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만 잡고 자도 된다고?!

내 앞에 나타난, 자신이 내 딸이라고 말하는 소녀를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난 그럴 만한 짓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그랬다. 그야말로 지성의 화신이신 이 몸은 아이작 뉴턴을 존경하기에 평생을 번식행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딸이라니? 그것도 열두 살은 되어 보이는?
“아빠… 이렇게 매정하게 또 절 버리시는 건가요?”
자임은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순간, 주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반 친구 놈들이 전부 다 날 노려보고 있었다.
“사고 친 것도 모자라서, 이젠 딸을 버리기까지 한다고?”
“저런 천하에 몹쓸 것이…”
“저 놈의 피는 무슨 색일지 궁금하지 않니, 얘들아?”
“자, 자자자자잠깐! 오해다! 애초에 나한테 이렇게 큰 딸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아이들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손에 30cm 자나 컴퍼스 같은 무기들을 들고 내게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자로 나빴어… 분명히 우리 둘이 함께 자서 생긴 아이잖아…”
세연도 비난하는 투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분명히 우리는 손만 잡고 잤는데…”
“순진한 세연이를 그런 식으로 속이다니, 더 나쁜 놈이군.”
“맞아, 친구라서 봐주고 있었는데, 그런 흑심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으아아아!”
내가 전투의 함성을 지르자 순간 날 둘러싼 아이들 사이로 틈이 생겼다. 기회다! 난 그 사이로 도망쳤다. 등 뒤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저놈 잡아라!”
“천하의 역적이 도망친다!”
“아빠, 어디가!”
“여보, 같이 가!”
그러니까 아니라고! 젠장!

겨우 도망쳐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 7단 MD 방어체계를 가동했다. 놈들이 쳐들어오려는 시도를 하는 순간 후춧가루부터 바나나 껍질까지 다양한 함정들이 가동해 놈들을 막을 것이다. 티거 탱크라도 이 집을 뚫고 올 수는 없겠지. 후우, 나는 한숨을 돌렸다.
“진자로 군, 있나요?”
그때 인터폰이 울리며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보니 하나봄 선배의 목소리인 모양이었다.
“지금 비상 대피 체제입니다. 외적의 침입이 우려되기 때문에 아무도 들여보낼 수 없…”
“괜찮아요. 그들은 전부 다 제가 설득해서 돌려보냈어요.”
정말인가? 감시탑을 통해 내다보니 그 말대로 아이들은 없었다. 트로이의 목마일 수도 있지만, 나봄 선배가 그렇게 될 사람은 아니다. 나는 방어 체제를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나봄 선배, 세연, 자임이 동시에 들어왔다.
“야, 꼬맹이! 넌 왜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는 거야!”
“왜 그래, 자로야. 아빠는 자식을 잘 보살펴야지.”
세연의 조근조근한 말투에 압도되었다. 자임은 세연의 등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혀를 내밀고 있었다. 저 자식이…
“그보다, 상황 설명을 듣도록 하죠. 지금은 자로 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규명하는 게 먼저니까요.”

“그러니까 분명 전날 자로 군과 세연 양은 손만 잡고 잤을 뿐인데, 다음 날 갑자기 이 아이가 생겨난 거라고요?”
“네, 진짜에요.”
“정말 손만 잡고 잔 거 맞나요?”
“확실합니다!”
“그런데 왜 그게 이상하단 거예요, 선배? 원래 아기는 남자와 여자가 손만 잡고 자면 황새가 물어다주는 거 아니었나요?”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죠.”
“자로에게요.”
나봄 선배는 날 노려보았다. 으윽.
“그건 곤란한 상황을 넘기려고…”
“상황은 이해했어요. 하지만 언젠가 세연 양에게도 제대로 된 성교육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고 나봄 선배는 한숨을 쉬었다. 후, 결국 내 탓이라 이건가.
“그건 그렇다 치고. 일단 검사를 좀 해봐야겠네요.”
“검사요?”
“자임 양이 진짜 자로 군의 딸이 맞는지, 또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검사해야겠다는 의미죠. 자, 여기 기구를 가져왔으니 잠깐이면 될 겁니다.”
나봄 선배는 들고 온 커다란 가방을 열었다. 거기에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주사기를 비롯한 이상한 도구들이 있었다.
“이, 이걸 진짜 제 팔에 찌르겠다고요?”
“과학을 위해서예요. 그렇게 아프진 않을 거예요.”
“아니, 잠깐. 그 말은 일단 아프다는 의미… 으아아악!”

“일단 자임 양은 자로 군의 자식이 맞네요. 유전자 검사 결과가 일치합니다.”
“이제 인정하는 거지, 아빠?”
자임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낀 채로 날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어떻게 손만 잡고 잤는데 아이가 생길 수 있는 거죠? 이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그건 아마 최근에 서울특별자치국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허시 때문인 것 같군요.”
“허시…요?”
자봄 선배는 설명을 해줬다. 허시는 일종의 이상현상으로, 어떤 개인의 심리상태에 이상이 생겼을 때 주위 세계의 법칙을 부분적으로 바꾸는 규칙이라고.
“그러면 그 허시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된 거라고요?”
“네. 아마 손만 잡고 자면 아기가 생기는 허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마 자로 군이 자초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충격적이었다. 내가 한 거짓말이 진실이 되다니.
“아무튼 그렇네요. 나머지는 가족들끼리 잘 해결해 보세요. 그럼 전 이만.”
“자, 잠깐만요!”
내 절규에도 자봄 선배는 집 밖으로 바로 나가 버렸다.

“이걸 어쩌지…”
지금 우리 집에서 뛰어놀고 있는 자임과, 남편에게 밥을 해준답시고 요리를 하고 있는 세연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 따위 만들지 않겠다고 했건만, 뉴턴이시여,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계율을 깨 버렸습니다. 저는 이제 과학의 길을 포기해야…
“여보! 밥 먹자.”
“아빠! 밥 먹어!”
“니들끼리 먹어라…”
나는 머리를 싸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세연이 다가와서 말했다.
“화목한 가족은 저녁식사도 같이 해야 해. 같이 밥 먹자, 여보.”
“먼저 먹으라고 했지!”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세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미안. 아무튼 지금은 좀 혼란스러우니까 가만히 좀 놔둬 줘, 제발.”
“…알았어.”
세연은 혼자 식탁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식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무서워… 엄마가 더 좋아.”
자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 젠장. 내가 이런 꼴이라니.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
“시끄러…”
아침이 되자 자명종이 울려서 나는 그것을 집어던졌다. 그런데 내 목소리 뭔가 이상했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으아암…”
기지개를 켜는데 왠지 몸이 무거웠다. 어제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가…
일단 샤워부터 해야겠다 싶어서 나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에 어떤 여자가 있었다.
“꺄악! 죄송합니다!”
나는 재빨리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그 여자는 검은색 단발머리였는데, 우리 집에 그런 여자가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그곳에는 거울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날 보고 착각했다는…
잠깐. 이게 무슨 뜻이지?
나는 다시 문을 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그 곳에는 어떤 여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건 말이 안 된다. 거울 속에 비치는 상은 당연히 나이기 때문… 그렇다면, 결론은…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자로야, 왜 그래!”
나는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충격 때문에 엉덩이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내가 왜 여자가 된 거야?
“세, 세연아.”
욕실 입구에서 세연이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응, 자로야. 왜 그래?”
“아, 아니. 지금 나 어디 이상하지 않아?”
“어디가? 다 잘 된 거 같은데.”
“뭐라고?”
그리고 나는 세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간단했다. 자임이가 아빠는 무섭고 엄마가 좋다고 해서, 아빠를 엄마로 바꿔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기는 손만 잡고 자면 생기니 상관없다면서.
“야, 너 그게 말이 된다고…”
“화목한 가정이 되려면 아이가 행복해야 해.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자임아! 엄마 보러 와!”
…이건 말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