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원자력

역사적 배경

  • 1945년 일본 원폭투하 → 일본 항복, 식민지 조선의 해방
  • 소련이 원폭 개발하면서 냉전 시작
  • 1950년 한국전쟁 → 냉전 심화
  • 미국, 수폭 개발
  • 1953년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 for Peace)” → 핵에 대한 평화적 목적의 연구 가능해짐
  • 국제원자력기구(IAEA) 설립
  • 1955년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회의 개최
    • 학술, 정치협약, 상업거래, 물밑 접선을 위한 모임.
    • 이 한 학회에서만 논문 수백편 쏟아짐
    •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던 한국에 대표 파견 요청 (당시 이승만 정부)

한국의 반응

1. 강력한 힘으로서의 원자력에 대한 군사적 열망

  • “공산주의 침략 방지에는 원자폭탄 외에 없다” (1960년 11월 20일 동아일보)
  • “원자력은 세계 파멸을 방지했다” (1955년 8월 10일 동아일보 사설): 제네바 회의 즈음
  •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이승만이 일본인 자칭 원자력기술자에게 사기(?)당한 에피소드

1957년 11월경으로 기억합니다.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
“우리나라에서도 원자폭탄을 만들려면 만들 수 있나”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연구를 계속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자네 원자력에 대한 계획을 잘 세우고 그러면 정부도 자네가 하는 일을 잘 밀어줄 거야. 연구소를 지을 장소는 사람들의 출입이 뜸하고 보안도 잘 되는 곳이 좋아. 만일 적당한 장소가 없으면 진해 해군기지가 있는 곳도 찾아봐요”

원자력 선구자 윤세원의 회고

2.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통한 유토피아적 번영 전망 — 정파를 초월

원자에네르기의 동력화와 공업의 오토메이션화에 의하여 인간의 필요노동시간은 극도로 단축될 것이며 과학적 및 기술적 노동의 범위와 비중이 확대됨을 따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는 감소될 것이며 이리하여 평범한 근로민중은 생활과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서 정신적 문화생활에 참여하여 이를 촉진 향상시키고 또 향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원자력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은 항구적인 인류평화를 보장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에네르기의 큰 위력과 그의 무서운 파괴력 및 위험성에 대한 전인류적 각성은 ‘인류의 공멸’을 초래할 수 있는 새로운 대전을 방지하고 절충과 타협에 의한 국제적 제문제의 합리적 해결과 민주적 방식에 의한 인류사회의 평화적 변혁을 가능케 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봉암, 진보당 강령 (창당대회에서 낭독)

  •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과학발전에 의한 노동해방 + 핵무기의 상호확증파괴에 의한 평화

3. 원자력 발전을 통한 동력원 자립

남한의 동력원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약간의 수력발전과 무연탄발전이 있는데 …

동아일보

  • 대규모 수력발전소를 가지고 있던 북한이 한국전쟁 전후로 전기를 끊어버림

워커 시슬러(Walker Cisler)

  • 미국 전력회사 "디트로이트 에디슨" 사장
  • 1956년 한국 방문. 이승만 면담, 서울대 강연. 같은 무게의 석탄과 핵연료봉을 넣은 "에너지 박스"로 쇼맨십

“3.5 파운드 무게의 석탄을 태우면 시간당 4.5 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3.5 파운드의 우라늄을 태우면 시간당 1200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무게는 같지만 우라늄은 무려 300만 배나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 시슬러는 자기 상품을 팔려고 온 전력회사 사장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제3의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로 기억됨 (오펜하이머: 엥??)
  • 하지만 당시 한국은 발전용 원자로를 살 여력이 없어서 판촉은 실패.
    • 1천만 불 짜리 발전용 원자로는 못 사고 70만 불 짜리 연구용 원자로 구매.

정책적 대응

  • 1954년 제네바 회의에 초대받은 한국 → 문교부 내에 원자력 대책위 설치
    • 문교부 기술교육국장 박철재 + 과학자 11명으로 구성
    • 박철재도 교토제대 물리학과 박사 출신인 기술관료
    • 제네바 회의에 박철재 외 3명 참석
  • 1955년 한미원자력협정 체결
    • 연구용 원자, 핵연료, 방사성 동위원소 제공
    • 비판: 한국의 원자력 연구가 미국에 종속(e.g. 농축우라늄 사용). 자체적 핵발전 연구 중단 → 기술종속 영속화 의도
    • 반론: 장기적으로 인력양성이 우선
  • 1956년 문교부 기술교육국 산하에 원자력과 설치
    • 과장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윤세원(교토제대 우주물리학과 졸)
    • 미국으로 원자력 연수

스터디 그룹과 원자력 유학

  • 제네바 회의 이후 박철재가 윤세원에게 공부하는 놈들 소집하라 요청
  • 윤세원이 국방과학연구소 김준명과 "스터디그룹"이라는 사조직 결성,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생 10여명 참여
    • 매주 토요일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원자력에 대한 미국 교과서(미군 장교에게서 우연히 뺏은 것) 필사, 공부
    • 해외의 법안, 특히 일본 사례를 공부 → 원자력법 초안
    • 문교부 원자력과를 외부에서 지원, 원자력과의 인력으로 충원됨
  • 원자력 관련 유학생의 해외 파견
    • 주로 미국으로 파견: 국비 + 미국의 지원 (국비는 각 부처 원조자금을 십시일반)
    • 대학에서 4개월 교육 +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실습. 이후 학위과정을 하는 경우도 많았음
    • 이 인력이 1960년대 원자력 사업의 핵심 인력이 됨
  • 행정기구로 대통령 직속 원자력원 설립 (1959년)
    • 원자력 사업을 관장
    • 초대 원장 정치인 김법린. 실무는 문교부 과학자들이 주도.

원자력연구소

발족: 1959년 3월 1일

  • 초대 소장 박철재
  • 연구원에 대한 파격적 대우 (본봉 + 위험수당 + 연구수당; 동급 공무원의 3배 월급)
    • 연구원과 행정직의 갈등 → 향후 조직을 흔들게 될 정도로 커짐
  • 1급 연구원 3명 (다른 연구소는 소장이 2급)
    • 직제상 원자력원 소속인데 직급상 원자력원보다 상급자 → 원자력원과의 갈등
  • 다른 연구소의 10배 넘는 예산
    • 예산이 풍부해서 원자력학회에 모든 과학 분야들이 모여서 연구비를 타감 (물리학, 생물학, 의학, 수의학, 재료공학, …)

부지 논쟁

  • 한국인들: 안전하고 비밀스러운 곳을 추구 → 군사적 용도 또는 전력독립을 위한 발전용 연구
    • 이승만: 진해 해군기지
    • 다른 정치인들: 강원도 오지 (과학자들이 싫어함)
    • 상공부: 충주 (비료공장이 있어서 기존 공단과 연계추구)
    • 문교부: 안양 수리산 박달리 (서울과 멀어서는 안되는데 서울은 너무 북쪽이니…)
  • 미국의 반대로 한국인들의 제안은 모두 엎어짐
    • "이 새끼들이, 니들 원자력협정에서 순수연구만 하기로 했잖아? 그럼 대학 근처에 지어야지!"
    • 박철재의 변명: "서울은 팽창하고 있다. 10년 안에 안양도 서울이 될 거다" (…)
    • 미군은 박철재에게 설득된 척 하고 안양 땅을 군사용으로 조차해버림. 가장 그럴듯하던 안양안이 나가리.
    • 결국 한국 정부와 과학자들은 오지를 포기, 서울공대 근처 부지로 정해짐.
    • 기공식에서 이승만이 시삽, 축사: “장차 원자력연구소는 훌륭한 어토믹 머쉰을 만들어야 합니다” ← 미군: "???"
  • 미국은 한국의 의도를 지극히 의문스러워함.
    • 당시 미국 협상단 쪽에서 작성한 메모에는 원자력원이 대통령 직속이라 문교부-서울대 라인과 연결되지 못함을 지적.
    • 그렇다고 한국이 그 쓰레기 같은 국력으로 감히 핵무기를 만들려 한다고 의심한 것은 아님.
    • 도대체 얘들이 왜 순수연구용 원자로를 대학에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는 것인지, 그 존만한 원자로로 뭘 하려고 그렇게 비밀스럽게 지랄을 하는지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 ("이 새끼들 병신인가?")

트리가 2호(Triga MK. II)와 연구소의 내환

  • 제너럴 아토믹사의 실험용 원자로
  • 동위원소 만들기 좋음(애초에 순수연구용). 가격 저렴.
  • 1959년 기공. 4.19, 5.16 뒤인 1962년 첫 가동. 발전량 100 킬로와트 (…)
  • 1995년까지 가동.
    • 1995년 국산형 원자로 하나로의 모태.
    • 트리가 2호는 문화재로 지정됨. 하지만 폐로 이후에도 방사능이 계속 나와서(…) 일반인들 관람 불가. 결국 해체하고 모형 제작.

연구소의 내환

  • 원자력원과 연구소의 내분, 연구소 내의 행정직원과 연구원의 내분 → 박철재 쫓겨남
  • 신임 연구소장 최상업, "파이클럽"이라는 사조직 결성
    • 박정희 정권 이후 최형섭의 파이클럽(유학파)와 윤세원의 스터디그룹(국내파)의 정치 암투
    • 1962년 최형섭 소장 취임. 파이클럽의 승리?

1950년대-60년대 원자력의 의의

  • 정부의 대규모(?) 지원을 받은 첫 분야
    • 원자력, 물리, 화학, 생물, 의학, 재료공학 등 과학의 거의 전 분야가 숟가락을 얹음
  • 원자력원
    • 최초의 과학 행정부서. "과학부"의 꿈이 재등장.
  • 해방 이후 최초의 국비유학. 이후 19ㅛ60년대 미국 유학이 증가하는 시발점.
  • 연구소를 둘러싸고 엿볼 수 있는 한미관계의 편린과 한국 교섭능력의 한계

본격 원자력발전

  • 박정희 시대에 추진.
  • 국내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 고리 1호기
    • 하지만 도저히 자체 기술로 지을 수 없음
    • 미국 웨스팅하우스에 돈 주고 구매. 건설과 시운전까지 웨스팅하우스가 다 해 줌
    • 1971년 기공, 1977년 첫 발전.
  • 소위 핵피아는 1990년대 이후 "한국형 원자로"를 추진하면서 형성 (아직 구체적인 연구는 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