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하는 글쓰기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짝사랑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어떤 여자를 좋아했지만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그것을 고백하지 못해 끝내 후회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자전적인 요소도 약간 섞여 있는. 그런 이야기였다. 일단 이야기의 틀은 잡혀 있었고 쓰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쓰고 싶지가 않았다. 그동안 써 왔던 글들과 결국에는 비슷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글을 쓰기로 했다. 이번에는 찻주전자 이야기였다. 러셀의 찻주전자에 대해 유머러스한 해석을 하는. 내가 보기에도 꽤나 쓸만한 글이었다. 스토리는 대충 잡혀 있었고 키보드만 잡으면 글이 술술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키보드를 잡고 외계에 대한 묘사를 하려니 문득 귀찮아졌다. 설덕이란 걸 증오했기에 이야기에는 아주 심플한 설정 정도만 쓰고 진행했는데 그게 독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그러다 문득 과거에 쓰다 내버려둔 글이 떠올랐다. 좀비 바이러스가 전 우주로 퍼지는 이야기였는데. 조금 가져오기가 있긴 했지만 이 사고실험은 꽤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전에 썼던 부분을 읽어보니 엉망진창이었다. 차라리 새로 쓸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왠지 싫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문득 과거에 내버려둔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토리 자체는 꽤 맘에 들었는데 지금 읽어보면 영 조악한 문체 탓에 별로라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였다. 그 글 파일을 열어서 다시 읽었다. 남자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멋대로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이야기였는데 사변의 폭이 너무 좁은 것 같았다. 이거나 붙잡고 다시 쓰자 생각했는데 쓰려다 보니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하드sf를 하나 써 보기로 했다. 퍼스트 콘택트를 다루는 탐사 이야기였는데 꽤 맘에 드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어떤 단편과 지나치게 구조가 비슷했다. 신경은 쓰지 않고 완성했는데 영 맘에 드는 꼴은 아니었다. 나중에 퇴고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단편 폴더에 일단 쳐박아 두었다.

그러다 문득 그동안 썼던 글들을 모아둔 폴더를 한번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글이 쌓여 있었다. 스크롤의 길이를 보고 흡족감을 느끼다 문득 그중 남에게 내 보일 수준으로 완성된 이야기가 몇이나 있나 세어보았다. 몇 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