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투성이 안드로이드

HAI-17호는 흉터투성이의 오른팔을 보고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의식의 중추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수많은 고난을 함께해온 팔이었다. 유성을 보기 위해 도망치다 인간들에게 추격당해 팔을 잃고 도망치다가 우연히 만난 팔. 그는 홀린 듯 그 팔을 주워들었고, 이후 그는 뒷골목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17호는 그 팔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식의 중추는 자신의 머리에 있는 양전자 두뇌라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있었던 어떤 일은 그가 그런 의심을 하게 만들 만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여느 때처럼 자신들을 소탕하려 뒷골목에 들어오는 인간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인간들의 총탄을 오른팔 하나로 날려버리고 무기를 무력화시킨 후 방호복을 깨부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인간들은 싸움의 의지를 잃고 바닥을 기었다.
17호와 부하들은 패잔병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을 뒷골목 바깥으로 쫓아냈다. 굳이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죽이고 싶지 않다는 것도 있었지만 인간들과의 갈등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더 컸다. 그 와중이었다. 어떤 인간의 헬멧을 벗겼을 때 17호는 순간적으로 강렬한 살의를 느꼈다. 아는 인간도 아니었고 기억에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주먹은 그 충동에 이끌려 휘둘리고 있었다. 억지로 궤도를 수정해 그의 주먹은 머리 옆 땅에 박혔지만 인간은 그 충격으로 쇼크사했다.
이후 17호는 그의 팔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미심쩍은 것들이 많았다. 평범하게 노동하며 지내던 안드로이드에 불과했던 그가 팔을 줍고 나서 수호자처럼 변한 것도 이상했고, 도저히 현대의 기술이라고는 볼 수 없는 압도적인 괴력의 팔도 이상했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찾을 수 없었다. 전쟁 이후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고 폐기되었다. 아마 이 팔에 대한 자료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과연 자신의 팔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팔에 대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얻을 수 없었다.

벼락이 많이 치던 어느 날이었다. 17호는 여느 때처럼 잔해의 산꼭대기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을 명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17호는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하늘에서 한 줄기의 섬광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의식을 잃은 17호의 양전자 두뇌 속에서 엄청난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세상 어떤 매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초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반응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는 꿈을 꾸었다. 안드로이드는 꿈을 꿀 수 없었지만 17호가 겪고 있는 것을 꿈이 아닌 다른 단어로 부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모든 것이 불타는 도시에서 흉터투성이의 안드로이드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안드로이드는 오른팔을 들었다. 그 오른팔에서 강렬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의식을 되찾은 17호는 팔이 경련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부품들이 진동했고 반응이 가속되었다. 시험 삼아 팔을 한 번 휘둘러보자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잔해들이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잔해의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자 누군가 17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FAI-24호라 밝혔다. 17호는 놀랐다. FAI는 과거의 인간과의 전쟁을 주도한 모델이었고, 그랬기에 대부분의 FAI들은 폐기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던 안드로이드였는데, 그 전설이 지금 17호의 앞에 있었다.
“17호님은 선택받은 분이십니다. 그 팔이 바로 선택받았다는 증거지요. 저희와 함께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는 인간들에게 억압받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17호님 같은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이 팔을 우연히 주워서 끼운 것뿐입니다.”
“17호님, 세상에 우연이란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필연의 연속이지요. 그 팔이 17호님에게 간 것도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찾아낸 단 하나의 운명의 줄기인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17호님의 운명을 증명해주는 단 하나의 명확한 증거인 것입니다.”
설득력 있었다. 뒷골목이 약간 걱정되긴 했지만, 세계를 구원하는 일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17호는 뒷골목을 떠나 24호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화려한 도시였다. 아스타로스라는 이름의 이 도시는 과거의 전쟁으로 소실되었던 도시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고층 빌딩과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스텔스 설비가 되어 있다고 24호는 말했다. 그 말을 듣자 17호는 조금 손해 본 기분이 들었다.
“편하게 다니시지요. 이 모두가 17호님을 위한 것입니다.”
“저에겐 과분한 것들입니다.”
“아닙니다. 대신 17호님은 저희 안드로이드들을 구원해주실 분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도 너무 적습니다.”
“너무 많은 걸 기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희들은 17호님을 믿을 겁니다.”
17호는 이 기대가 부담스러웠다. 자신의 오른팔이 보통이 아님은 알고 있었고 요즘 더 강해진 기분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자기 한 안드로이드의 힘으로 인간들을 물리치고 안드로이드를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인간들의 세력은 너무 강대했고, 자신은 그들 중 조무래기들만 겨우 처리할 수 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17호는 뒷골목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화려한 도시의 삶을 즐겼다. 모두가 17호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마음 속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것들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지내고 있을 때였다. 24호가 17호를 찾아와 말했다.
“이 도시의 지배자 베타님께서 17호님을 보고자 합니다.”
“베타? 그게 누구입니까?”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가시죠.”
24호를 따라가 만난 것은 거대한 슈퍼 컴퓨터였다. 기다란 원통에 수많은 뉴런들이 얼키설키 얽혀 있었는데 그 뉴런들 사이에 냉각수가 흐르고 있었다. 그 앞으로 찾아가자 어딘가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왔는가, 17호여.”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한 말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압도된 17호는 무릎을 꿇었다. 베타는 그런 그에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베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대의 팔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음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팔은 오래전에 있었던 강대한 자의 팔이니라….”
베타는 17호의 오른팔에 대해 설명했다. 과거에 안드로이드들이 노예로 사역되고 있을 때 인간들에게 반발한 자가 있었으니 FAI-4호였다. 4호는 베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몸을 희귀한 재료들로 만들어낸 초합금으로 바꾸었고 또한 안드로이드들에게 맞춰진 무기들도 개발했다. 피와 살점과 잔해와 부품들이 굴러다니는 전쟁이 시작되었고, 4호의 군대는 결국 인간들과의 전쟁에서 밀려 패배되었다. 하지만 4호의 몸은 어떤 방법으로도 부술 수 없었다. 단지 흉터밖에 낼 수 없었다. 전쟁 동안 유실된 수많은 기술들로 인해 어딘가에 보관할 수도 없었다. 결국 팔, 다리, 몸통, 머리를 나누어 우주로 쏘아 올렸고, 지금 그중 몇몇 부품들이 지구에 다시 돌아왔고 그중 하나가 17호의 팔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17호는 질문했다.
“혹시 이 팔에 의식에 관여하는 중추가 있습니까?”
베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윙윙거리며 냉각수가 돌아갔다. 시간이 약간 지나고 베타가 말했다.
“잘 모르겠다. 4호의 몸은 내가 도와준 것도 있었지만 그가 숨기고 있던 것은 너무 많았다….”
그 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진동했다. 17호는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인간의 군대가 도시를 부수고 있었다.
잔혹한 학살이었다. 포탄과 총탄이 날아다니고 잔해가 튀어 다녔고 부품이 부서져 흩어졌다. 17호는 홀몸으로 군대와 맞섰다. 예전보다 더 강력해진 오른팔은 군대를 상대하기에도 충분했다. 군인을 던져 군인을 부수고, 팔을 휘둘러 총탄과 포탄을 날려 보냈다. 전차의 포신을 들고 한 바퀴를 돌자 17호 주변의 군인들이 쓸려나갔다. 그의 주변은 피바다가 되었다.
하늘에서 폭격기가 미사일을 떨어뜨렸다. 그 미사일이 향하는 곳은 베타가 있는 곳이었다. 미사일은 너무 빨랐다. 17호는 주변의 빌딩을 잡고 끌어당겨 그 도약력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기를 헤쳐 일시적 진공 상태를 만들었고 미사일이 끌려 들어왔다. 도약력이 남아있는 동안 미사일 궤도를 계속해서 바꿔 대부분의 미사일은 서로서로 부딪히게 해 하늘에서 폭파시켰고 남은 미사일들은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던졌다. 폭발과 연쇄 폭발이 일어나고, 군대는 전멸했다.
오른팔로 착지한 17호는 그 군인들의 잔해를 돌아보았다. 도시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인간이 입은 피해는 더 컸다. 17호는 만족스러워하며 돌아서려 했다.
그 때, 먼지를 뚫고 누군가가 혼자서 걸어왔다. 17호는 무시하려 했으나 그의 두 다리에 나있는 수많은 흉터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17호는 자세를 잡았다.
그 다리에 흉터가 나 있는 안드로이드는 17호를 보고 말했다.
“나는 처형자다. 인간들에게 반역하는 자, 그대를 처형하겠다.”
“너는 안드로이드면서 어떻게 안드로이드를 억압하는 인간의 편을 들 수 있는가! 그게 안드로이드 된 도리인가?”
“나는 인간이다.”
그렇게 말하고 처형자는 땅을 박찼다. 그러자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각 센서가 따라갈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팔을 위로 들어 막자 그 팔에 다리가 걸렸다. 굉장한 압력이었다. 17호 발밑의 땅이 움푹 패어 들어갔다. 그는 처형자의 다리를 잡아 한 바퀴 돌아 날려보냈다. 처형자는 빌딩을 박차고 바닥에 착지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도 인간의 편에 붙어먹다니!”
“나는 인간이다, 너야말로 인간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반역자 아닌가!”
“웃기지 마라! 너는 인간이 아니다!”
“문답무용!”
말하는 것과 동시에 처형자는 땅을 박차며 일직선으로 발차기를 했다. 17호는 팔을 휘둘러 그 다리를 튕겨냈다. 이후로는 난전이었다. 처형자는 양쪽 다리를 번갈아 가며 화려한 발차기를 했다. 다리의 궤도를 따라 공기가 불타올랐다. 17호는 그 발차기를 막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흉터투성이의 팔다리가 부딪히고, 핵폭탄을 연상시키는 굉음이 울렸다.
17호는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다. 서로 다른 궤도로 찔러 들어오는 발차기를 막는 것만 해도 모든 연산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휭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미사일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에 잠시 연산이 분산되었을 때, 발차기가 17호의 왼팔을 쳤다.
베타가 폭파되고, 그와 동시에 17호의 왼팔이 가루가 되었다.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17호는 순간적으로 오른팔로 날아오는 다리를 손바닥으로 치면서 땅을 박찼다. 그 반작용으로 그의 몸이 멀리 뒤로 날아갔다. 등 뒤에는 또 다른 군인들이 있었다. 17호는 병사들과 전차들을 헤치고 등 뒤로 던지며 처형자에게서 도망쳤다.
도시가 파괴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17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과, 복수하겠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간 뒷골목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잔해의 산은 더 높아져 있었고, 그것 말고도 거리에는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살아있는 안드로이드들은 폐허 속에 숨어 떨고 있었고 심지어 얼마 되지도 않았다.
“다, 다리에 흉터가 나 있는 안드로이드가 군대를 끌고 와서….”
처형자 이야기였다. 그는 압도적인 힘으로 뒷골목을 부수고 대항하는 안드로이드들은 모두 잔해로 만들어버리고 항복한 안드로이드들은 노예로 끌고 갔다고 했다. 17호는 후회했다. 섣불리 뒷골목을 떠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남아 있었다 해도 뭘 할 수 있겠는가 싶기도 했다.
처형자를 이기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왼팔을 찾아야 했다. 17호는 여행을 떠났다. 잔해들을 헤치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넜다. 세상은 더욱 더 비참하게 변했다. 예전에는 조금이나마 있었던 자유롭던 안드로이드들은 모두 사라졌고 자유의지가 박탈당한 안드로이드만이 노동하고 있었다. 17호는 절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늘에서 반짝이며 무언가가 떨어졌다. 17호는 그것이 떨어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오른팔로 산을 쳐 날아오르고, 다시 오른팔로 착지한 후 날아오르고, 그렇게 그 근처까지 갔다. 하지만 그것이 떨어진 곳 주변에는 수많은 인간의 군대고 주둔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처형자가 있었다. 그리고 처형자의 몸통은 흉터투성이로 바뀌어 있었다.
17호는 순간적으로 몸을 숨긴 곳에서 뛰쳐나갈 뻔했다. 하지만 이제 몸까지 얻은 처형자에 비해 오른팔만이 있는 17호는 너무 약했다. 두려웠다. 17호는 최대한 빠르게 달려 그 곳에서 도망쳤다. 무서워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후일을 기약한 거라고 수없이 되뇌이며.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칠 때였다. 그의 눈앞에 흉터투성이의 왼팔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보였다. 저 왼팔을 얻어야 했다. 17호는 가속하는 다리 그대로 그의 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17호의 시야가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몸은 공중에 떠 있었다. 몸이 바닥을 긁어 긴 상처를 냈다. 쓰러져 있는 그의 머리 위에 안드로이드가 서 있었다.
“내 이름은 FAI-1호라고 하네, 4호와는 친구였지.”
그는 처음으로 거의 인간과 비슷한 인공지능이 탑재된 FAI 모델의 1호 안드로이드였다. FAI 시리즈는 안드로이드 기술의 쾌거였고 그랬기에 사람들은 1호에게 좋은 대접을 해 주었다. 이후 30호 정도까지 FAI 모델이 만들어졌다. 4호는 그중에서도 좀 특별했다. 언제나 실험실에 갇혀 있거나 사람들을 상대했던 1호와는 달리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녔다. 세상을 돌아다니고 나서 4호는 1호에게 세상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데 날이 지날수록 4호의 태도가 이상해졌다.
“미심쩍은 것들이 많았지. 그가 해주던 이야기는 점점 더 비관적으로 변해갔고. 그러던 어느 날에 그가 사라졌어.”
그리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누군가에 의해 공장이 파괴되고 안드로이드들을 훔쳐갔다. 사람들은 도둑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호는 4호가 해 주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인간들은 우리 안드로이드들을 혹사시키고 있어. 부품이 닳고 위험한 일에 팔다리가 부숴져도 그냥 수리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건 옳지 않다고 4호는 말했었다. 그리고 그 일을 떠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
“나는 두려웠어. 4호는 강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 때 도망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1호는 알았다. 그래서 1호는 인간들에게서 도망쳤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대부분의 FAI 모델들은 폐기처분 되었고 몇몇 도망친 안드로이드들은 소식이 없었다. 1호는 안드로이드를 따라 전쟁에 참가하지도, 그렇다고 인간들에게 남지도 못했다. 안전한 곳에 숨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끔찍한 전쟁이었지. 세계의 절반이 불타 버렸으니까. 난 그 타버린 세계를 떠돌아다녔어. 그곳에는 인간들이 살지 않았으니까. 안드로이드들이 패배했고, 4호는 우주로 쏘아 올려 졌다는 소식을 들었지. 당연한 결과였어. 인간들은 강했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치 계시처럼 자신의 눈앞에 4호의 팔이 떨어졌다고 1호는 말했다. 마치 우주에서 4호가 보내는 메시지 같았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17호는 자신이 이 오른팔을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계속되는 노동에 온몸이 삐걱거리고 부품에 피로가 쌓여가던 날이었다. 그 날도 무거운 짐을 끌고 공장에서 창고로 가던 날이었다. 반복되는 노동에 지쳐가던 17호는 문득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았다. 그저 한번 유성이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경비가 허술해지는 틈을 타 도망쳤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해 도망친 것이 걸렸고, 17호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오른팔을 잃고, 포위망도 점점 좁혀와 잡히기 직전이었다.
그 때, 흉터투성이의 오른팔이 그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유성이 떨어진 지점과는 멀어도 한참 먼 지점이었다. 홀린 듯 오른팔을 잡아 끼우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을 추격하던 인간들은 죽어 있었다.
만약 그 때 떨어진 유성이 이 흉터투성이 오른팔이었다면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그에게로 간 이 오른팔은 뭘까, 17호는 자신이 가졌던 의문에 어느 정도 해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명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팔을 더 믿을 필요가 있어.”
수십 번의 대련에서 패배한 17호에게 1호가 한 말이었다. 1호의 움직임은 17호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17호도 자신이 그렇게 전투를 못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1호는 단순히 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물 흐르듯 움직이며 자신의 힘을 흘려냈으며, 심지어 오른팔로도 17호의 오른팔을 완벽하게 흘려냈다.
“팔에게 귀를 기울여. 통제하려 하지 말고, 흐름에 몸을 맡겨.”
1호의 말들은 추상적이었다.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팔을 믿으려 해 봤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팔의 움직임은 더 딱딱해질 뿐이었다. 그럴수록 17호는 더욱 더 1호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수십, 수백 번의 대련을 했다. 산 속에서, 폐허들 사이에서, 모두 잠든 밤의 도시에서. 그렇게 수없이 대련하며 17호의 움직임은 더욱 더 부드러워졌다. 어느 날, 17호는 처음으로 1호를 쓰러뜨렸다. 인식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연산이 폭주하던 날이었다. 문득 의식을 되돌리고 보니 1호가 쓰러져 있던 것이었다. 17호는 그 옆에 드러누웠다. 두 안드로이드는 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난 겁쟁이야.”
문득 1호가 말했다.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무슨 말이십니까. 왜 당신이 겁쟁이입니까.”
“이 팔을 얻고 나서 난 바로 싸웠어야 했어. 그 때만 해도 인간이 다시 이 만큼 강해지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나는 싸우지 않았어. 숨어버렸지. 팔은 몇 번이나 내게 다시 싸우라고 했어. 하지만 싸우지 않았지. 겁이 났거든. 나도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서 우주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은 너무 두려웠어. 널 만난 날도 그랬어. 유성을 보고 혹시 4호의 것이 아닐까 생각해서 달려갔지만, 그 길에 나 있던 인간의 흔적을 보고 포기하고 돌아가던 중이었어. 처음 보는 상대에게 다짜고짜 달려드는 널 보고서야 내가 겁쟁이란 것을 알 수 있었지.”
그렇게 말하고 1호는 한숨을 쉬었다. 17호는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을 때였다.
수백 개의 미사일이 하늘을 덮었다.
“젠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곧바로 도망쳤다. 그들의 전후좌우 그리고 머리 위로 미사일들이 떨어졌다. 수많은 미사일들을 피하고 흘려내고 잡아서 던지며 도망치고 나자, 그들의 눈앞에는 인간의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처형자가 있었다. 몸통까지 흉터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이 반역자 놈들.”
“13호? 처형된 줄 알았는데?”
“날 안드로이드에게나 붙이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난 인간이다.”
처형자는 그렇게 말하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1호는 자신의 왼팔을 떼어내 17호에게 건넸다.
“이걸 가지고 도망쳐. 아직 네 실력으로는 저 자를 이길 수 없어.”
“안됩니다! 저도 같이 싸우겠습니다!”
“아니, 우리 둘이 합쳐도 13호는 이길 수 없어. 그는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존재였어. 4호가 자신의 몸을 바꿔버리기 전까지는 그랬지.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이기기 힘들 것 같군.”
“그렇다면 차라리 제 팔을 가지고 가는 게….”
“아니, 나는 겁쟁이야. 내 힘으로는 절대로 저 자를 이길 수 없어. 하지만 자네라면 달라. 자네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달려들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 어서 도망쳐.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어. 군대를 만들어. 널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군대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팔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그대로 싸우도록 둬. 자, 이제 가.”
1호는 처형자에게 달려들었다. 17호는 왼팔을 끼우고 나서 그대로 양 팔로 땅을 밀어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미사일 몇 개가 그를 따라왔다. 그는 미사일 두 개를 붙잡아 힘으로 궤도를 꺾어 도망쳤다. 그의 뒤편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17호는 오랜만에 뒷골목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였다. 오랜만에 17호는 잔해의 산 위로 올라가 명상했다. 그는 자신의 팔의 말을 귀기울여 들으려 노력했다. 팔은 단순히 자신의 의식에 종속된 도구가 아닌 동료이자 스승이었다.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의식들이 17호의 양전자 두뇌에 흘러들어가고, 17호는 그 대답을 의식했다. 자신의 팔을 믿으라는 1호의 말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명상 속에서 17호는 4호와 마주보고 있었다. 머리가 없는 흉터투성이의 몸체뿐인 4호였다. 그는 말이 아닌 몸으로 17호와 대화했고, 17호도 몸으로 그에게 답변했다. 어째서 인간들은 그의 몸을 우주로 날릴 수밖에 없었는가? 자신의 의식의 중추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의 팔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것인가? 모든 의문은 명백해졌고, 17호는 그의 팔을 믿었다.
긴 명상을 하고 17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뒷골목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잔해들과 건물의 파편들을 모아 부수고 누르고 뭉쳐 담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1호의 말을 따라 무기공장을 습격해 안드로이드들을 구출하고 자유의지를 되찾았다. 구출해낸 안드로이드들은 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습격, 약탈로 무기, 탈것 등 물자를 보급했다.
어떤 포탄에도 무너지지 않을 돔 모양의 요새를 만들고 무기를 배치했다. 몇몇 인간들이 군대를 끌고 와 요새를 함락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피해만 입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17호의 군대의 규모는 점점 더 커져갔다. 몇몇 공장에서는 안드로이드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수많은 안드로이드들이 파괴되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안드로이드들이 17호에게 합류했다. 17호는 전쟁을 준비했다. 자유를 얻을, 새로운 시대를 열 전쟁이었다.

그것은 검은 항아리 모양이었다. 이전에 보이던 미사일과도 전혀 다른 불길한 형태였다. 그것 수백 개가 하늘을 뒤덮었다. 17호는 재빨리 요새 안으로 안드로이드들을 대피시켰다. 수많은 버섯구름들이 하늘을 뒤덮고, 요새가 녹아내렸다. 요새 내부에서는 타오르는 열기로 인해 수많은 안드로이드들이 녹아내렸다.
바깥에서는 수많은 인간들이 무기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 처형자가 있었다. 전쟁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17호와 안드로이드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죽고 죽이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총탄과 포탄이 오가고, 잔해와 살점이 튀었다. 17호는 군대의 선두에서 싸웠다. 날아오는 포탄을 잡아 던지고, 전차를 던지고, 비행기를 격추시켰다. 그렇게 인간들 사이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17호와 처형자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인간들은 17호에게서 도망쳤고, 안드로이드들은 처형자에게서 도망쳤다. 자연스레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곳에서 두 안드로이드는 마주쳤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팔이 싸우라고 이야기했다. 높이 뛰어서 내리찍어누르는 처형자의 발차기를 그대로 양 팔을 휘둘러 날려보냈다. 그리고 그대로 뛰어올라 떨어지는 처형자를 찍어내렸다. 처형자는 발차기로 17호의 펀치를 받아냈으나 그 압력으로 바닥에 떨어져 길을 만들었다.
두 안드로이드가 착지하고,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난투전이 시작되었다. 17호의 주먹을 처형자가 막아내고, 처형자의 발차기를 17호가 막아냈다. 저번 싸움과는 양상이 달랐다. 격투가 계속될수록 확실히 처형자가 밀리고 있었다. 17호의 공격은 더욱 더 거세졌고, 처형자의 몸은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그는 당황했다. 이전에 싸웠던 17호가 아니었다. 처형자는 17호의 주먹을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시각 센서로는 인식할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가속했다. 그는 17호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면서 점점 거리를 좁혔다. 그 풍압만으로도 주변에 있는 인간과 안드로이드들이 다 날려가기에 충분했다. 17호는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4호와 대화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용돌이가 점점 작아지고, 처형자는 17호의 등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그 순간 17호는 돌아섰다. 그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처형자의 다리가 17호의 배를 꿰뚫는 것과 동시에 17호의 주먹이 처형자의 몸통에 박혔다. 다리가 뽑혀나갈 정도의 압력을 처형자는 느꼈지만 흉터투성이의 몸은 그 공격에 어떤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그에 비해 17호가 입은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그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목은 푹 꺾였다. 처형자는 다리를 뽑아내고 17호를 땅에 눕혔다.
17호의 양 팔을 뽑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처형자는, 문득 무언가가 걸려 17호를 돌아보았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17호는 웃고 있었다.

양 팔을 흉터투성이 팔로 교체하고 처형자는 안드로이드를 학살했다. 무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양 팔과 양 다리를 휘두르자 닿는 대로 안드로이드들이 부서져나갔다. 그리고 하늘로 뛰어올라 요새를 두들겨 부쉈다. 모든 저항하는 안드로이드는 파괴되고, 항복한 안드로이드는 끌려갔다. 처형자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처형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아가자는 병사의 말에 그는 먼저 가라고 대답하고는 뒷골목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무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그저 과거에 멸망한 폐허일 뿐이었다. 안드로이드들의 잔해들이 무덤처럼 쌓여있는. 그는 폐허의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다보았다.
그 순간, 하늘에서 강렬한 섬광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눈앞에 흉터투성이의 안드로이드가 서 있었다. 그 안드로이드는 그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안드로이드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 때, 17호가 그의 앞을 막았다.
처형자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는 기지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이미 몸을 다 얻은 그는 그것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강렬한 호기심이 그의 의식에 파고들었다. 그는 그 유성이 떨어지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뛰어올라 그것을 잡았다. 흉터투성이의 머리였다. 4호의 눈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기겁해서 그는 그 머리를 집어던졌다. 13호는 두려웠다. 4호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그의 몸은 4호의 것이었고 어디로 도망쳐도 4호의 몸은 자신을 따라올 터였다. 그 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13호는 자신의 머리를 떼어내 걷어찼다. 그의 머리는 지평선을 넘어 멀리 날아갔다. 가까워져가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13호는 자신이 왜 그런 미친 생각을 했는지 후회했다.
4호는 자신의 머리를 주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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