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 레포트

비서유럽인으로서의 서유럽 사상변혁사 수용에 관하여

― 앨프리드 W. 크로스비 , 『수량화혁명』 (The Measure of Reality: Quantification and Western Society, 1250-1600), 한국어판 , 심산 (2005년) 서평 ―

역사학자 앨프리드 W. 크로스비(Alfred W. Crosby)는 본서를 통해 근대 유럽제국주의가 성공하게 된 하나의 원인을 제시하고자 했다. 보통 유럽, 보다 정확하게는 서유럽의 힘의 근원을 그곳에서 태동–‘과학혁명’–한 과학-기술(이 둘은 자주 습합되어 언급된다)로 지목하지만, 저자는 과학 내지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과학과 기술을 운용하게 된 서유럽인들의 특정한 사고방식(mentalite)에 방점을 두고 그 사고방식이 수량화였다고 말한다. 수량화는 곧 고전 고대 시기의 정성적 세계관이 근대의 정량적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현상을 일컬을 수 있으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본서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정성적 세계관이 정량적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수량화의 과정을, 2부에서는 그 수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 사회에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는지를 논하고 있다.

중세의 전통적 세계관은 고전 그리스 세계의 지식체계 일부와 히브리에서 유래한 기독교적 종교관이 결합해 형성되었다. 소위 암흑시대라고도 불리는 중세 초기에는 신학을 제외한 학문활동은 미약했고 그런 상황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 더 신경쓰게 된 집단이 종교인들이었다. 해 뜨면 밭에 나가서 해 지면 들어와 자는 농민과 달리 수도사는 정해진 하루 일과마다 기도를 올리는 규칙적 생활을 해야 했기에 하루의 시간을 엄정히 할 필요가 있었기에 종탑을 지어올렸고, 교회는 각종 종교적 기념일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1년의 시간을 엄정히 알아야 했기에 역법에 관심이 컸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의 시간 개념은 종교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세상은 과거의 언젠가 창조되었고, 미래의 언젠가 휴거로 멸망하게 될 것이니, 시간이란 자연히 창조에서 멸망 방향으로 흘러가는 직선적 개념이었다. ‘직선’인 시간은 그 길이를 ‘측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천지창조가 예수 탄생으로부터 몇 년 전이었는지, 세계멸망이 예수 탄생 몇 년 후일 것인지 같은 것에 열중했고, 아직 시간을 ‘순간들의 연속’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중세 사상사의 또다른 한 축인 그리스 철학 전통은 다소의 시간차를 두면서 수용되었다. 중세 초기에는 플라톤의 과거 저작의 파편 일부가 남아 있었고 그나마도 성경 해석이나 교리 개발 같은 신학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었다. 그러다 12-13세기 십자군,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십자군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그동안 아랍어로 번역되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고대인들의 저술들과 알콰리즈미, 이븐시나 같은 이슬람인들의 저술이 유입되었다. 이상세계를 논하던 플라톤에 비해 실재하는 존재를 탐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 외의 지적 활동’, 곧 자연에 대한 탐구라는 공백지로 범람해 들어오게 되고 그 와중 대학이 탄생하면서 지식의 재생산 기관의 역할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총체적, 유기체적으로 접근했는데, 만물에는 각자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 속성들이 발현되어 조화함으로써 세계가 유지된다는, ‘성질’ 중심의 정성적 접근법이었다. 이런 접근법에서는 어떠한 사물들의 차이가 그 사물들 자체에 내재된 성질로 인한 것이지, 어떠한 ‘양’의 차이가 있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은 플라톤은 수학을 중요시하기는 했지만 이 시기의 수학은 거의 기하학이었고 플라톤 역시 ‘성질’이 이상적 세계에 존재한다고 말했을 뿐 정성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임은 비슷했다.

이렇게 강고한 전통적인 정성적 사고관과 겨루게 될 운명의 정량적 사고관이 13세기경부터 출현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중세 초기의 군웅할거 시대를 지나고 중세 성기가 되면 봉건제가 정착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인구가 늘어났으며 도시가 부활했다. 정성적 사고관의 아성인 대학의 출현도 이 즈음과 궤를 같이한다. 중간에 흑사병이라는 재앙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유럽은 몰락하지 않고 서서히 회복되었다. 농업경제의 부흥은 상업경제의 발달로 이어졌고, 로마 제국이 망한 뒤 오랫동안 파묻혀 있던 화폐경제가 되살아났다. 돈은 그 자체로 가치였으며, 다른 사물의 가격을 매김으로써 그 사물의 가치를 ‘헤아리는(측정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임노동과 금융업이 발달하자 돈은 상품 뿐 아니라 노임과 금리의 단위가 되기도 했는데, 노임과 금리는 모두 시간에 종속적이다. 즉 시간이 돈을 매개로 하여 양적으로 헤아려져야만 하는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이 경우 시간을 헤아리는 수단은 연속적으로 흘러가 버리는 모래시계 속 모래가 아니고, 한 닢 한 닢이 양자화되어 곳간에 쌓일 수 있는 금은동화들이었다. 동전 한 닢을 지불해야 하는 노동시간, 이자가 생기기 전에 채무를 상환해야 할 시간제한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동기가 시간을 측정 가능한(내지 측정 가능해야만 하는) 양적 개념으로 재정의했다. 그런 필요성에 의해 발명된 기계식 시계는 화폐를 통해 간접적으로 양자화된 시간을 직접적으로 양자화시킬 수 있었다.

시간과 함께 자연을 표현하는 양대 축인 공간 역시 비슷한 시기로부터 과학혁명이 일어난 16-17세기까지 정량적 개념으로의 변화를 겪었다. 이 경우 공간의 정량화를 가속시킨 동인은 지리학과 천문학의 성과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성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제1도구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옹호의 도구로 사용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성과는 다분히 정량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리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지상세계를 모사한 지도와 천상세계를 모사한 천동설 모형을 남겼는데, 전자를 만들면서 그는 지도에 모눈, 즉 위도와 경도를 도입시켰다. 이것은 후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행위, 즉 천구상의 행성의 위치 파악과 같은 수단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는 한동안 잠자고 있다가 140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피렌체로 전래된다. 그전까지 서유럽에서 사용된 포르톨라노 지도는 모눈식 위도와 경도 대신 주요 항구를 중심으로 하는 방사선들을 그려넣었다. 방사선은 32가닥으로 되어 있었고 이것은 곧 나침반의 32방위를 의미했다. 항해사들은 항구에서 출발해 방사선을 따라 움직이며 목표 항구에 도달했다. 포르톨라노는 지중해나 흑해처럼 좁고 항구가 많은 해역에서는 상당히 유용했지만 원양항해나 미지의 해역에서는 부정확할 수밖에 없었는데, 모눈식 위경도 좌표가 도입되면서 그런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천문학에서는 유명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으로 지구가 천상의 행성들과 동등한 것이며 세계가 균질할 수 있다는 인식이 싹텄다. 세계가 균질하다는 가정은 곧 지도제작에서 그러하듯 공간상의 거리를 측정하고 계산하는 행위가 우주적으로도 가능할 수 있다는 중요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계측 가능한 절대적 존재로서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자리잡는 한편 수학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져 그 계측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인도-아라비아 숫자와 연산자의 도입으로 계산 자체가 편리해진 것은 물론이고, 수학에 의한 추상화는 어떠한 현상에 대한 설명이 추상화를 거쳐 보편화, 일반화될 수 있다는 인식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런 수학의 발전은 이슬람 세계의 알콰리즈미 등의 성과를 받아들인 결과였지만, 그 과정은 결코 도입된 수학관이 기존의 수학관을 대체한 것이 아니었다. 중세인들은 고대로부터 전래받은,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비학적 미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기독교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각종 수적 상징(13, 666 따위)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런 전통은 수학적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수학을 이상세계의 접근 수단으로 생각한 플라톤의 유산이 재발굴된 것과 같은 신비주의적 수학관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성적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데 충분한 역할을 다했다. 케플러의 신플라톤주의적 사고방식이 천문학 혁명의 중간 집대성자로서 그의 역할에 큰 기여를 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이렇게 정량적 사고방식이 곳곳에서 고개를 내미는 상황을 저자는 서유럽 세계의 전통적 세계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폭약이 쌓인 상황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 폭약을 점화시킨 ‘성냥불’로 저자가 지목하는 것은 정량적 사고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 즉 시각화다. 저자는 세 가지 분야–음악, 회화, 회계–에서 정량적 시각화의 사례들을 제시한다. 기독교는 성가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음악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하지만 음악을 적절히 기록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노래는 기억에 의존해야 했고, 단성음악인 초기 성가는 그 이상 복잡해질 수 없었다. 음악 자체가 단조로웠을 뿐 아니라 사람마다 기억이 다르니 노래도 부를 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기독교가 생겨난 이래로 마니교나 영지주의 같은 이원론적 세계관과 투쟁을 벌여온 일원론적 기독교 신학자들은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방법이 단일하지 않음에 불만을 가졌다. 그런 문제의식 하에 11세기에 베네딕토회 수도사가 보표를 발명해냈다. 보표는 최초의 그래프였다. 음의 높낮이는 세로축이고 시간의 흐름은 가로축이다. 그래프란 지극히 정량적 수단이다. 그 결과 복잡하고 장려한 다성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었고, 어느 행성이 소프라노이고 어느 행성이 알토냐는 케플러의 행복한 고민이 가능해졌다.

음악의 혁신이 보표라면 회화의 혁신은 원근법이었다. 중세 초기에서 성기에 이르는 시기의 종교적 그림들은 평면적이었는데, 그보다 중요한 점은 그려지는 인물의 중요성에 따라 인물의 크기가 정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정성적인 사고방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장려함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한 예술적 동기만이 원근법을 탄생시킨 것은 아니었다. 지오토의 초기 원근법은 르네상스 3거두라고 불리는 후대인들의 그림에 비하면 상당히 조잡한데, 그것은 이론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당대 부활하던 신플라톤주의가 그 이론적 역할을 해냈다. 신플라톤주의의 수학적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종교적 숭고미와 쉽게 습합되었고, 그 결과 화가들은 기하학을 응용하게 되었다. 뒤러가 원근법의 설명 및 실제에 격자를 도구로 이용했음은 지리학에서의 위경도 모눈 도입과 공간의 수량화를 쉽게 연상시킨다.

마지막으로 회계 분야의 사례는 복식부기인데, 저자가 복식부기의 발명자로 칭해지는 파촐리를 표지 인물로 선정한 것에서부터 이 사례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확연하다. 복식부기는 장부상 모든 수입과 손실이 일치하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경제규모의 확대가 질풍처럼 이루어지는 가운데 르네상스 시대 상인들이 정보, 또는 데이터를 일목요연히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복식부기가 없었던 시절에는 그 많은 자료들은 “흩어져 상실되고 말았을 것”이다(본서 269쪽).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수입과 지출로 모든 것을 나누는 복식부기 대차대조표가 중세인의 일원론적 세계관과 구분되는 근대인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까지 말한다. 이 주장의 정당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복식부기가 숫자의 흐름을 시각화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이 수량화라는 과정에 지극히 유용하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중세 연대기작자들의 연도 계산은 틀리기 일쑤였고 다른 중세인들이 그 오차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차를 최대한 줄이려 하는, 그리고 연도 계산 같은 일상적 행위에서의 오차는 용납치 않으려 하는 근대인적 사고방식의 맹아가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돈의 손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한 르네상스 시기 상인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 격인 3부에서 저자는 인쇄술을 간략하게 언급하며 수량화-시각화가 인쇄술 덕분에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고, 그 결과 서구는 극한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가지며 다른 문화권에 비해 우위를 갖게 되었다고 결론내린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그 영향이 미치는 서구 제국주의의 근대 세계 재패의 이유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책의 내용을 요약 복기하였는데,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들 역시 탄탄해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떠오른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우선 첫째 의문은 저자가 서문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이 과연 책의 마지막에서 해결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도 훨씬 더 높은 효율성을 발휘했다. 원래 유럽인들은 자기들이 믿는 만큼 근사한 종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러 잡다한 인간들과 자본을 조직하고 물리적인 현실을 활용하여 쓸모 있는 지식과 힘을 만드는 점에서는 당시의 다른 어떤 종족보다도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본서 9쪽)

그리고 저자는 그 해답이 수량화에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그 해답이 수량화에 있다면 다시금 수량화가 어떻게 유럽에서 일어났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본서의 제2부가 그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이겠지만, 제2부에서 제시된 논의들이 수량화라는 결과로 나아가게 된 원인인지, 또는 다른 원인에 의해 수량화라는 결과로 나아가는 도중에 나타난 현상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에 저자는 수량화를 사회 전체적인 “사고방식”이라고 규정했고, 제2부의 논의가 수량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수량화라는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며, 기존에 누적된 ‘화약’에 불을 붙인 ‘성냥’이라고만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 성냥에 불이 붙은 것, 또는 불 붙은 성냥이 화약더미에 던져지게 된 것은 어떠한 명확한 인과 없이 우연히 일어난 것일까? 설사 명확한 인과를 밝히기 힘들다 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원동력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여기서 혁명 내지 변혁의 성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학혁명 및 수량화혁명 뿐 아니라 모든 변혁은 동일한 성격을 공유한다. 변혁을 추동하는 어떠한 원동력이 있을 때, 그 원동력은 변혁이 완성되는 순간 끝난다. 또는, 변혁이 완성되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 그 원동력이 끝났는지 여부를 살펴볼 수 있다. 말하자면 나비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었을 때 애벌레는 애벌레이기를 종료한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면 번데기는 번데기이기를 종료한다. 나비는 알을 낳고 곧 죽는다. 죽은 나비는 나비이기를 종료한다. 나비의 한살이에서 나타나는 변화들의 각 단계의 원동력은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는 과정은 애벌레에 의해 수행되듯이 그 전 단계에게 내재되어 있고,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원동력 그 자신은 종료당한다.1 과학사에서도 같은 원리를 여럿 찾을 수 있다. 앞서 언급된, 미신적 수비학이 수학의 발전을 추동시키고, 수학의 발전이 무르익어 어느 단계를 지나자 수비학이라는 번데기는 그저 웃기는 소리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정량적 세계관이라는 나비가 찢고 나온 번데기는 무엇이었는가? 다름아닌 정성적 세계관이었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 서양의 세계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랐고, 과학혁명이 일어나는 배경으로서 플라톤이 재발굴되었다. 이들의 정성적 세계관은 만물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하고 설명하기 위함이었고, 특히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해명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는 결국 세계 인식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음악의 보표, 회화의 원근법, 회계의 복식부기라는 서로 전혀 다른 분야들에서 개별적으로 발생한 혁신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공유되는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화하고 기능할 수 있었던 동인을 애벌레와 나비의 비유에서 그러하듯 그 사고방식이 궁극적으로 대체하게 된 기존의 사고방식 내부에서 찾고자 한다면, 세계 인식의 유기적 통일성이라는 목적의식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전혀 다른 분야들 사이의 정량적 혁신이 통일성이라는 목적의식 하에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연결되는 과정은 정량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정성적인 것이다. “모든 것이 수량으로 측정되고 표현됨”은 어떠한 수량이 아니고 어떠한 성질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정성적 연결을 거친 뒤의 정량적 사고방식의 세계관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수단은 오차를 최대한 줄인 정량적 결과–예컨대 과학적 실험의 결과–들 사이에 모순이 없게 하는 것이지, 직관적으로 인식되는 성질의 설명들 사이에 모순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목적의식이 표현되는 형태는 정성적 사고방식의 세계관에서 표현되던 형태와는 상이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성적 세계관에서의 유기적 통일성의 목적의식은 변혁의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정량적 세계관의 일관성의 목적의식으로 대체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량적 혁신들이 정성적 사고방식 내지 세계관의 목적의식 하에 연결되는 모순적 상황에서, 정성적 세계관을 전복시킬 수 있는 불온한 정량적 혁신들이 파묻히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세인들의 사고방식이 그리스의 정성적 세계관과 히브리의 종교적 일원론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면, 그 지배상태를 유지하고자 혁신에 반대하는 반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정성적 목적의식이 서로 다른 분야들의 정량적 혁신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새로운 사고방식을 형성시켰고 그 사고방식이 정성적 사고방식을 대체한 것이었다. 이 부분을 설명하는 데서 저자의 시간의 수량화 분석에 대해 탁월한 통찰이라는 감탄을 아낄 수 없다. 시간이 양자화된 동인을 노임과 금리의 계산 필요성으로 진단하며, 시간의 직접적 양자화 수단인 시계가 발명되기 전에 화폐가 시간의 간접적 양자화 수단으로 기능했음은, 그리고 그 동인이 상업의 발달에 의한 것이고 상업의 발달은 중세 성기의 경제적 부흥으로 인한 것임은 결국 이 모든 변혁의 최종적 원인–또는 변혁이 변혁 그 자체를 추동하는 모순에 의해 좌절되지 않고 완수될 수 있었던 원인이 생산(농업)과 상업이라는 토대가 존재했기 때문임을 방증한다. 다시 말해 시간의 양자화는 곧 자본주의적 시간의 탄생이었다.

실제로 저자가 진단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중세 성기에서 문예부흥기에 이르는 기간은, 그 이후 근대 신제국주의-식민주의 시대의 서유럽의 번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꾸준한 경제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기간이었다. 북쪽에서는 한자동맹이, 남쪽에서는 이탈리아계 해상공화국들이 무역로를 개척했고, 15세기부터는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어 신대륙에서 천연자원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정신적 권위를 대변하던 천주교회는 비대한 권력에 걸맞게 물질적 유혹에 굴복했다. 서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던 기성의 정신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 정신은 늙은 천문학자를 겁박할 의지는 있어도 물질적 번영을 거부할 의지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14세기부터 교황청은 청빈주의적 수도회들과 갈등을 빚었고,2 15-16세기 문예부흥기의 교황들은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들로 이름을 떨쳤다. 교황령의 참주 체사레 보르지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였고, 고리대금으로 부를 쌓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가 네 명이나 교황을 배출했다. 그 결과 천주교회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거기에 대한 반발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교회가 민중들의 물질적 활동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은 더욱 줄어들었다. 1419년-1434년 다섯 차례의 십자군을 일으키고도 후스 전쟁에 패배하고, 1527년 란츠크네히트들에게 로마가 털린 것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다. 즉슨 저자는 사고방식의 변화가 물질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그에 앞서 사고방식의 변화 이후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던 경제적 변화가 있었기에 그 사고방식의 변화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첫 번째 의문을 납득한다면, 거기에 따른 두 번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저자가 수량화혁명을 서유럽의 패권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고, 그 수량화혁명을 가능케 했던 것이 서유럽인들의 경제적 활동이었다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왜 수량화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또는 수량화혁명이 서유럽 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났지만 별개의 요인에 의해 서유럽이 패권을 쟁취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의문이 타당하다면 누군가는 ‘별개의 요인’으로 서유럽의 예외적 우월함(유전적인 것이던 문화적인 것이던)을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저자도 독자도 모두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러한 접근은 본질론적이고 목적론적이라는 점에서 몰역사적이다.3 하지만 일찍이 서유럽의 착취의 대상이 되었던 미주나 아프리카는 차치하더라도, 양적 경제 면에서는 서유럽을 능가하고 있었던 중화문명권이나 서유럽의 수량화혁명을 가능케 한 대수학의 본 고향인 이슬람 세계에서 서유럽과 같은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히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의문은 동아시아 중화문명권이 양적 경제로서는 중세 서유럽 따위보다 훨씬 우월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갖는데, 이것은 왜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자본주의가 등장하지 않았느냐는 해묵은 의문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앞서 시간의 수량화를 자본주의적 시간의 탄생으로 분석한 바 상기 해석에 따라 본서의 내용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의문이라 할 것이다.

본서의 저자는 이런 의문에 답하지 않으며, 애초에 관심 자체가 (적어도 본서에서는) 없어 보인다. 본서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서유럽 세계에서의’ 사상사적 전환이 경제사(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자본주의적 시간과 복식부기) 및 문화사(음악의 보표 발명과 회화의 기하학)와 궤를 같이하며 이루어졌으며 그 전환의 내용이 정량적 세계관의 정착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지, 비서유럽 세계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역자의 말(본서 pp. 293-300)에서 역자는 “금속활자의 발명자인 고려인의 후손”으로서 저자의 무관심함에 볼멘소리를 하고 서유럽의 정량적 세계관의 폭력성이 제국주의로 인한 비극을 초래했다며 정성적 세계관과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지만, 전근대 동아시아의 공용문자인 한자라는 문자 자체가 활자인쇄에 적합하지 않아 목판인쇄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으며(수천 수만 개의 한자를 어떻게 다 활자화하고 조판할 것인가) 고중세 서양이나 전근대 동양의 정성적 세계관에서도 식민주의와 전쟁, 착취와 수탈은 언제나 이루어져 왔음을 생각한다면 그저 트집잡기일 뿐이다. 정말 중요하게 고찰되어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수량화라는 사고방식의 변화가 인간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서유럽의 특수한 역사의 서술(저자가 본서에서 논증하는 바)과 사고방식의 변화 같은 사상적 정신적 변혁을 추동시키는 것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물질적 경제적 변혁이라는 보편적 역사 서술 법칙을 어떻게 결합시키냐는 것이다. 이것은 비서유럽인인 동아시아인으로서 저자의 논의를 수용함에 있어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과제이며, 동시에 전세계의 일부인 보편자 인간으로서 우리 시대에도 변함없이 진행되는 변혁을 인식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