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문제

사무소로 가는 길은 맑았다. 문득 빌딩을 올려다보니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이 눈부셨다. 규리 씨는 왜 날 불렀을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길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나는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규리 씨는 햇빛에 감싸여 서류를 읽고 있었다.
“어, 왔어?”
규리 씨가 이쪽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일단 앉아.”
나는 근처 소파에 앉았다. 규리 씨는 의자를 이쪽으로 돌리고는 말했다.
“너, 민아라는 애 알지?”
“고등학교 때 친구였죠. 그런데, 규리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건 알 필요 없고. 너, 최근 민아에게서 뭐 이상한 점 못 느꼈어?”
“글쎄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아팠다는 거 같던데요. 강의에도 안 나왔고요.”
“또?”
“그리고… 잘 모르겠는데, 이후 살짝 무언가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네요. 그 정도?”
“흐음.”
규리 씨는 팔짱을 끼고는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요?”
“일단 거기 있는 서류 좀 읽어 봐.”
나는 탁자 위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 첫 페이지에는 민아의 얼굴이 찍힌 사진과 함께 간단한 신상 정보가 씌어져 있었다. 예전에도 이런 서류를 본 적이 있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설마….”
“맞아. 현재 시점에서 살아있는 민아는, 인형이야.”
“언제부터 민아가 인형이었던 거죠? 그리고 어떻게?”
“중학생 때부터. 자세한 사항은 내가 준 서류에 있을 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형이었네요….”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있는 건 아니지. 그보다는 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 말하세요.”
“어제, 혹은 오늘, 네가 만났을 민아는 그 전의 민아와는 다른 사람이야.”
“그 말은….”
“맞아. 민아는 최근에 한 번 더 자살했어.”
그러고 보니, 민아가 결석하고 며칠 그런 소문이 돌았던 기억이 났다.
“아팠다는 이야기는요?”
“그건 내가 주의를 돌리기 위해 가짜 정보를 끼워 둔 거였어.”
“그랬군요.”
얼마 뒤 민아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돌아왔기에, 그런 일이 있었던 거라고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점이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서론은 그 정도로 됐고, 아무튼 내가 알고 싶은 건 민아가 자살한 이유야."
“그건 왜요?”
“매번 인형을 새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민아가 자살한 원인을 찾아내서, 그걸 없애야 하지 않겠어?”
“우울증 같은 거 아닐까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살한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였다면 너한테 맡기지도 않았겠지. 민아가 처음 자살한 이유도 그거였고, 그 때문에 처음 인형을 만들 때 그런 감정은 느끼지도 못하도록 조정되었어. 그러니 파악이 안 되는 거야.”
가끔 조증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밝은 모습을 보였던 건, 그 때문이었나.
“그렇군요. 그런데 인형을 새로 만들었다는 건 민아의 의식에 간섭할 수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요?”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건 단순한 패턴이야. 그걸 해석하는 데는 결국 개인의 주관이 개입되어야 하니까, 기억을 읽어내는 건 불가능해.”
“어렵네요.”
사실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튼 저는 민아가 자살한 이유를 알아내면 된다, 이거죠?”
“그래. 내가 줄 수 있는 자료는 전부 다 그 서류에 정리되어 있을 거야.”
“그냥 규리 씨가 직접 하시지….”
“그러고 싶은데,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
“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가라앉아 있었다. 결국엔 일 이야기였나. 하긴, 규리 씨가 날 부를 만한 이유가 그렇게 많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서류를 읽어보았다. 첫 페이지에는 기본적인 프로필이 있었다. 나이, 몸무게와 키, 부모님이 사는 곳과 현재 거주지. 아는 부분들은 대충 넘겼다. 그러자 민아가 처음 자살했을 때의 이야기가 나왔다.
민아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자살했다. 원인은 우울증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욕조 안에서 핏물에 잠긴 채 발견되었으며 병원에 갔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하지만 민아의 부모님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했고, 그 때문에 규리 씨에게 의뢰해서 민아의 복제 인형을 만든 것이었다.
민아의 과거 기억은 남아 있는 자료에 끼워 맞춰 새로 만들어졌고, 우울증과 관련된 기억들은 지워졌다. 또 그런 류의 부정적인 감정은 잘 느끼지 못하도록 감정의 피치가 조정되었다.
문득 고등학교 때의 민아가 떠올랐다. 언제나 밝게 지내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나. 그녀가 한번이라도 웃지 않았던 때는 없던 것 같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어쩌면 좀 더 친했던 사람들은 다른 모습을 알지도 모르지만, 왠지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민아는 병원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으로 처리되었다. 배후에는 규리 씨의 기억 조작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중학교 2학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오다가 3일 전 또다시 자살한 것이다.
서류를 내려놓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무엇이 민아를 자살하게 만들었는가. 일반적인 이유는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문제니까. 부정적이지 않은 이유를 찾아야 한다.
자살에 부정적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자신의 이상을 위해 몸을 던지는 종류의 자살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작 알아챘을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

민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강의를 들었다. 여전히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민아는 자살 같은 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 모습은, 예전과 약간 달랐다. 크게 변한 건 없었다. 의식하지 않고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전체적으로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살 전이 중학생이라면, 이젠 진짜 대학생이 된 느낌. 새로 몸을 만들면서 규리 씨가 조정을 했을 것이다.
강의가 끝나고 민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별 일 없었어?'
'무슨 일?'
'며칠 안 나왔잖아. 왜 그랬나 싶어서.'
'아, 좀 아팠어. 걱정했어?'
규리 씨가 어떻게 공백을 메웠나 궁금했는데, 이렇게 했던 모양이다.
'조금. 지금은 괜찮아?'
'응. 다 나은 거 같아.'
'다행이네.'
'진짜 오랜만에 문자하는 거 같다.'
'그랬나?'
'그랬어.'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졸업 후 민아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서로 바쁘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도 있겠지.
'뭐, 그러면 앞으로 자주 하면 되지. 그럼 이만.'
'알았어, 즐거웠어.'
뭐가 즐거웠다는 걸까. 어쨌거나 이번 대화에서는 별 정보는 얻지 못한 거 같다. 평상시의 민아와 별로 차이가 없었으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합법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민아의 흔적을 뒤져보기로 했다.
시작은 SNS. 타임라인을 거슬러가며 기록들을 읽는다.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 가서 찍은 사진이나, 먹었던 음식 사진, 혹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찍은 일상의 단편들이 짤막한 글과 함께 올라와 있었다.
역시 눈에 띄게 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다. 감정의 기복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보통 여자애라면 누구나 가질만한 기복이다. 아니, 약한 편이다. 규리 씨가 민아의 감정을 조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한 시점 근처를 뒤져봐도, 딱히 그 이유로 추측되는 글은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좋다, 마카롱이 맛있었다, 키가 좀 컸으면 좋겠다, 술집에서 민증 검사를 했다, 아이돌 그룹의 누가 좋다, 정도의 글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살할 수 있을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다음 차례는 블로그. 규리 씨의 서류에 있는 메일주소를 입력한다. 프로필 란에는 고등학생 시절 민아의 얼굴을 약간 덧칠한 사진이 있었다. 이렇게 보니 조금 인형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는 변하지 않는 민아의 모습이 신기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인형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니, 그때는 인형이란 것 자체를 몰랐다.
블로그는 갱신된 지 조금 오래된 것 같았다. SNS를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을 보니, 옮겨간 이후 딱히 폐쇄하지 않고 남겨둔 모양이었다. 박제된 기록, 조사하기엔 꽤 좋은 환경이었다.
시간을 거슬러가며 포스트를 읽어간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도 있었다. 딱히 별다른 이야기는 없는, 일기장 같은 느낌이었다. 모의고사를 망쳐서 다음번에는 더 잘 쳤으면 좋겠다거나,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거나, 급식이 맛없었다거나, 길을 걷다가 중학생으로 오해받았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들. 가끔 읽은 책들이나, 음반, 영화에 대한 감상도 있었다.
그 모두가 내가 아는 민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얻을 정보는 없다는 의미였다. 중학생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려다, 더 이상 하는 건 시간낭비라는 느낌이 들어 그만두었다.

규리 씨의 사무소는 학교 근처 빌딩의 펜트하우스에 있었다. 고층 빌딩이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중간중간 멈추는 일이 많았다.
사무소로 들어가는 순간 밖으로 나오는 규리 씨와 마주쳤다.
“어디 가세요?”
“현장 조사, 할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
"물어볼 게 있어서요."
“다음에 물어보면 안 될까? 지금 급히 가야할 곳이 있는데.”
규리 씨의 등 뒤에서 수연 씨가 나타나며 말했다.
“수연 씨도 있었네요.”
“응. 오랜만이야.”
“정말 급한 일인가 보네요.”
수연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에서 물러났다. 규리 씨는 내 앞을 지나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저, 규리 씨.”
엘리베이터가 오기까진 시간이 좀 있다. 규리 씨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휴대폰 좀 들고 다니면 안 돼요? 이럴 때마다 정말 불편해서….”
“미안. 하지만 싫어하는 거, 알잖아.”
그 말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나는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수연 씨는 형사였다. 심각한 사건이 있으면 규리 씨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다. 무슨 일일까. 최근 그럴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가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저 서류들을 읽고 있었지. 나는 그곳으로 가보았다. 서류들은 전부 프로필이었다. 민아의 프로필처럼 규리 씨가 만든 인형들의 프로필. 대충 봐도 스무 명이 넘었는데, 왠지 눈에 익은 이름들이었다. 어디에서 봤던 걸까.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사건이 그렇게 걸리는지 떠올리려 노력해봤다. 알 것 같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돌아가서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어?”
그리고 나는 그 앞에 서 있던 민아를 보고 잠깐, 흠칫했다.
“류월이네. 근데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니. 그냥 신기해서.”
그녀는 어께를 으쓱해보았다.
“아까 문자했는데 갑자기 만났잖아. 그게 신기해서.”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웃고 있었다. 가슴 한 구석이 쿡쿡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이유?”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아냐. 별거 아닌가 보네."
내가 그녀의 뒤를 캐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걸까? 아니, 그럴 만한 증거는 전혀 남기지 않았다. 과민반응일 것이다.
"어디 갔다가 온 거야? 보니까 꽤 높은데 갔던 거 같은데."
"최상층에 있는 사무소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 넌?"
"어, 여기 학원에 다녀."
"학원?"
"응. 따로 공부하는 게 좀 있어서."
"그렇구나."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가 봐야겠네."
"응."
"열심히 해."
나는 민아에게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빌딩 밖으로 나왔다.
학원에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SNS에도 딱히 그런 이야기는 없었고. 하지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딱히 납득가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언제나 성실했으니.

불법침입이라도 하지 않는 한, 내가 정보를 찾아낼 만한 곳은 역시 블로그 밖에 없었다. 민아가 우울증에 걸린 이유를 찾아낸다면 문제의 근원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상관없다고는 하지만, 단서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어제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점에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갔다. 민아가 자살한 시점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무렵. 나에게는 별 기억이 남아있지 않는 시기다.
그 시점 근처의 포스트를 읽어보았다. 당연히 자살한 날의 포스트는 없었다. 쓰지 않은 걸까, 삭제된 걸까. 그 전으로는 꽤 우울한 내용의 포스트가 포진하고 있었다. 자살을 암시하는 가사나, 혹은 기괴한 전자음의 음악들이 우울한 사진과 함께 올라오거나, 단문으로 우울한 문장들을 써놓기도 했다. 사춘기 여자애 특유의 소녀 감성이랄까. 내가 아는 민아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어색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있어도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기에 우울증의 이유는 찾기가 힘들었다. 그 시기의 민아 본인이나, 주변 환경을 알고 있다면 연결이 가능하겠지만, 그 자체로는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정보였다.
자살한 시점 이후 첫 포스트는 꽤 날짜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마 인형을 만드는 동안의 공백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 포스트의 분위기는 이전의 어두운 감성 따윈 전부 잊었다는 듯 밝았다. 별 고민이 없어 보였다고나 할까. 그건 내가 아는 민아의 모습과 거의 비슷했다.
새로 만들어진 민아는 예전 포스트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단절에 위화감을 느꼈을까, 쓸데없는 고민이 너무 많았다고 생각하며 넘겼을까. 민아의 성격상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다.

결국에는 불법 침입을 하고 말았다.
아침 강의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민아가 사는 아파트로 갔다. 그녀가 일기를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그런 게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30분이었다. 물론 다른 변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도어락은 비밀번호로 되어 있었다. 나는 프로필에 써져 있던 비밀번호를 눌렀다. 4, 2, 5, 9. 그러고 보니 민아의 몸무게는 42킬로고 키는 159센티이다. 무슨 관계가 있을까?
민아의 집은 생각보다 살풍경했다. 으레 여자애의 집이라면 기대할 만한 것과는 좀 먼 풍경이었다. 내가 아는 민아와는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방 두개에 거실이 있는 작은 아파트였다. 방 하나는 옷을 두는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침실이었다. 거실에 있는 탁자 위에는 신문이 놓여 있었다. 펼쳐져 있는 페이지에는 연쇄살인 기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인터넷에서도 비슷한 기사를 본 것 같았다. 요즘은 안심하기 힘든 세상이니까.
아무래도 일기장 같은 건 보통 침실이나 서재에 있겠지. 침실에는 침대와 책상, 그리고 작은 책장이 있었다. 책장에는 일기장처럼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냥 전공 책과 소설책 몇 권, 음반 몇 개가 꽂혀 있을 뿐이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사진 앨범이 하나 있었다. 혹시 단서가 될 지도 모른다. 나는 앨범을 꺼내 펼쳐보았다.
앨범에는 가족들,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위화감이 들었다. 민아의 주변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 가는데, 민아만은 박제된 듯 그대로였다. 그녀가 인형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또 느낌이 달랐다.
변하지 않는다. 민아는 언제나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 말에는 어쩌면 변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도 들어있지 않았을까?
휴대폰이 진동했다. 강의 끝나는 시간에 맞춰 두었는데, 나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앨범을 접어 제자리에 넣었다.
문 밖으로 나가자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커지는 걸 보니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도 계단을 올라갔다. 혹시라도 올라오는 사람이 민아라면, 마주쳤다간 곤란해질지도 모르니까. 몇 층을 더 올라가고 난 후, 엘리베이터를 잡아 1층으로 내려갔다.
나가는 길에 아파트를 돌아보니 민아가 베란다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게 보였다. 순간 민아가 이쪽을 돌아본 것 같았다.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는 아니겠지만,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민아가 무언가를 보았을 것 같아 조금 불안했다. 오후 강의에서 보인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태연해 보였지만, 드러내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강의가 끝나고 문자를 보냈다.
‘무슨 일 있어?’
‘응? 무슨 말이야?’
‘아니, 그냥 좀 그래 보여서.’
‘그랬나? 아무튼 별 일 없었어.’
다행이도 눈치 채진 못한 것 같았다.
학교에서 나와 규리 씨의 사무소로 갔다. 사무소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 어지간히도 바쁜가 보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서류들이 널려 있었다. 어제 본 것과는 이름들이 약간 달랐지만. 그런데, 어쩐지 눈에 익은 이름들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소파에 앉아서 잠깐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내가 그런 이름들을 보게 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그러다 문득 그 이름을 어디서 보았는지 깨달았다. 민아의 집에 놓여있던 신문에서 본 살인사건의 피해자 이름이었다.
저 서류들은 규리 씨가 만든 인형들에 대한 자료였다. 첫 장에 찍혀있는 사진을 보아도 그건 명백했다. 그렇다면 연쇄살인의 피해자는 인형이고, 규리 씨는 그 사건들의 범인을 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연 씨가 함께 행동하는 걸 보면,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그런 사건이 있으니, 나에게 이 일을 맡긴 걸까.
사무소에서 나오는 길에, 문득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니. 아마 내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겠지. 나는 언제쯤에야 규리 씨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인정받을 수 있긴 할까. 영원히 이렇게,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위치에서 애매하게 남아있는 게 아닐까.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또 의외의 인물과 만나게 되었다.
"또 만나네."
민아는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러게. 신기하네."
"오늘도 사무소?"
"어. 너는 학원?"
"응."
"바쁘겠네."
사실은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민아의 집에 들어간 기억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아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좀 늦게 시작해. 너는?"
"아, 나도 바쁘진 않은데…."
"잘 됐네! 그럼 잠깐만 시간 좀 내주라."
양손을 짝 부딪치며 말하는 민아의 모습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평소에 보던 모습이었는데, 왜일까.

"여긴 처음 와보는 거 같다."
"사무소에서 일하는 거 아니었어? 자주 지나쳤을 텐데."
"그건 그런데… 그냥, 올 생각이 안 들었나봐."
"신기하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날 쳐다보았다. 나로서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실 빌딩을 들어오면서 몇 번 본 적이 있긴 했다. 우글거리는 사람들, 유리벽을 뚫고 나오는 음악과 목소리들이 섞인 노이즈.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달콤한 커피 향. 그런 것들 때문에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류월아?"
민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 미안."
"정신없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도 코코아를 한입 마셨다. 달콤했다.
"이런 데서 대화가 될까? 이렇게 시끄러운데."
"뭐, 다들 괜찮으니까 그렇겠지? 우리도 별로 안 불편하잖아."
그건 그랬다.
"학원에서는 뭘 배우는데?"
"응? 아, 영어. 너도 알잖아. 나 영어 약한 거."
별로 그렇진 않았던 거 같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네."
"다들 그러잖아. 별 수 없지."
묘하게 비난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학원 시간은…."
"한참 남았어. 아,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어떤 거?"
"무슨 일 있냐는 문자는 왜 보낸 거야?"
"어…."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멍해졌다.
"그냥… 요즘 불안한 일들 많잖아. 그런 것 때문에."
"어떤 일?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연쇄살인 사건 같은 거.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실수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하지만 침착하자. 아직까진 일상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아… 그게, 워낙 유명한 사건이잖아. 신문에도 나왔고."
"그 말 듣고 보니 본 거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말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지? 당혹스러웠다.
"아, 그냥 오늘 보니 좀 안 좋아 보였던 게 혹시 그런 사건이랑 관련이 있나 싶어서."
"어제 잠이 안 와서 별로 못 잤었거든. 뭐, 그런 기사들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렇게 말하고 민아는 생긋 웃었다. 그럭저럭 넘어간 건가. 정말 죽을 뻔했다.
"아, 맞다."
민아는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질문할 거 있었는데, 깜빡했다. 그럼 먼저 가볼게, 미안."
그렇게 말하고 민아는 카페 밖으로 나갔다. 끝났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나도 빌딩 로비 쪽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었다. 올라간 지 얼마 안 됐으니 민아가 탄 엘리베이터일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올라가다가, 꽤 높은 층수에서 멈췄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 빌딩을 올려다봤다. 민아가 탄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에는 영어 학원 간판이 걸려 있었다. 확인하고 나자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모인 단서들을 하나로 연결할 만한 고리가 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족했다. 하나의 결론이 나올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래서야 규리 씨를 볼 면목이 없다.
그 연쇄살인과 민아의 자살을 이을 연결고리가 있을까? 사실 그것이 자살이 아니라, 자살처럼 꾸며진 살인이라던가? 하지만 그건 지나친 비약인 것 같다. 무엇보다, 민아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규리 씨와 나, 둘 뿐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에게 일을 맡길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모르겠다….”
정보가 더 필요했다. 어쩌면 새로 얻은 정보들과 함께 블로그의 글을 읽으면 무언가 다른 것들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민아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창의 로딩이 끝나니 블로그가 폐쇄되었다는 글귀가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 있던 블로그다. 그런데, 왜?
문득 어떤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그녀에 대해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것이다. 오늘 카페에서 그녀와 한 대화도, 어쩌면 그런 것 때문에 날 떠보려 한 걸지도 모르겠다. 내일 규리 씨에게 도와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민아는 무언가 자신의 뒤를 쫓을 만한 게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텐데. 다른 무언가가 그녀를 불안하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신문이 떠올랐다. 정말로 그 사건을 의식하는 걸까.
그때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꽤 늦은 시간이었다. 이런 때 찾아올 만한 사람이 있나? 전도사라도 이런 때에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한참을 무시하고 있어도 초인종은 계속해서 울렸다. 딩동, 딩동, 딩동.
“누구세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초인종만 울려댈 뿐이었다. 이러다간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 지도 모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바깥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전혀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민아였다. 그런데 왜? 일단 문을 열었다.
“웬일이야? 전화도 안 하고….”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걸 구체화하기도 전에 내 목에 무언가가 닿았고 동시에 의식이 암전되었다.

머리가 아팠다. 어딘가에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지끈거렸다. 멍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강제적으로 의식에 공백이 생겨난 것 같았다.
종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떴다. 책상 앞에 민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읽고 있는 건….
“안녕?”
소리를 들었는지 민아가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건, 민아가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손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테이프 같은 걸로 묶여있는 것 같았다. 말을 하려 했으나, 입에도 붙어 있었다.
민아는 다시 프로필을 읽기 시작했다. 저것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상세하게도 조사했네. 우와, 이런 건 어떻게 다 알아낸 거야? 신체 사이즈도 있네?”
민아는 약간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저런 식으로도 말할 줄 알았던가? 그 속에 섞여있는 위협적인 뉘앙스가 낯설었다.
민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고 화면을 내 눈 앞에 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도 온 적 있었지?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
휴대폰의 화면에는, 그녀의 집을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요즘 좀 불안한 일이 있어서 CCTV를 설치해 뒀었거든. 그런데 나한테 뭘 원해서 이렇게 가택침입까지 하는 걸까?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고, 민아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위협적인 푸른 불꽃이 튀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스턴 건이야. 내가 테이프를 떼고 나서 소리라도 지르려 들면 당장 작동시킬 거니까, 그런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들고 있던 스턴 건을 내 목에 대었다. 섬뜩했다.
“솔직히 말해. 너, 인형 살해자랑 무슨 관계야?”
순간 멍해졌다. 그 말이 의미하는 건… 하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테이프를 떼었다.
“알고… 있는 거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민아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어? 와. 아무리 내가 인형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친구한테 이럴 수 있어? 이런 애인지 몰랐는데, 실망이야."
"아, 아니. 그게…."
"아무튼 빨리 경찰에 신고해야겠다. 본거지는 어디야? 공범은….”
“내가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라니까…."
민아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다가 날 노려보며 말했다.
"그게 아니면?
"내 말은… 네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냐는 의미였어.”
그러자 민아는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네가 그걸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알고 있었어. 오래 전부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냥,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몇 가지 틈새들을 조사하다가 깨닫게 되었다고만 해둘게. 그런데, 내 질문에는 대답 안 할 거야?”
“뭐? 아, 아냐. 누군가 인형을 죽이고 있다는 것도 어제 알았어.”
“그럼 이 서류는 뭔데? 그 빌딩 옥상에 있던 사무소에 널려있던 다른 희생자들에 대한 서류는? 우리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이유는? 도대체 나한테서 뭘 원해서, 이런 짓들을 한 건데?"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는 건데… 아니, 그보다 학원 간 거 아니었어?"
"의심받을까봐 중간에 내린 다음 걸어서 올라간 거야. 아무튼,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널 경찰에 넘길 거야. 지금 걸린 것만 해도 충분할걸? 주거침입에, 사생활 침해에, 또….”
이렇게 날카로운 민아의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쩌면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할게. 그런데 어디서부터 할까?"
"우선 내 뒤를 쫓은 이유를 말해."
"규리 씨에게 받은 일 때문이었어."
"무슨 일?"
"그게…."
말하기가 주저되었다. 그러자 민아는 스턴 건을 더 세게 밀었다.
"말해."
"네가 자살한 이유를 알아내라는 일이었어."
민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는 안 되지만, 알았어. 그러면 그 사무소는 뭐지? 너랑은 무슨 상관이고?"
"규리 씨의 사무소야. 나는 고용인이고."
"규리 씨는 누군데?"
"그 사무소의 주인이야. 인형사이기도 하고."
"그 말은…."
민아는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잠깐,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민아야?"
민아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응? 아, 알았어. 믿을 만 해 보이네."
"그럼 나 좀 풀어줘…."
"그러고 싶은데, 네 말을 완전히 믿기 위해서는 하나가 더 필요하거든."
"어떤 거…."
"너, 그 인형사 휴대폰 번호 가지고 있지.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민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 사람. 휴대폰 안 들고 다니거든. 묶이는 것 같아서 싫다나. 그래서 바깥에 있으면 나도 잘 연락이 안 돼."
"신기한 사람이네. 그러면 사무소 전화번호라도 줘."
나는 전화번호를 말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러면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뭐."
민아의 휴대폰 너머로 희미하게 발신음이 들려왔다. 제발, 받아라… 그때, 발신음이 끊겼다.
"아, 여보세요. 혹시 규리 씨인가요?"
안도의 한숨이 나갔다. 민아는 휴대폰을 들고 집 바깥으로 나갔다. 자신을 만들어낸 사람과 이야기하는 기분은 어떨까.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
잠깐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돌아왔다. 들어오면서 부엌에서 가위를 들고 왔다.
"가만히 있어."
손발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너무 오래 움직이지 못해서인지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해해서 미안했어. 그럼 갈게, 또 봐."
"잠깐만, 민아야."
밖으로 나가려는 민아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왜?"
"가기 전에 이거 하나만 가르쳐줘. 네가 자살한 이유가 뭐야?"
민아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 역시 안 가르쳐줄래. 부끄러운 이유라서."
더 물을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방금 민아가 한 그 말이야말로 결정적인 단서였으니.

다음 날 사무소에 가 보니 규리 씨가 부스스한 상태로 책상 위에 퍼져 있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잠 못 잤어요?”
“응, 일 하느라 좀 바빴거든.”
규리 씨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눈에 다크 서클이 짙게 끼어 있었다.
"좀 자세요.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나중에. 마무리 좀 하고."
"그래서, 일은 잘 됐어요?”
“응. 흠씬 두들겨 팬 다음 경찰서에 넘겼지.”
"누굴요?"
"누구긴. 내 인형들을 죽이고 다닌 놈이지. 그놈 잡으려고 이렇게 고생한거잖아."
"가르쳐줬어야 알죠."
"아, 그랬나? 미안."
규리 씨는 얼굴을 다시 팔 속에 파묻었다.
"왜 그랬대요?"
"몰라. 그냥 정신이 살짝 나간 놈인 것 같아."
"아무튼 잡아서 다행이네요."
"이제 좀 쉴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고 규리 씨는 한숨을 쉬었다.
"아, 어제 새벽에 민아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별 이야기 없었어. 걔가 나보고 감정이 조정된 걸 풀어달라고 했지.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새로 걜 만들면서 감정을 조정하는 걸 까먹었다는 게 기억나더라고. 그래서 사실대로 말해줬지."
민아가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왔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한숨이 나왔다.
"응? 왜 한숨을 쉬어?"
"그냥요…."
"땅 꺼질라. 아, 내가 맡긴 일은 어떻게 됐어?"
“알아냈어요.”
규리 씨가 고개를 들었다. 여러 감정이 섞인 듯한 느낌.
"피곤할 것 같은데, 다음에 말할까요?"
"아냐. 계속해. 공포영화 같은 거 보면 꼭 이럴 때 뭔가 일어나서 못 듣게 되더라고."
“그것도 그러네요. 뭐, 빨리 말하는 게 좋겠죠. 답은 간단했어요. 민아는 변하고 싶었던 거예요.”
규리 씨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민아는 자신의 키와 몸무게를 비밀번호로 정할 정도로 그 숫자에 집착하고 있었어요. 고등학교 땐, 언제나 더 자라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고요.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인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에요. 거기에서 생각한 거죠. 만약에 자기가 죽는다면, 자기를 만든 사람이 새로 몸을 만들면서 나이에 맞는 몸을 갖게 되지 않을까, 라고요. 실제로도 그렇게 됐고요.”
“만약 새로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충분한 조사가 있었겠죠. 계약서라도 찾았다던가.”
“그렇긴 했어. 다만, 그런 계약이 존재한다는 건 나랑 부모님 말고는 모를 텐데. 어떻게 알았던 거지?”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든 방법이 있었겠죠.”
“그건 안 물어봤어?”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잠시 동안 규리 씨는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그냥,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나 생각해 봤어.”
“뭐 생각나는 건 있어요?”
“글쎄. 변하지 않는 게 문제라면 성장하는 인형을 만들면 되겠지. 쉽진 않겠지만.”
“그러게요."
규리 씨는 대답이 없었다. 돌아보니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문득 규리 씨가 왜 이런 곳에 사무소를 차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빌딩 주위로 돌아다님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조용함을 좋아했던 것이다.
침묵 사이로 문득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규리 씨가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신뢰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기뻤다.
나는 의자에 걸쳐져 있던 외투를 들어 그 위에 덮어 주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잠들어 있는 규리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올린 글의 리메이크라고 해야하나 보강이라고 해야하나 뭐 그런 것.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