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하늘이 흐렸다. 몸을 한껏 웅크린 채로 걷는 사람들에게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코트로 몸을 감싸도 몸이 떨리는, 그런 날이었다.
은행 건물 앞에서 발을 구르며 기다렸다. 손을 입김으로 녹이면서 나는 널 생각했다.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지하철 역에서 올라오는 네가 보였다.
"오랜만이야."
네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어색했다, 네 앞에 서는 건. 잘 익숙해지지 않았다.
"기운 없어 보인다. 어디 아파?"
"아, 아냐, 그런 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런 일 없어. 그냥, 좀 추워서 그런가 봐."
"그래? 그럼 어디 좀 들어가자. 아, 여기 케이크가 괜찮다더라. 인터넷에서 봤어."
그렇게 말하고 너는 카페 쪽을 가리켰다. 나는 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찬란하리만큼 밝게 웃고 있는 네가, 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상관은 없다. 그런 너의 모습까지, 난 좋아했으니.

카페는 따뜻했다. 언 몸이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달콤한 커피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해 창가 쪽에 앉았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커피 두 잔과 케이크 한 개가 나왔다.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달콤했다.
"맛있다."
"그렇지? 평소에는 자리가 잘 안 나는 모양인데, 오늘은 왠일인지 자리가 났네."
너는 웃으며 그렇게 대답해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맞다. 잠깐만, 여기…"
나는 백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너에게 건넸다. 너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와, 고마워. 그런데 갑자기 왠 선물이야?"
"그냥 화장품이야. 써 보니까 좋더라고. 그래서 너도 써 봤으면 싶어서."
"신기하네. 마침 화장품도 거의 다 떨어져서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아무튼 잘됐다. 고마워."
신기할 것도 없었다.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전혀 없었으니. 그만큼 오랫동안 알아 온 사이다.
"아, 너 같은 남자친구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남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너의 말은 무엇보다도 아팠다. 그 말은,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너와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부모님과도, 동네 친구들과도 떨어져 불안해하던 내게 너는 먼저 다가와주었다. 이후로 네가 이끌면 내가 따라간다는 그 구도가 단 한번도 바뀐 적은 없었다. 물론, 그 사실에 불만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널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네가 날 소중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 사실에 서운함을 느낀 적이 없진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나는 네가 좋았으니.

"사실 나, 남친이랑 깨졌어."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네가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부른 거야. 주변 사람들은 나랑 남친이랑 다 친한 사이라서. 그런 사람들을 빼고 나니 가장 먼저 네가 떠오르더라. 그래서 부른 거야."
"그… 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기에 먼저 연락한 거겠지.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동시에 기쁘기도 했다. 너의 옆에 빈자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비록 내가 그 자리에 갈 수 없을진 몰라도, 그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미안, 나 진짜 이기적인 것 같아. 이런 이유로 부르기나 하고."
"아니야. 괜찮아. 이런 때니까 친구가 필요한 거잖아."
"고마워. 정말 너밖에 없다."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이런 네 말 한마디에 기뻐하는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너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매일매일 밤이 되면 기숙사 방에서 애인과 있었던 일을 즐거운 듯 말해주는 너에게서,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먼 거리감을 느꼈다.
싸우기도 했다. 네 애인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네가 해주는 이야기들을 시시하다는 척 넘겨버릴 때. 이건 명백한 질투였다. 하지만 너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어쩌면 넌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이야기를 함으로써, 내가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선을 만들려고 한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당연한 결과지만, 내 마음은 너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네가 날 그 정도로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내게 애인이 생겼을 때도 그랬다. 넌 날 축하해주기만 했지, 내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한 절대로 물어보지 않았다. 그게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걸 깨닫고, 지쳐서 헤어졌을 때도, 너는 단지 위로해주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네게 친구 이상은 아니었다. 너는 내게 친구 이상이 될 수 없었다.

"혹시 너도 사귀는 사람 있어?"
네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났다는 듯 너는 말했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있었지만, 그걸 너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어머, 왜? 남자들이 대쉬 안 해?"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말을 흐렸다.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네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럼… 아, 혹시 걔 때문에 그래?"
"누구?"
"그 있잖아. 네가 고등학교 때 사귄 애. 괜찮았던데. 아직도 못 잊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사실 지금은, 그 애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렸다. 너 말고는,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게, 어린애도 아닌데. 나도 빨리 잊어버려야겠다."
그렇게 말하고, 너는 쓸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쓴맛 때문에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니 좋다. 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그러게,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너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지금 그 때 일들을 왜 이야기하는 걸까.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시험이 끝나고, 너와 방에서 밤이 새도록 이야기 했을 때가 떠올랐다. 둥글게 빛나는 달빛만이 새어들어오는 밤. 침대에 누워 우리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두운 방이 마음에 들었던 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네 말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숨기지 않고 어떤 표정이든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네가 해주는 말들은 언제나 상냥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아마 네가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네가 아무리 둔하다 해도 내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
이야기가 갑자기 끊기고, 네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득, 잠든 얼굴이 보고 싶어서, 네 침대 옆으로 갔다.
달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너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어도 참 예뻤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고, 또 슬퍼지는 얼굴이었다.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너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때, 너의 입에서 신음하듯 내 이름이 빠져나왔다. 나는 놀라서 급히 몸을 뺐다. 설마, 들켰을까. 한참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나는 네가 여전히 잠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누워서도 한참을 생각해야만 했다. 네가 흘린 내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지.

전화가 울렸다. 너는 "잠깐만." 하고 말하며 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액정을 확인한 순간, 네 얼굴이 굳었다.
"왜 그래?"
"아, 아냐.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그렇게 말하고 넌 휴대폰을 들고 다급히 카페 밖으로 나갔다.
창밖으로 네 모습이 보였다. 하얀 김을 내뱉으며 이야기하는 너. 얼굴 표정은 기뻐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네 목소리가 들릴까 창문에 귀를 대어 본다.
사실은 알고 있다. 아주 짧은 순간, 네 휴대폰 액정에서 본 그 이름. 남자의 이름처럼 보이는. 그리고 너의 반응과, 네가 저 바깥에서 짓는 표정을 종합해보면 그게 누군지는, 뻔하다.
나는 문득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너에게 고백하려고 했던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고 너에게 다가갈 때마다, 너는 언제나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날 맞아줬다. 그것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터질 것만 같아서, 꼭 너에게 고백하고 말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편지도 준비하고, 거울을 보며 고백할 말까지 연습했다. 그리고 네가 오길 기다렸다.
방에 들어온 네게, 나는 고백하려 했다. 하지만 너는 들어오자마자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백을 삼키고 축하를 하는 것 뿐이었다.
이후로도 몇 번, 고백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무언가가 날 막았다. 그게 반복되고, 결국 너와 나의 거리는 멀어져 버렸다.
내가 다가가려고 하면 너는 언제나 도망쳐 버렸다. 너는 언제나 내게서 멀리 앞서나가 있었다. 그런 널 따라잡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온 너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앉아서도, 한참을 생각에 잠긴 듯 휴대폰만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런 너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전화였어?"
내가 말하자, 너는 그제서야 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듯 몸을 떨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너는 휴대폰을 백 속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 지금 급히 좀 가 봐야 할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괜찮아. 급하면 빨리 가 봐."
"내가 부른 거였는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아, 계산은 내가 할게."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걸어간다. 계산을 마치고 카페 밖으로 나가는 너를, 나는 못박힌 듯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멀어지는 네 등이 마치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어디로 가는 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발자국이 남았을 텐데.
내게 남은 네 흔적은, 이제는 김이 오르지 않는 커피 잔 하나뿐이다. 나는 팔을 뻗어 그것을 감싸쥐어 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미지근한 커피 잔에선 너의 온도 따윈 전혀 느낄 수 없었다.


4971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