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으로 가는 문

"'앙상블'은 일종의 파동함수를 조작할 수 있는 도구야."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의 두뇌에는 파동함수를 수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인간만이 가진 능력일까?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중요한건 이거야. 인간이 세상을 인식함으로써, 세상의 파동함수가 수축되어 하나의 가능성만이 남게 되었다는 거."
일종의 주관적 우주론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이비 과학 같지만, 내가 뭐라 말하려 하자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막았다.
"인간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세계를 '수축' 시켜왔어. 수많은 가능성들을 관측이라는 행위로 '죽여' 왔던 거야. 그러기에 세상이 양자역학적인 법칙을 따르고 있음에도 거시적으로는 인식하지 못했던 거고. 하지만, 이 '앙상블'이 있다면 인간은 파동함수를 수축시키지 않고 행동할 수 있어. 그리고, 자신이 원할 때 '수축' 시킬 수도 있지. 그러니까, 모든 가능성 중 최선의 가능성만을 고를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자신이 '앙상블'이라고 소개한 기계를 든 채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한 마디로, 수많은 가능성들 중에서 내가 원하는 가능성만 선택해 ‘수축’ 하는 게 가능해진다는 거야."

이런 대화가 오갔던 거 같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아직도 중2병에 빠져 있는 거 아니냐고 그에게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 기계를 든 채 실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어떻게 한 개인이 만든, 그것도 허술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기계 하나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그는 연예인의 사진이 걸려 있는 달력을 가리키며
"그러면 직접 보여주면 되는 거 아냐? 열 달만 기다려 봐, 저 여자는 나의 아이를 낳게 될 거니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후 나는 그에 대해 잊고 있었다.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일만으로도 바빴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내가 그가 한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그 날도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아내의 미소를 보는 건 좋았다.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하며 우리는 말없이 티비를 보았다. 티비에서는 여러 화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딱히 흥미가 돋는 채널은 없었기에 나는 그냥 그걸 켜 두기만 했다. 그리고 별 신경 쓰지 않은 채 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내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티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가 궁금해서 화면을 보니 어떤 육아일기 같은 것이었다. 아이돌들이 나와서 아기를 키우는 그런 프로그램이다. 아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산부인과에 찾아가자, 의사는 불임이라고 말했다. 어딘가가 막혀서 잘 안 된다나. 그런 이야기였다. 희박한 가능성은 있다고 했지만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아이 없이 살아가면 된다고. 둘이서 삶을 즐기면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내의 얼굴에 떠오른 어두운 표정은 이후로도 그 잔영을 계속해서 남기고 있었다.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아쉬운 곳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내는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는지 티비 채널을 돌리고는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채널에서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띄엄띄엄 보긴 했지만 대충 누가 나오는지 정도는 파악해둔 드라마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 배우가 바뀌어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다 하고 나는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다. 그러자 기사가 나왔다. 그 여배우가 몸이 좋지 않아 배역을 바꿨다고. 인터넷에서는 온갖 루머들이 퍼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임신설도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는 몇 달 전 그가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정말 그 '앙상블'이라는 기기가 작동한다는 의미인가?

몇달 만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꽤 많이 바뀌어 있었다. 집의 디자인도 달라지고 여러모로 깔끔해졌다고 할까. 차도 전자기기도 다 바뀌어 있었다.
"로또에 당첨되서 말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별로 보기에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집을 둘러보다 은근슬쩍 그에게 그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그 '앙상블'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믿겠냐? 조금만 기다려 봐, 이 '앙상블'하나면 전 세계는 내 것이 될 거니까 말야."
별로 내키는 미래는 아니었다. 그는 별로 좋은 의도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를 봐 온 나로서는, 그가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좀, 불안했다. 혹은, 이 생각은 앞으로 내가 할 행동에 대한 정당화일지도 모른다. 사실 조금 미안하긴 했다.
밤이 되었고 나는 그의 집에서 나왔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앙상블'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가 어딘지도 미리 기억해두었다. 그는 다행이도 그것을 어딘가에 숨겨 두진 않았는데, 아마 그 기계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얼마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그가 예전에 자주 쓰던 비밀번호를 누르고 그의 집에 들어갔다. 다행이도 그는 똑같은 비밀번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밤이었고 집은 고요했다. 그는 잠에서 잘 깨는 사람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 그를 깨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앙상블'은 그의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눈을 떴다.
헉, 하는 소리가 나올 뻔했다. 일단 소리 내지 않고 커튼 뒤로 숨었지만, 이러다간 언제 들킬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쩌면 좋지? 그러다 나는 '앙상블'을 떨어뜨렸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젠장,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러다간 들킬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나를 보지 못한 듯 지나치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조심해서 나갔다. 어떻게 된 걸까. 그는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신 후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나는 다시 돌아가서 '앙상블'을 집어 들었다. '앙상블'에서는 희뿌연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막상 그것을 훔쳐오자 불안감이 들었다. 그는 그 기계에 알고 있는 사람이 나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잠에서 깨어난 후 '앙상블'이 사라진 걸 보면 날 찾아올 것이다. 그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아내의 그 쓸쓸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아내를 깨웠다. 그리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을 맞췄다.

몇 달 뒤 아내는 임신 판정을 받았다. 아내는 정말 뛸 듯이 기뻐했고, 나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앙상블'때문에 불안했다.
그 기계는 아직도 내 방에서 희뿌연 빛을 내는 채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이것을 그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이 옳은 걸까? 아니면 그러지 않는 게 옳은 걸까. 그 생각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는 내 방에 이 기계가 놓여있는 걸 보고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내가 그런 미래만을 원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사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괴팍한 친구 또한 그 '앙상블'에 대해 잊고 있던 것 같았다. 다시 그에게 찾아가도, 그는 여전히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앙상블'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그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별 관심 없다는 듯 넘어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말로 그는 그 '앙상블'에 대해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범인이란 걸 알고 속이고 있는 것뿐일까? 아무튼 나는 여전히 이 '앙상블'을 그에게 돌려주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기계를 시험하겠답시고 타인에게 그런 짓을 한 놈이다. 아니, 이 기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망치를 들고 그 '앙상블'을 내려쳤다. 앙상블에서 나오던 희뿌연 빛은 사라졌다. 어떤 버튼을 눌러도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망가진 것 같았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리게 된 것은, 내가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나 외에 모든 사람들이 '앙상블'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고, '앙상블'이 사라지고, 아내가 임신을 한 세계를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최후의 '앙상블'을 내려치기 전 내가 원했던 가능성이 과거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나는 수많은 다중 세계중 이 세계선을 걸어오며 이런 가능성을 만든 게 아닐까?
그러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무엇보다도 내겐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정말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얻은 세계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내겐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나는 '앙상블'을 방 한 구석에 넣어둔 후 아내에게로 갔다. 배가 불러온 아내는 여느 때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앙상블'은 쿼런틴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물론 약간의 변형이 있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