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꽤 오랫동안 잔 것 같은데, 어쩐지 몸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어두웠다. 아직 새벽인가 싶어서 휴대폰을 켜서 시간을 봤다. 아침 열 시. 한참 밝아야 할 시간인데. 길게 하품을 하고 나는 거실로 나왔다.
베란다 바깥에선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하얀 눈꽃들이 피어 있었다. 한번 청소를 했는지 길가엔 먼지 묻은 눈 무더기들이 쌓여 있었지만, 계속해서 내리는 눈 때문에 길은 여전히 새하얬다.
"일어났니?"
"응…"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내게 엄마가 물컵을 내밀었다. 차가운 물을 한잔 마시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오늘 졸업식, 눈 때문에 취소됐다고 전화 왔었다."
"아, 졸업식…"
문득 초콜릿 생각이 났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서랍을 열어 보았다.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포장지로 감싼 상자가.
살짝 들어 보았다. 그 안에 들어 있을 초콜릿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녀 생각이 났다. 오늘 꼭 주고 싶었는데.
발렌타인이란 날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날이 졸업식과 겹친다고 해도 굳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선물은 결국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고 그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초콜릿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내가 전하는 선물에는 조금이나마 더 특별한 의미가 담기길 바랬다.

눈이 그치면 다시 졸업식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전해주면 되겠지. 특별하진 않아도, 마음은 전달될 것이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나흘이 지나도.
닷새가 되었을 때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폭설 때문에 강당 천장이 무너져 내려서 졸업식을 취소한다고. 졸업장은 나중에 따로 찾아와서 받아 가라는 것이었다.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나는 서랍을 열어 다시 초콜릿 상자를 꺼내 들었다. 전해질 곳이 사라져버린 상자. 의미마저 같이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상자를 서랍 속에 집어넣고 닫았다. 털썩,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 엎드려 머리를 감쌌다. 으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도저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졸업 앨범이 보였다. 졸업식 전날 받았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한참 뒤에야 받을 뻔했다.
별 생각없이 앨범을 펼쳤다. 친구들의 얼굴을 훑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손가락을 살짝 갖다 대어 보았다. 윤승아. 작게 그 이름을 말해 보았다.
페이지를 넘기자 단체 사진이 나왔다. 몇 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찍은 사진. 반 전체가 모여서 찍은 사진. 승아는 언제나 사진 구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용히 떨어져 있었다. 웃고 있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만 같은 하얀 얼굴.

승아와는 특별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승아는 어느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전학 온 첫날부터 그녀의 굳게 다문 입에서는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승아는 조용한 아이였다. 언제나 구석 자리에 앉아 수업 시간에는 말없이 칠판을 보고 있었고 쉬는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교실 밖으로 나갔다. 말을 붙일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눈에 띄는 아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교탁 위에 놓인 시든 꽃병처럼 잊혀지게 되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학년이 절반쯤 지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시내에 갔을 때, 카페를 지나가다가 그 안에서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과 앉아 있는 승아가 보였다. 인사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다.
다음 날 등교해서 친구들과 놀러간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승아가 교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여느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창가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문득 어제 일이 생각나서 그녀에게 갔다. 그리고 말했다.
"어제 시내 갔지?"
승아는 잠깐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았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같이 있던 사람들은 친구야? 아니면…"
그때, 갑자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잠깐, 그렇게 서 있다가,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라고,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가버렸다. 그리고는 점심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일 이후로, 그녀를 둘러싼 상황의 흐름은 미묘하게 바뀌게 되었다. 단순히 의식하지 않는 것이었던 태도는 점점 무시로 변하게 되었다. 대입 문제 때문에 노골적인 괴롭힘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괴롭힘에 가까운 무시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정작 그런 상황을 만드는 발단이 되는 나로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 승아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땐, 황당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했기에 그녀를 험담하거나, 나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녀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는 데 일조했다. 문득 그녀에게도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땐, 흐름은 이미 내 손을 벗어나 있었다.
그래도 막으려는 노력은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내겐 용기가 없었다. 흐름을 돌릴 용기도, 그녀에게 사과할 용기도.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해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결국 그녀의 태도가 상황을 만든 것이기에 내겐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서도, 그녀가 날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고서도 그런 질문을 한 것은 명백하게 내 잘못이었다. 또,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채고서도 용기를 내지 못한 것 또한 내 잘못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앨범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이 나왔다. 하얀 종이에 쓰여져 있는 글자들.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다. 이기적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사과함으로써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세상은 새하얬다. 이 눈은 한동안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숨을 쉬고 다시 앨범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더 볼 일도 없겠지. 졸업은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가버렸고, 대학에 가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중학교 앨범처럼, 이 앨범도 책장에 꽂혀서 먼지만 쌓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한숨을 쉬고, 앨범을 덮으려 했다.
그때, 문득 어떤 글씨가 보였다.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두꺼운 패딩 너머로도 차가운 기운이 새어들어오는 것 같았다. 눈발이 눈 앞을 가렸고, 바람 때문에 우산이 뒤집힐 것 같았다. 후우. 나는 우산을 접고 패딩의 후드를 뒤집어 썼다.
5분도 안 되어서 후회가 들었다. 별로 멀지 않은 곳이라 날씨가 좋지 않아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앨범 마지막 장에는 전교생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쓰여 있었다. 그곳에서 승아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발견했을 땐 정말 기뻤다. 전화를 걸어볼까 했지만, 문자 한번 해본적 없는 사이에 너무 새삼스러운 것 같아 관뒀다. 어차피 선물만 주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고 초콜릿을 챙겨 집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하아. 한숨을 쉬자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왔다.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돌아간다고 생각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걸어와 버렸다.
발은 푹푹 빠졌고 다리에는 감각이 없었다. 찬바람을 너무 맞은 얼굴은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눈이 자꾸 눈 속으로 들어오려 해서 몇 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다. 이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날이 좀 더 풀린 다음 전하러 가도 될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간 오해를 풀 날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나는 문득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우리 집. 들어가면 따뜻한 온기가 날 반기고 있을 것이다. 이불 속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눈 속에라도 파묻히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나중에 사과를 하고 오해를 풀 수 있다고 해도, 그때 전하는 마음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마음과 같을까? 살아가다 보면 유통기한이 지나는 것처럼 마음도 변질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면, 전할 수 없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10분 정도를 더 걸어 승아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녀의 집은 평범한 아파트였다. 로비 안으로 들어가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6층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올라가는 동안 갑자기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승아가 날 반가워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혹은, 나란 인간 자체를 잊었다면?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와 그녀의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이걸 누르는 게 잘 하는 짓일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을 삼켰다. 바깥을 살피는지 잠깐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편한 복장의 승아가 나왔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 안녕. 나 수정인데, 전에 싸운 적 있었잖아. 혹시 기억해?"
"그래서, 기분 나빴으니 사과하라고? 고작 그거 때문에 이 날씨에 집까지 찾아온 거야?"
"그, 그런 거 아냐. 잠깐만…"
나는 품 속에 넣어둔 초콜릿 상자를 꺼내 승아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상자를 받아들었다.
"초콜릿이야. 원래 졸업식 때 주려고 했는데, 눈 때문에… 너무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지금 전해주러 온 거야."
두근거리던 가슴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여전히 놀란 표정인 그녀에게 이어 말했다.
"사과하고 싶었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한 거랑, 이후 내가 잘못했다는 걸 말하지 못한 것도. 그럼, 선물은 전했으니 이만 가 볼게."
나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등 뒤에서 "잠깐만." 이란 소리가 들렸다.
"일기예보에서 저녁쯤에 눈이 그친대. 그때까지만 있다 가."
"그래도 돼? 집에 누구 없어?"
"나, 혼자 살아. 급하게 전학온 거라서."
뜻밖의 제의에 잠깐 고민이 들었다. 사과를 했다고 해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집에 들어가는 게 잘하는 짓일까.
그래도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저 눈보라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더 고민하지 말자.
나는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발렌타인 데이때 구상한 엽편이 어찌 이렇게 오래 걸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