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 승리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증오에 타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굳은 의지가 담긴 얼굴과 날카롭게 갈린 검. 하지만 그 마음가짐에 걸맞은 실력은 없었는지, 그가 휘두르는 검은 어이없을 정도로 무뎠다.
원한다면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피로감이 들었기에, 나는 그의 무기를 뺏고 기절시킨 후 성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가 떠나자 성은 고요해졌다. 방문자를 맞이하기 위한 불빛도 꺼진, 완전한 정적이다. 나는 다시 무료해져서, 그만 잠들었다.

꿈에서 나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풀숲에서 뛰노는 동물이 되기도 했고,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전혀 모르는 세계의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내 삶이 아니었다. 그게 가끔, 슬펐다.
마법사는 내게 꿈을 꾸게 하는 저주를 걸며, 이것이 날 파멸시킬 것이라고 예언하듯 말했다. 이후로도 더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전에 내가 죽었기에 뒷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꿈 때문에 위기를 겪거나 파멸에 가까워진 적은 없다. 도리어 무료함을 달래는데 유용했다. 이러는 내 모습을 보면, 마법사는 날 저주하겠지.

두 번째로 그가 찾아왔을 때 나는 조금 불쾌한 기분이었다. 한참 재밌는 꿈을 꾸던 도중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에도 그의 얼굴에는 나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다. 상관없었다. 익숙한 얼굴이었으니. 이유 따윈 묻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인간들이 할 말이야, 뻔했으니.
이번에도 별 힘들이지 않고 그를 제압했다. 성에는 또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었지. 잠들기 전,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꿈에서도 가끔 진짜 나 자신을 자각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깨어나, 어두운 성 안에 혼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몸이 떨렸다. 내게 두려운 것이라곤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언제부터인지, 성에는 인간들이 찾아오지 않기 시작했다. 성에 있던 마족들은 날 죽이러 오는 인간들에 의해 죽거나, 내게 그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떠났다. 그리고 나는 인간들이 상대하기엔 너무 강했다.
언제부턴가 모든 게 지루해졌다. 내가 꿈속으로 빠져들자, 인간들도 찾아오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랬을까. 어쩌면 생각만큼 길진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직까지 내가 잊혀지지 않은 걸 보면.

세 번째로 그가 찾아왔을 때, 나는 조금 호기심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는 쉽게 제압되었다. 그가 얼마나 강해지든, 내겐 큰 의미가 없었다.
그가 떠나자 다시 성은 색채를 잃었고, 나는 잠들었다. 하지만 곧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고 말았다. 젠장. 꿈에 그가 나타났고, 나는 그 모습을 알아보았다.
문득, 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의 뒤를 밟았다. 이 모습을 선택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가장 경계하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가장 가까운 도시였다. 도시는 기억과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훨씬 커지고, 훨씬 복잡해졌다. 내가 입혔던 피해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거나, 일부 남은 것들이 예술품처럼 전시되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이들에게 난 이렇게나 희미해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는 그를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스러웠다. 도시는 너무 복잡했고, 사람들도 너무 많았다.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원래부터 부모 따윈 없었는데도.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정체를 밝히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귀찮아질 일을 만드는 건 싫었다.

한참동안 도시를 헤매고 다녔다. 이곳저곳에 전시되어 있는 내 흔적들을 보기도 하며, 또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기도 하며. 어떤 모습은 꿈에 나온 것과 비슷하기도 했다.
잠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다. 아름다웠다.
그때, 노을을 등지고 내 앞에 두 남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이 서로 소근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 보니까 쭉 혼자 다니는 것 같더라고. 옷 입는 것 보니 귀족 딸 같은데, 한몫 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대화들.
화려하게 입고 나온 게 실수였나. 그보단 저들을 어떻게 처리할까가 고민이었다. 지금 이 도시 한복판에서 힘을 쓰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납치된 이후 저들만 남았을 때 처리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별로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들이 천천히 걸어오는 동안,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모님은 어디 갔니, 꼬마야?"
익숙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들은 쳇, 하는 소리를 내며 달아나버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그렇게 찾아다니던 그의 모습이 있었다.

그는 날 식당으로 데려갔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나에 대해 묻는 그에게 가짜 이야기들을 했다. 여러 개의 꿈이 뒤섞인 이야기였지만, 왠지 떠들다 보니 그게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 도시에선 유명인사인 것 같았다. 주위에서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좋은 평가는 아닌 것 같았다. 착하고 실력도 있지만, 방향성이 잘못되었다고.
"그러니까 혼자서 여기 여행 온 거란 말이네?"
내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경호원도, 안내자도 없이 혼자서 온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내게 안내자가 되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 모습과 가짜 신분으로 만들어진 삶이었다. 꿈과는 달리 나는 그것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계속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파국은 채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찾아왔다. 내가 그에게, 마왕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본 것 때문이었다.
그는 담담한 말투로 이유를 설명했다. 요점만 말하면 그의 아버지가 마족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죽인 것도 아닌데, 왜 마왕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그 마족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답했다.
성으로 돌아가자 침묵이 날 맞이했다. 문득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로워졌다. 차라리 예전처럼, 모든 걸 부수고 다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꿈을 부쉈는지 깨닫고 말았다. 마법사의 말이 옳았다. 나는 다시 꿈속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내 깨어나고 말았다.

네 번째로 그가 찾아왔을 때, 그의 얼굴에선 증오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경악에 가까운 어떤 표정이 있었다.
그는 거짓말이라고 외쳤고,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비록 가짜였지만, 내겐 그를 기만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의 검이 내 목 끝에 닿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동안 계속해서 승리해왔지만, 이젠 끝이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끝은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검을 늘어뜨린 채 성을 나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도 나는 승리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내가 더 이상 승리할 일도 없을 것이라는 예감. 그리고 나는 이 성에서 영원한 승리를 누릴 것이다.
그가 성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깨어날 수 없는 꿈을 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