계 사람들로 따져보면 여기 아는 사람들 비율이 얼마나 되겠냐. 그정도면 생색낼 만 하지."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우린 그럴 수 있잖아."

잠깐 정적이 흘렀다. 지수는 케이크를 작게 잘라 입 속에 집어넣었다. 잠깐 우물거리다가, 삼키고 나서 그녀는 말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성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지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수는 잠깐 그의 눈을 보다가,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할 말 없으면 난 가 볼게. 시간이…"

"잠깐만, 좀."

"너 계속 이러면 나만 힘들어져. 그동안 괴롭힌 걸로는 모자란 거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게 아니니까 이러지!"

성훈이 소리쳤다. 지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얼굴에는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지수는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도, 성훈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지수는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이 뭔데."

"내가 우리 약혼, 뭐라고 말했었더라?"

"집안 사이의 인수합병을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고 했지."

"그래, 그랬지."

그러고 나서도 지훈은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보다 못한 지수가 말했다.

"계속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면 나 진짜 갈거야."

"우리, 진짜가 될 수 있을까?"

"뭐?"

"사랑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는,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관계에 불과한 우리들의 약혼이 진짜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 거야."

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잠깐 보고, 성훈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자신할 수가 없었어.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과 집안의 의사에 의해 강제적으로 맻어지고, 내가 원한다고 깰 수도 없을 약혼자에게 가진 감정이 진짜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만 해. 무슨 이야긴지 알 것 같으니까."

성훈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수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보고, 깜짝 놀라서 앞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수의 얼굴에 가져갔다. 지수는 손수건을 낚아채, 그 눈물을 닦았다.

"생각할 시간을 줘. 나도 내 감정이 진짜인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하고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수건을 손에 꼭 쥔 채.

"오래 기다려야 할까?"

"그건 몰라."

그렇게 말하고 지수는 다시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많잖아."

그 말을 남기고, 지수는 카페에서 나갔다.


유라헬 짱짱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