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Christmas

단순한 아집으로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고 그것이 기만이었다는 걸 알게 된 날,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드러누워 세상이 멸망하길 빌었다. 어째서 세상은 이런 식인 걸까, 모든 것이 기만일 뿐인 세상 따윈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끝내 녹아내리지 못한 감정들을 끌어안은 채 졸업하게 되었다.

흔적이란 이상한 것이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물에도 그런 것들이 떠오른다. 대낮의 흐릿하게 떠오른 달을 쳐다보다 그녀가 내게 가질 흐릿한 인상을 떠올린다던가, 깨어진 롤리팝 사탕에서 달콤함이 부서져버린 나의 감정을 본다던가. 그런 것들이 하나씩 많아질 때마다 내 괴로움 또한 늘어갔다. 모든 것이 흔적이었다. 세상이 날 조롱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다시 한 번 이불을 뒤집어쓰고 세상이 멸망해버리길 빌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되었다.

강렬한 화염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지하 벙커에서 나왔을 때, 세상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일종의 개운함을 느꼈다. 이제야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너무 이른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마트에 굴러다니는 참치 캔을 보고 난 뒤였다. 다 먹고 나서 껍데기만 남은 참치 캔에서 나는 인스턴트하게 소비되어버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렸던 것이다. 또다시 삶에 괴로움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연상되자 다른 것들은 줄줄이 따라왔다. 무너지고 난 빌딩은 그녀의 고백 이후 무너져버리고 잔해만 남아버린 내 감정이었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훔치고 구걸하는 사람들은 혹시 조금이나마 남아있을지 모를 그녀의 애정을 갈구하는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전 세계의 모든 것들은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모두 없애버릴 순 없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없앨 수 없다는 걸까. 통조림의 경우에는 바다로 던져버리고, 빌딩의 경우에는 완벽히 가루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보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내 계획은 완벽했다. 적어도 그런 것으로 보였다.

근처에 떨어져 있던 망치를 주워들고 빌딩 앞에 서고 나서야 나는 그 계획이 얼마나 황당무계 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아무리 잔해라고 해도 부숴야 할 것은 산더미 같았고 나는 너무 작았다.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아무리 내 감정에, 그녀의 흔적에 대해 떠들어봤자 사람들은 그것을 헛소리로나 치부할 것이다. 사실, 나도 이게 조금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이라니?

나는 망치를 집어던지고 폐허가 된 세상을 걸었다. 먼지가 피어올라 기침이 나왔다. 바람이 불며 먼지가 형상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악마로도, 핵구름으로도 보이는 그 형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를 가질 지도 모른다. 그것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일지라도.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것은 일종의 기만이었다. 그녀가 내게 장난으로 한 고백처럼, 먼지구름도 그 자체는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기만했다. 세상 모든 것이 기만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세상을 기만해야 했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사실 내가 듣기에도 좀 어처구니없는 논리였으니까. 살아나기 위해서는 완전히 죽어 없어져야 한다. 구세대의 잔해가 남아있는 한 인류는 절대로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멸망한 세계가 아닌, 새로운 세계를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핵무기를 터뜨려 구세대의 잔재들을 모두 부숴버려야 한다. 나도 믿기 힘든 걸 타인이라고 믿을 리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그것이 꽤나 멍청한 논리라는 것은 나도 자각하고 있었고, 내 눈앞에서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게 어디 중요한가? 나는 세상을 다시 멸망시켜야 했다. 세상에 남은 그녀의 흔적을 모두 소거해버려야 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나는,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말로 그들을 기만했다. 적당히 현학적인 말을 섞어주면 그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납득하고는 내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돌로 쳐 죽일 뿐이었다.

그런 멍청이들을 보자, 그녀의 기만에 잠시나마 가슴이 두근거렸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기만임을, 그녀가 날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어째서 나는 그것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을까? 아니, 난 그저 그것을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몇몇 징조들에 대한 과대해석. 그것들이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징조조차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점점 모였고, 우리들의 세력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름마저 생겼다. 종말의 아이들, 이라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다. 어디 비디오 게임에나 나오면 좋을 법한 이름이다. 없는 자원을 끌어 모아 마크까지 만들었다. 버섯구름 모양의 단순한 마크였지만, 그 상징은 강렬했다. 우리 종말의 아이들, 은 그 마크가 새겨진 뱃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심지어 나는 그것이 그려진 망토를 입고 다녀야 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하긴, 그 모든 것은 그녀에게 휘둘렸던 내 모습에 비하면 웃기지도 않은 것이었다. 아니, 그녀는 날 휘두른 적도 없었다. 내가 휘둘렀던 것뿐이지.

정말 재밌는 것은, 진짜로 핵폭탄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나 우스울 수가 있을까. 그렇게 많은 핵폭탄으로 세상이 초토화되었는데도, 아직도 핵폭탄이 남아 있었다니.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새로 찾아온 사람들 중 예전 미국의 군부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몰라서 그들에게 핵폭탄 이야기를 하자, 그들은 각본이라도 짠 듯 핵폭탄의 위치와 작동 방법 등을 설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러시아에서 온 사람이 그 핵폭탄을 러시아로 공격하면 아직 지하에 묻혀 있는 둠스데이 머신이 핵폭탄을 전 세계로 퍼뜨릴 거라는 말도 했다. 황당했다. 세계 멸망은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다니.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은 내가 믿는 대로 구성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나의 믿음이 곧 진리가 되고, 내가 원하는 것은 곧 생성되게 된다. 그렇다면, 세상을 멸망시킨 사람은 내가 되는 것이다. 내가 원했기에 흔적을 지울 방법이 생겼고, 도구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녀의 흔적을 만든 사람도 나다. 세상에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은 사실 전부 다 내가 만든 것이었다. 나는 세상이 흔적 투성이임을 인식했고, 그 순간 세상은 흔적 투성이가 되었던 것이다. 하! 세상이 날 기만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날 기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정말로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게 나라는 것을, 고작 몇 개의 증거만 가지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세상은 또 다시 나를 기만하려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을 확인해야 했다. 세상이 날 기만한 것인지, 내가 날 기만한 것인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상은 멸망해야 했다. 나는 핵 발사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세상은 한 번 더 멸망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계기판에 나타난 날짜는 크리스마스와 같았다.

스위치를 누르며 내가 원한 건 그녀에 대한 모든 흔적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번에 원한 건 단순히 세계 멸망 따위가 아니었다. 새로 파괴된 세계에서, 나는 그녀에 대한 어떤 흔적도 보길 원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었다. 방사능으로 인해 나는 나이 먹지도 않았다. 이것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나는 적어도 온전한 모습으로 새로운, 그녀의 흔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싶었다.

50년 정도 지났을까? 대충 먼지가 가라앉고 난 이후 나는 벙커를 열고 세상으로 나갔다. 지형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세상을 걸었다. 먼지바람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이제 그녀 생각을 하지 않고 조금 기다리면 자동적으로 그녀는 잊히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리 너머로 어떤 실루엣이 보였다. 긴 머리의 여자 같은 실루엣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날 기만하고 있었다. 나는 돌을 주워들고 그것을 뒤쫓았다. 돌로 맞출 수 있는 거리가 되자 던졌다. 실루엣은 쓰러졌다. 나는 그것에 가까이 갔다.

그 위에 올라타고 나서 나는 그 얼굴을 확인했다. 그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날 기만하고 떠나간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똑같은 얼굴로, 그녀는 나를 비웃었다.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흔적이 사라지길 원하자, 세상은 그녀를 내게 보냈다. 잠시 멍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날 밀쳐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너, 뭐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나 같은 건 새하얗게 잊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세상은 끝까지 날 기만했다. 고작 핵폭탄 따위로는 죽여 없앨 수 없던 것이었을까? 아니, 이것 또한 세상이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를 이용해서 이렇게 세계를 멸망시키고, 또 다시 세계를 멸망시킨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배가 터질 정도로 미친 듯이 웃었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떠나가려 했다. 지랄하네, 이대로 보내줄 수는 없다.

나는 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달려가 쓰러뜨렸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 또한 기만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돌로 찍었다. 계속해서 찍었다. 형체가 사라질 때 까지 찍었다. 나중에는 몸까지 부숴버렸다. 그녀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나서야 나는 그것을 멈췄다. 완전히 부숴진 그녀의 모습은 푸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진작 그녀를 죽여 없앴어야 했다. 그랬어야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아니, 이것 또한 전부 다 내가 원했기에 이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죽여도 되는, 도덕률 따위 쓸모없어진 세상을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때서야 나는,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착각일 뿐이며, 나는 그저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세상은 그저 나에게 잊혀졌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아마 착각일 것이다.

하늘에서는 낙진이 하얀 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써 봤습니다. 제가 주로 써먹는 클리셰에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을 섞어 봤더니 이런 게 나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