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혼란기의 과학기술자, 과학행정가

이태규 (1902년-1992년) - 화학

약력

  • 1902년 중농 선비 집안 출신. 엄격한 아버지(정신일도 하사불성) — 좌우명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keen observation and everlasting effort)"
  • 경성고등보통학교 → 일본 유학,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차석졸업 → 조선인 차별로 임용 안됨 → 대학 진학
  • 교토제국대학 화학과 호리바 신키지("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 밑에서 1931년 화학 박사(조선인 최초의 일본 이학박사), 교토제국대학 전임강사.
    • cf. 최초의 이학박사는 연희전문 수물과 → 미시간대학 1926년 박사 받은 이원철
  • 1938년 프린스턴 초청과학자. 헨리 아이링과 친분 (삼양사 김연수의 후원)
  • 1943년 교토제국대학 정교수
  • 해방 후 경성대학교 이공학부장, 서울대학교 설립 후 문리대 학장
  • 국대안 파동에 휘말려 1948년 도미, 미국 유타대학교 연구교수. 유타에서 아이링과 함께 리-아이링 이론 만듦(비뉴턴적 유체의 운동에 관한 일반이론)
  • 1973년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귀국

일본 경력

"나는 지원병제도가 아닌 징병제도가 되그를 원한다. 그 전제로서의 지원병제도라면 이의가 없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라도 백인과 같이 떳떳한 시민권을 가지고 의무교육을 받고 징병령에 의해 복무하고 있으니 부러운 일이다. 조선에도 의무교육령을 실시하고 징병제로 하면 일본 전체가 얼마나 강하게 되고 행복하게 될지 모른다"

『특고월보』 1941년 12월호

  • 역사학자 강만길의 문제제기 — 특히 1944년 옥살이를 했던 리승기와의 비교

이태규 박사의 생각은 징병제 실시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조건 아래서 조선인의 지위 향상을 도모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사람이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철저하게 일본인이 되어야만 식민지배 아래서의 지위가 향상될 수 있다며 학병지원을 권유하고 다닌 이광수, 아니 카야마 미쯔로오의 괴변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강만길, 『역사가의 시간』

  • 이태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음
  • 독립 운운하여 불령선인으로 잡혀간 동생을 바로 빼올 수 있을 정도로 일본 사회에서 명망도 있었음
  • 이태규의 의도야 어쨌건, 당시 식민지 지식인이 공유하던 체제에 대한 적개심은 찾기 힘든 것이 사실

해방정국

  • 일본의 제자들과 함께 귀국, 경성대학 이공학부 재건에 매진
  • 과학기술부 설치, 중앙연구소 창설 주장
  • 국립서울대학교 1946년 9월 강의
  • 국대안 파동 정국
    • 이태규에 대한 좌익 학생들의 시위, 비판 (교토제대 교수 전력으로 친일파 취급 받음)
    • 동료 교수가 테러 당해 칼맞고 사망, 학장으로서 행정에 대한 환멸, 제자들의 "배신"
    • 결국 1948년 도미

"그 당시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독립했다고 오니까 삼상회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 학생들도 공부는 않고 거기에 쫓아다니고 선생들도 거의 대부분 빨갱이였지요. 선생들이 삼상회의를 지지하는 등 이렇게 하니 혼란스러웠지요. 그런 일 다음에는 우리 정부가 확립되어 문교부에서 국대안을 냈는데 … 이것을 반대한다고 하여 학생들이 거의 공부를 안 했어요"

"관사에서 동숭동 교사로 들어오려고 하면 와- 하고 소리지르고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어요. 돌에 맞아 유리가 깨지기도 했고요"

"해방 후 누구든지 경제생활이 윤택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경제 실상은 어그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 원인은 정치적 혼란기에 있음에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믿는다…

1946년 8월 15일 조선일보 대담

"악몽 같은 학장직을 맡으며 나는 정치가 잘 되어야 과학도 하고 문예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학장직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학장 감투를 쓰고 있으니 술을 너무 많이 먹어 머리도 띵하고 멍텅구리가 되는 것 같았다 … 학장이고 총장이고 행정가가 해야지 학자가 할 짓이 아니다"

1980년 회고

미국 경력

  • 과학적 자아: disciplined, disinterested. 아침 9시 출근, 밤 12시 30분-1시 퇴근. 1993년(사망 직전)까지 마지막 논문.
  • 리-아이링 이론
  • 한국 학생들 교육, 훈련
    • 한상준(한양대 총장), 장세헌(서울대 화학과 머장), 김각중(전경련 회장), 전무식(카이스트 화학과 머장), 백운기(서강대 화학과 머장), 권숙일(과기부 장관), 이용태(삼보컴퓨터 회장) …
  • 유타-한국 대학교들(서울대, 카이스트) 네트워크
    • 서울대, 카이스트 화학과의 주춧돌
    • 호혜적인 관계.
      • 이태규를 중심으로 우수한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이면서 유타 대학교 화학과 팽창에 기여함.
      • 그렇지만 대칭적인가? 한국에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한국보다 유타와 아이링 측에 더 도움이 된 것이 사실.
    • 한국 과학이 일찍이부터 국제화되었다는 증거. 그런데 그것이 무조건 좋은 것인가?
      • 한국 과학의 고질적 문제: 우수한 학생들이 유학으로 빠져서 미국 교수 연구를 도와 연구를 하고, 귀국해 교수를 하고, 그 교수 밑의 우수한 학생들은 유학으로 빠지고, … , 학문이 "이어지지 않음"
      • 아이링이 유타 대학교를 키웠듯, 한국에서도 그런 팽창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모든 세대의 우수한 학생들이 유학을 가 버리니 한국에서는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음
      • 다시 말해 "한국 과학"이라는 나무의 가지가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국 과학의 나무의 가지를 꺾어와 접붙이는 것의 반복(노벨상 수상이 없는 이유)의 시작이 여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남한 "세계과학"의 상징 이태규

  • 세계과학의 여러 의미
    • 세계적 수준의 과학: 리-아이링 이론
    • 국제화된 과학: 미국과의 네트워크
    • 순수기초과학
  • 과학자로서의 모범: 평생 600여 편의 논문 발표, 사망 직전까지 연구
  • 노벨상 추천위원회
  • 과학자로서 최초로 국립묘지 안장

"결코 후회하거나 바꿀 의도는 없으며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로 걸어가겠다."

송상용(서울대 화학과 출신으로 이태규와는 개인적 지인)의 평가

  • 깊은 철학을 가진 과학자는 아님. 아인슈타인, 안동혁 같은 급은 아닌 "평범한 과학자"
  • 나이브할 정도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과학관
  • 체제에 안주하는 틀림없는 보수주의자(부미방 사건 범인들 뿐 아니라 숨겨준 사람들도 모두 잡아넣으라 주장), 철저한 반공주의자.
  • 친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일본에 적개심을 가진 적은 없음. 미국에 오래 있었으나 그의 사고방식은 미국보다 일본에 가까움
  • 왜 "평전" 말미에 이런 초치는 소리를 했을까?
    • 혼란스러운 시대에 본인은 훌쩍 도미하여 사회에서 담을 쌓아버린 천재 과학자 — 과학계에 사회 무관심 풍조가 퍼진 것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렇게 잘만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감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주위 환경이 중요하지요. 저들을 위해 공부하도록 만들어줘야 할 텐데 … 과학원에서도 고대로부터 최루탄이 날아와 지내기가 어려워요. 그것이 학생들이 떠들고 하니까 우리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는 것이더군요. 생각해 볼 문제이지요. 학생들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정치운동이더군요. 정치운동을 왜 학생들이 해야 하는지. 정치는 학생들의 신분을 넘어서는 것이거든요. 또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안 돼요. (중략) 학문할 분위기를 주위에서 만들어주면 노벨상감도 나옵니다. 힘쓰지 않아도 나와요. 그 우수한 재질을 갖고 있는 사람을 잘 지도육성하면 반드시 노벨상이 나올 겁니다"

1985년 인터뷰

리승기 (1905년-1996년) - 화공

약력

  • 1905년 전남 담양 출신
  • 중앙보통학교, 일본 미쓰야마 고등학교
  • 교토제국대학 화학공학 전공, 동대학 화학연구소 조교수
  • 1939년 "합성 1호" 비날론 합성 (세계 두 번째 합성섬유)
  • 교토제국대학 공학박사학위 취득
  •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금
  • 일제시대 가장 뛰어난 과학자(5편 이상 논문 11인) 중 1인 (이태규 37편, 리승기 48편)
  •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대 학장
  • 1950년 7월 31일 월북
  • 1959년 인민상 과학부문 수상
  • 1961년 비날론 대량생산
  • 레닌상 수상
  • 인민과학자. 원사. 교수. 박사. 애국렬사릉 안장.

월북

  • 리승기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

"나는 좌익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나의 지식은 개무였다"
"공산주의는 민족성을 무시하고, 소련을 조국으로 모시고, 가정의 관념도 없고, 개인은 계급에 의해 용해되고, 각자의 개성도 자유도 전혀 무시된다고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 북한에서는 식민지 시대 지식계층을 "오랜 인텔리"라고 부르며 친일파, 개조대상으로 여김. 반면 과학기술자들은 혁명성을 가지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 보호
  •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 1947년 흥남공업대학 설립. 훈련받은 과학기술자의 필요
  • 서울대학교 국대안 파동 → 남한의 연구여건 악화.
  • 이태규가 도미했듯 리승기는 월북. 리승기의 화공 연구에는 흥남의 일본질소 공장 같은 설비가 중요
  • 북한에서의 지위가 항상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님

비날론과 주체섬유

  • 북한은 비날론을 "주체섬유", 리승기의 과학은 "주체과학"이라고 강조함
  • 비날론의 "주체"적 성격
    • 북한에 풍부한 석회, 석탄 사용
    • 북한 과학자에 의해 개발, 양산
    • 거의 전 세계적으로 북한에서만 널리 사용 (면 대용)
  • 비날론 주체성의 실체
    • 비날론은 "일제시대에" 리승기가 개발
    • "일제시대에" 지어진 공장 사용
    • 해방 이후에도 일본인의 기술전수가 있었음
  • "주체"만 강조. 식민지 유산을 부정하려다 보니 석탄화학에 집착, 세계화학산업의 주류인 석유화학에서 멀어짐
  • 왜 "민족"섬유가 아니라 "주체"섬유?
    • 김일성은 1958년 비날론 공업화를 제창
    • 주체사상은 1955년 제시되었는데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주춤하고 있었음
    •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비날론 공업화에 성공
    • 리승기 인민상 과학부문(1959년), 노력영웅(1961년) → 리승기의 성공은 북한 인민의 성공 (그리고 김일성 주체사상의 성공)
    • 과학기술 분야의 "새 인텔리"들이 비날론을 "주체과학"이라고 칭함
    • 주체과학의 성공이 뚜렷해지면서 주체사상이 더 확실하게 북한의 지배사상으로 확립됨
이태규와 리승기 비교 — 차이점과 공통점
이태규 리승기
세계과학 주체과학
리-아이링 이론
(전세계 화학 교과서에 다 실림)
비날론
(북한에만 순전히 국한)
순수과학 응용과학
공통점:
연구에 대한 강박 — 남한이 연구에 부적절한 상황이 되자 선택한 도미와 월북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경계는 애매. 비뉴턴유체의 성질은 그리스 등 실제
산업생산물에 직결되어 있었고, 아이링의 연구는 산업체의 지원을 받음
"세계과학" "주체과학"이라는 만들어진 이미지
  • 탈식민지 분단과학의 문제 — 상술한 "국제화된 한국과학"이 좋은 것이냐 참조

우장춘 (1898년-1959년) - 농학

약력

  • 1898년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 사이에 출생
  • 1916년 히로시마 현립 구레중학교 졸
  • 1916년 도쿄제대 농학부실과(동대에서 운영하는 전문대 같은 곳) 입학
  • 1919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졸업
  • 1920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기수
  • 193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 1937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기사, 다음날 사임.
  • 1937년 교토 다키이 연구농장장 1945년 다키이 연구농장 사임, 교토 장법사(절간)에 칩거
  • 1950년 귀국 (일본인 가족들은 반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장 (연구소 이름만 바뀜)
  • 1954년 학술원 추천회원 피선
  •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 과학상 수상
  • 1957년 원예시험장장 (연구소 이름만 바뀜)
  •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 수훈. 다음날 사망

가계

  • 개화파 내지 친일파 우범선과 일본인 현지처(조선에 처자식 버리고 옴) 사카이 나카 사이의 2남 중 장남.
  • 우장춘은 일본인 와타나베 고하루와 결혼. 슬하 4녀 2남.
    • 혹설에는 최초의 한국인-일본인 국제결혼사례라고 함
    • 처가에서 결혼을 반대하자 동생과 함께 일본인 후원자의 양자로 입적. 동생은 창씨했으나 우장춘은 창씨하지 않음.
  • 우장춘의 이모 사카이 와키의 남편은 악질 친일파 구연수. 그 아들이 초대 한국은행 총재 구용서.

씨 없는 수박

[대구] 30일 오후 2시 50분 대구 교외에 있는 동촌팔승관에서는 "씨 없는 수박" 시식회가 개최되었는데 동 수박은 유리나라 농학계의 지보인 우박사가 연구하여 개량된 것으로 동 석상에서 우박사는 "앞으로 5년 후면 면밀 수박의 종자를 국외로 수출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한편 "일본에서는 논 1 반보에서 현미 2석 1두를 생산하는데 우리나라에선 1석 3두밖에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종자개량 및 재배법개선의 시급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라고 강조하였다

1955년 8월 3일 경향신문

  • 교토 기반 일본 학자 기하라 히토시(우장춘과 친분)가 개발
  • 우장춘은 농민들에게 육종학의 "마술"을 보여주는, 선전 수단으로서 씨 없는 수박 시연, 시식회를 열었을 것 ("설득의 과학")
  • 자유당 정권의 지원을 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
    • 이기붕 뇌물 리스트에서 2차례 씨 없는 수박이 발견됨
    • 당시 농업과학연구소는 정권의 뜻에 좌지우지될 수 밖에 없기에 호의를 사야 할 필요성
    • 실제로 우장춘이 연구원의 군 면제를 요구해 받아내기도

애국자?

  • 통념: 우장춘은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고국을 그리워하다 결국 일본의 모든 커리어를 저버리고 귀국하여 고국의 농업발전에 힘썼다
    • 우장춘이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한국에 귀국했다는 해석은 츠노다 후사코(시오노 나나미류)의 전기 『나의 조국』(한국어판 제목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에서 비롯됨
    • 하지만 우장춘은 그런 죄책감을 표현한 적이 없고, 우장춘 귀국 당대인 50년대에는 민비 살해범들이 "실패한 혁명가"취급이었지 죽일 민족반역자 취급을 받지 않았음
  • 경계인적 정체성

"그동안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 못지 않게 노력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으며 이 나라에 뼈를 묻겠다"

  • 한국 귀국 후에도 한국어 배우지 않음. 일본어로 지시, 강의.
  • 김근배 교수의 해석: "민족주의"가 아닌 "휴머니즘"에 근거한 "한국적 과학연구" (어느 정도 시혜적 태도)
    • 열악한 한국인들이 보다 인간다운 생활을 하도록 함.
    • 한국인들이 주로 먹는 무, 배추, 고추 연구(일본에서는 나팔꽃, 페튜니아 등 화훼 연구) — 일본에서의 연구와의 차별성.
    • 채소 종자의 독립.
    • 한국농업과학연구소에서 우량품종 육성 연구 프로그램. 논문을 쓰지 않고 보고서 위주. 실천을 중시.
    • 이런 해석의 약점
      • 방법론, 주제에 있어 일본에서의 연구와 한국에서의 연구는 차별성보다 연속성이 있음
      • 우장춘이 일본에서 화훼 연구를 했던 것은 채소 연구를 일본 학자들이 선점했기 때문.

"나는 내 자신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라(일본)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전 인류의 복지를 위하는 심정으로 이 일을 한다" (1940년 한국 학생에게)

  •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 죽기 3일 전 문화포장을 받으며 했다고 전해지는 말.
    • 츠노다 후사코의 전기에 언급되며, 왜 일본에서 50년을 산 우장춘이 한국이라는 조국만 찾았을까 질문
    • 하지만 우장춘을 간호한 간호원의 수기에는 이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음
    • 갈릴레오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처럼 만들어진 역사가 아닌지?

종의 합성

  • 당시 경쟁을 통한 종의 분화가 생물학의 주류
  •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이 지배하던 1930년대 일본 사회에 큰 충격
  • 하지만 육종에서의 잡종화, 우량종자의 인위적 합성은 18세기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
  • 종의 합성이 당시 학계를 뒤흔들었다는 당대 평가는 과장된 것임.
  • 우장춘의 학위논문의 독창성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음.

이휘소 (1935년-1977년) - 물리

신상명세

  • 한국계 미국인 이론입자물리학자
  • 1952년 서울대학교 화공과 입학, 졸업 전에 물리학으로 미국 유학
  • 마이애미 학사, 피츠버그 석사, 펜실베이니아 박사
  • 26세에 펜 조교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 30세에 펜 정교수
  • 노벨상 수상자 양전닝 권유로 스토티브룩 대학으로 이적
  •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renormalization)에 중요한 역할
  • 1973년 페르미 연구소 이론물리학 부장, 시카고대학교 교수

이론물리학 업적

  • 핵력: 강력과 약력
  • 약력과 전자기력은 같은 힘 by 와인버그
    • 압두스 살람, 이휘소에게 자신이 와인버그보다 먼저 같은 주장을 했다고 주장. 설득된 이휘소는 이 이론을 "와인버그-살람 이론" 이라고 불러주고 그것이 학계에 받아들여짐
    • 약전자기력 공로로 와인버그-살람-글래쇼 1979년 노벨상 수상.
      • 살람이 수상 연설에서 "자신이 이휘소 대신 상을 받았다"는 전설.
      • 어디서부터 왜곡이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살람의 정확한 말은 "현대물리학을 10년 앞당긴 고 벤저민 리의 덕"이라고 언급해준 것이 끝
      • 즉 이휘소는 전자기약력에 기여한 학자가 아님
  • 당시 입자물리학의 게이지 이론인 양-밀스 이론은 재규격화(이론을 계산 가능하게, 쓸모 있게 만드는 것)가 안 됨
    • 이휘소는 당시 겔만-레비의 시그마 이론의 재규격화에 성공
    • 1970년 프랑스에서 열린 여름학교에서 자신이 어떻게 시그마 이론을 재규격화했는지 강의함
    • 당시 이휘소의 강연을 네덜란드 대학원생 헤리르뒤스 엇호프트가 들음. 그는 지도교수 벨트만과 양-밀스 이론 재규격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음.
    • 엇호프트는 이휘소와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를 토론하고, 돌아와서 벨트만과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에 성공함.
    • 이 연구를 1970년 말 입자물리학회에서 발표. 이휘소가 그 중요성(쿼크 기반 표준모형을 가능하게 함)을 간파. 이휘소는 엇호프트-벨트만의 증명을 물리학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바꿔서 논문을 발표.
    • 입자물리학계는 이휘소의 논문을 보고 엇호프트-벨트만 증명의 중요성을 인식. 이후 학계에서 양-밀스 재규격화에 관해 이휘소 논문이 피인용. 벨트만은 이휘소가 자기 크레딧을 훔쳐갔다고 분개.
    • 엇호프트와 벨트만은 199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이휘소가 살아 있었다면?? 그렇다 해도 노벨상은 힘들다… 양-밀스 이론 재규격화는 어디까지나 엇호프트와 벨트만의 연구였고, 이휘소의 연구가 아니었음
  • 이휘소가 살아 있었으면 "당연히" 노벨상을 받았으리라는 주장은 과장된 것
    • 1968년 귀화했기에 받아 봤자 미국인 수상자가 한 명 늘어나는 것 뿐

기초과학

존 페스토어 상원의원: "페르미 연구소 가속기가 국방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페르미 연구소 소장 윌슨: "없슘"
페스토어: "정말 이 가속기가 국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단 말인가"
윌슨: "이 가속기는 우리가 서로에게 관계를 맺는 방식, 인간의 존엄성, 문화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가속기는 우리나라에 좋은 화가, 좋은 조각가, 좋은 시인이 많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 가속기는 우리가 우리나라를 존중하고 우리나라에 대해서 애국심을 느끼게 하는 그 모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가속기는 우리 조국을 수호할 가치가 있는(worth defending for) 나라로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국방과 관련이 있지만, 그 외에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이휘소와 한국

  • 1971년 정근모 박사와 한국에서의 여름학교 개최 논의
  • 1972년 계획 전부 취소.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 중인 여름학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 … … 여름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 …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정근모에게 보낸 편지

  • 한국에 오기 싫어서 모친도 도쿄에서 만남
  • 1974년 20년 만에 첫 귀국, 서울대학교 AID 차관(기초과학 육성) 지원 심사단 (서울대학교 역사에 중요사건)
  • 국내 귀국 의사가 생겼을지 여부는 분명한 것이 없음 (카더라 통신만 있을 뿐)
  • cf) 압두스 살람의 경우: 영국에서 학위 받고, 파키스탄 귀국. 연구 환경이 너무 열악하자 다시 영국행, 임페리얼 칼리지에서 입자물리 연구소 세우고 활약. 파키스탄 재귀국, 대통령 과학자문으로 파키스탄 과학 발전에 기여

이휘소와 핵개발 신화

  • 1977년 6월 16일 일리노이주에서 학회를 가던 도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신문들은 최근 한국의 핵무기 제조 가능성 여부에 대해 계속 여론의 '경계'를 환기시키면서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는 핵무기개발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 정책은 변할 수 있는 것이며 일부 한국 과학자들은 정부에 핵무기개발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주장했다

1977년 6월 16일 조선일보

  • 한국의 핵개발은 1차사료(정부 보고서나 계획서 따위)가 남아있는 것이 없음. 모든 것이 추측성 기사나 카더라 통신들에 기반.
    • 하지만 1975년에서 1977년 사이에 박정희가 독자적 핵개발을 시도했던 것은 정황상 사실로 보임
    • 1977년 당대에 뜬금없이 신민당 의원이 제기한 이휘소 음모론 — 하지만 소리소문 없이 묻힘

이휘소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을 적에, 이 박사가 노벨물리학상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핵이론에 가장 귀중한 존재로 있었다는 점에서 본 위원은 여러 가지 지금 우리나라 사태로 보아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지 않느냐, 우리나라가 핵을 개발하게 될 경우 어쩌면 제일 먼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 박사가 아니냐. 여기에 어떤 흑막이 게재되어 있지 않느냐

1977년 6월 30일 국회 경제과학위원회 신민당 고흥문 의원 (국회 속기록)

비록 박대통령이 유신을 철폐하지 않을 경우라도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조국의 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공석하가 주장하는) 이휘소 일기 1977년 3월 20일자

  • 핵개발 신화의 확산
    • 1990년 공석하 『핵물리학자 이휘소』(소설) 출간
      • 소립자물리학자 이휘소를 핵물리학자로 묘사
      • 박정희의 편지 2통, 이휘소의 일기, 이휘소가 핵비밀을 넘기고 살해당하는 장면을 넣음 (다 픽션)
      • 이 이야기를 이휘소 모친, 박근혜에게 들었다고 주장
      • 문제시되자 "사실에 80% 사실과 20% 픽션을 섞었다"고 변명
    • 이동원(박정희 시기 외무장관, 국회의원) 1992년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이휘소의 교통사고를 미국의 방해공작이라 주장
    • 1993년 김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소설) — 이휘소와 핵무기 신화의 고착화
      • 1992년작 『플루토늄의 행방』이라는 소설을 대필작가를 시켜 3권으로 불려 개작
      • 물리학자 "이용후"가 주인공. 공석하의 책을 바탕으로 썼다고 밝힘.
      • 공석하의 책에서 나온 박정희의 편지, 이휘소의 일기를 인용. 마치 논픽션 전기를 인용하는 것 같은 착각을 줌
      • 400만 부 빅히트. 이념을 초월해 전국민이 읽음. 이후 김진명은 싸드 논란 같은 것에도 전문가(?)로 얼굴을 내밀고 있음
      • 독특한 민족주의
        • 남북협력과 반일감정: 일본의 군사적 공격을 막기 위한 남북 협력. 그 협력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핵무기.
        • 약간의 반미: 한국의 핵개발을 저지하는 CIA의 음모, 미국으로부터의 자주국방 성취
        • 핵무기 개발, 보유를 통한 아시아권 최강 국가 건설. 결말에서 일본에 핵무기를 쏴서 항복을 받아냄 (…)
    • 제자 강주상 교수, 일련의 핵개발 신화를 반박하는 기고. 김진명은 "사실성보다 관점의 의미가 중요, 허구의 진실"이라고 주장.
    • 유족이 출판 등 금지 가처분 소송. 법원은 소설 내에서 이휘소가 긍정적(?)으로 묘사되고어 국민들에게 존경과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켜 이휘소의 명예를 더욱 높아졌다고 보아야 한다며 기각. (서울지법 1995년 6월 23일 94카합9230)

이휘소: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강주상 저 이휘소 평전

  • 핵개발 서사의 흥미로운 점들
    • 1990년대의 핵개발 음모론에서는 이휘소를 핵물리학자로 묘사(공석하, 오연호).
    • 강주상 등의 음모론 비판의 핵심: 이휘소는 핵물리학자가 아니며 순수이론물리학자다. 페르미 연구소는 비밀이 없는 순수물리 연구소지 국방과학연구소가 아니다.
      • 음모론자들의 재반박: "더 어렵고 더 근본적인 소립자 연구를 했기 때문에 핵개발은 쉽게 할 수 있다"
    • 핵개발은 이론적으로는 학부생도 알 정도. 핵개발에 필요한 것은 기술자.
      • 음모론자들의 재반박: 이휘소가 직접 기계를 만지지는 않아도, 명망과 카리스마를 가진 핵개발진의 지도자로 기능할 수 있지 않느냐
      • cf) 이휘소와 안면 있던 압두스 살람은 실제로 파키스탄에서 핵개발을 총지휘. 이 양반도 이휘소처럼 입자물리학자지 핵물리학자는 아님.
  • 그전까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던 이휘소(입자물리학은 대중적일 수 없는 분야. 이휘소 본인도 일찍이 이민 가서 한국과 접점이 전혀 없음)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2016년)로 만든 것은 1990년대의 소설로 인한 논쟁

최형섭 (1920년-2004년) - 관료

신상명세

  • 1994년 와세다 대학 채광야금학과 졸
  • 미국 미네소타대학 광산학 석, 박사
  • 한국전쟁에 파일럿으로 참전
  • 원자력연구소 연구관, 상공부 상무국장
  • 1962년 원자력연구소 소장
  •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원장
  • 제2대 과학기술처(1967년 신설) 장관(1971년-1978년)
    •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추진 시기에 7.5년간 과기처 장관
    • 재외 한인 과학자 유치에 노력
  • 1977년 한국과학재단 초대 이사장

연구자의 덕목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대전국립현충원 묘비명

"스웨터 수출 기특한 일이지만 언제까지 스웨터만 팔 겁니까"
"노벨상이 목표인 사람은 여기 남아도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고국 근대화를 위해 나와 함께 가자!"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과학기술개발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경제발전과 국민복지 향상에 일차적 목표를 두어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개발전략』 — 최형섭의 과학기술정책 관점

  • 영어로 번역되어 제3세계 개발도상국에 널리 읽힘
  • 한국 공업화의 성공요인 (최형섭의 분석)
    • 정부에 의한 공업화의 청사진: 제1, 2, 3,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청사진을 실행할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
    • 국민의 적극적 참여
    • 공업화 단계의 병행추진 (핵심)
      • 수입대체산업 → 경공업 수출산업 → 중화학공업 개발 → 중화학공업 수출산업
      • 다른 개발도상국들은 이것을 직선적으로 밟음
      • 한국은 하나를 하면서 다른 하나를 병행
        • 수입대체산업 육성하면서 경공업수출산업 육성
        • 경공업수출산업 추진하면서 중화학공업 기초 닦기
        • 중화학공업 발전시키면서 구체적으로 뭔진 아직 모르겠지만 두뇌집약산업 준비해야 (이 책 쓰던 시점이 중화학공업 단계)
    • 기술도 마찬가지로 병행추진해야 함
      • 전략산업이 정해지면 이에 필수적인 기술이 적시됨
      • 그렇지만 기술 개발은 시간이 걸림
      • 따라서 지금 산업단계에서 "누군가가" 다음 단계 기술을 미리 개발해야 함 → 누구? KIST 연구원들 (KIST는 60년대에 세워져 별 쓸데없는 것들을 연구했는데 이게 다 70년대에 사용됨)
  • 과학기술 후진국은 선진국의 기술을 적극 수입해야 함. 그런데 왜 일본(과 한국)만 성공하고 다른 대다수 개발도상국은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 기술 수입의 원칙
      • 자국의 기술개발능력 없이 외국 기술을 수입만 한 나라는 실패한다
      • 어떤 기술을 수입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지 가려내는 교섭능력
      • 수입된 기술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괸리능력 필요
    • 수입기술과 자체개발의 병행, 조화가 핵심
    • 자체의 연구개발과 기술개발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나?
      • 1) 연구소, 2) 연구인력, 3) 연구개발체제의 정비
      •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최형섭 자신이 장관일 때(i.e. 박정희 시절)에 완비되었다고 주장
  • 60-70년대 과학기술정책: 연구소 + 연구인력 + 행정체제
    1.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 이후 KIST를 모델로 정출연들이 만들어짐
    2. 기술인력의 확충
      • 박정희 정권 초기 "기술계 인적조사사업"
      • 기능공 확보
        • 직업훈련법: 기업이 직원에게 기술교육을 시키면 인센티브를 줌
        • 기술자격법: 과학에 학사, 석사, 박사가 있듯 기술에도 같은 대우를 받는 학위 제정 — 기사, 기능사, 기능장, 기술사
      • 고급 기술자 양성
        • 1971년 한국과학원(KAIS) 설립 (카이스트 전신)
    3. 행정체제
      • 1967년 과학기술처 신설
      • 홍릉연구단지, 대덕연구단지, 한국과학재단, …
  • "목적기초연구"
    • 선진국은 과학 → 기술, 산업 (바네바 부시 식) 이 가능한데, 개발도상국은 이런 경로를 따르면 망함
      1. 시간이 오래 걸림
      2. 경제개발계획에 "동기화" 시킬 수 없음
    • 개발도상국에서는 기술도입, 기술적용, 자체기술능력 개발이 우선. 기초과학발전은 그 뒤.
    • 기초과학육성은 공업연구에 필요한 기초연구(basic researtch with applied objectives — 형용모순)를 해야 함 — 한국(과 일본)에서 과학과 기술은 "과학기술"로 일체화되다시피 심하게 습합되어 있음
    • 최형섭식 접근은 압축성장 산업화 시대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실제로 유효했는데, 그래서 개발도상국을 탈피하고 난 지금에 와서는?
      • 최형섭 이론에서는 한 산업단계에서 다음 산업단계의 기술을 미리 연구시작해야 하는데, 중화학 공업 이후는 무엇?

오원철 (1928년-) — 관료

신상명세

  • 1928년 황해도 풍천 출생
  • 1945년 4월 경성공업전문학교 입학
  • 1950년 12월 공군 기술장교후보생 입대
  • 1951년 9월 서울대 공대 화공과 졸업
  • 1957년 8월 공군 소령 전역
  • 1957년 9월 시발자동차회사 공장장
  • 1961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
  • 1961년 7월 상공부 화학과장
  • 1964년 6월 상공부 공업제1국장
  • 1968년 4월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 1970년 1월 상공부 광공전 차관보
  • 1971년 11월-1979년 12월 박정희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 박정희의 오른팔 김정렴과 함께 박정희의 왼팔. 권력실세 5위
  • 1974년 2월-1979년 12월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
  •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이후 숙청(국방과학연구소 물갈이). 보안사에서 두들겨 맞고 전재산 몰수. 이후 12년간 야인
  • 저서: "한국형 경제건설 (총7권)",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시-바ㄹ자동차

  • 미군 지프 엔진에 차체 조립, 1955년 8월 출시
  •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 수상
  • 1963년까지 3,000대 생산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 오원철

  • 상공부 공무원
    • 제1차 경제개발에 화학공업 부문 입안
    • 정유, 비료, 시멘트 공장 사업 추진
    • 울산 석유화학 공업단지 건설에 핵심적 역할
  • 경제 제2수석비서관
    • 방위산업 육성 총책
    • 중화학공업 추진
      • 1972년 박정희가 중화학공업에 대한 보고 지시
      • 오원철이 손으로 작성한 "공업구조개편론"제출
      • 1973년 1월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선언: 그 전까지의 경공업과 함께가는 중화학공업화가 아닌, 다른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중화학공업화
      • 공업구조개편론을 정교화, 1973년 6월 "중화학공업육성계획" 발간
      • 1974년 중화학공업기획단장

10월 유신에 대한 경제적 정당성

  • 1969년 삼선개헌: 학생운동 탄압, 야당 의원 테러
  •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 출마, 박빙으로 당선 (vs. 김대중)
  • 그 이후 총선에서 여소야대 → 정치적 입지의 불안
  • 7대 선거에서 대통령 불출마 선언 (비서실장의 불출마 공약 권유) — "여러분 앞에 내가 나와서 나에게 한 표 찍어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일 것입니다"
  • 박정희는 1971년부터 중화학공업 정책 추진, 1972년 신년사에서 이를 강조
    • 1972년 5월 오원철에게 "100억불 수출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
    • 오원철의 고민: 10년간 중화학공업의 집중육성해야 하는데 그동안 정치가 안정되어야 한다
    • 이런 오원철의 문제의식이 박정희에게 전달되었는지 아닌지는 미스테리
  • 1972년 10월 유신 선포
    • 비상조치: 의회해산, 정당활동 중지
    • 대통령 임기 6년, 연임제한 철폐, 선출 간선제,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는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는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 법관임명권 부여
    • 3권분립을 파괴, 실질적 종신집권
    • 1972년 12월 새 헌법에 의해 8대 대통령 취임
  • 이러한 친위쿠데타가 "80년 1000불 국민소득, 100억불 수출"로 정당화됨

"중화학공업화"의 숨은 뜻: 단순한 경제발전이 아니다

  • 중화학공업 = 소득 1000불 + 수출 100억불 + 방위산업 → 1석 3조
  • 중화학공업의 "민군겸용(dual use)" 특성
    • e.g. 비료, 조선, 전자, 기계공업
    • 중화학공장은 평화시에는 산업기계, 비상시에는 무기가 나오는 곳
  • 남한의 경제발전은 북과의 체제경쟁
    •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이 되면 확실히 승리
    • 이 경쟁은 향후 10년간의 "전쟁"
      • 여기서 패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함
      • 전쟁이니 국가총동원령이 필요 → 이 총동원령이 10월 유신
  • 이 경제전쟁은 제2차 한국전쟁
    • 박정희의 1973년 신년사가 제2차 한국전쟁의 "선전포고"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에게 경제에 관한 중요한 선언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하가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또 하나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내가 제창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전국민의 과학화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기술을 익히고 개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국력이 급속히 늘어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는 우리가 절대로 선진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

중화학공업은 성공, 유신은 실패?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는 실패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 아래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화와 유신 개혁을 별개의 문제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에 성공한 것은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화가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시행되도록 국가를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유신이 없었다면, 대통령은 그런 식으로 국가를 훈련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오원철 회고

후진국 경제개발과 국가의 역할

  • 후진국이 후진국으로 남는 이유
    • 저임금: 수요의 부족
    • 악순환: 자본의 부족 → 소규모 공장으로 시작 → 가격이 비쌈 → 수요의 정체, 자본축적의 어려움 → 자본의 부족 → …
    • 공장 확대가 어려움, 국제 시장 경쟁이 불가.
  • 후진국 경제로부터의 탈피
    • 선순환: 큰 공장 → 가격이 쌈 → 수요의 발생, 자본축적 → 자본의 풍부 → 큰 공장 → …
      •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을 발생시키려면 "어떻게든" 일단 큰 공장을 세워야 함 (규모의 경제 만들기)
    • 처음에는 작게 시작(내수/수출정책) → 공장 규모를 키워야 함(국제경쟁력)
      • 소규모 공장들의 경쟁을 지양
      • 핵심 산업분야들에 독점기업을 만들고 이를 지원
      • 독점기업에 의해 지배되는 경제는 자유경쟁이 아님
      • 중소기업은 자유경쟁을 하도록 둠 (선진국에서는 외려 중소기업을 챙겨주고, 대기업은 독점만 막고 자유경쟁을 시키는 것이 정상인데 한국은 반대)
      • 국가의 역할: 수요의 유발 (특정 공업 붐 일으키기, 방위산업을 통한 수요조절)
  • 대규모 중화학공업이 후진국을 탈출하는 열쇠
    •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극심한 정경유착, 한국형 재벌이 성장.

중화학공업을 통한 후진국 탈피

  • 6대 공업 선정: 철강, 조선, 기계, 전자, 석유, 자동차
  • 철강: 포항제철 1960년대부터 추진. 1973년에 철강 생산 시작. 1년만에 매출 1억불 흑자
  • 조선; 울산의 현대조선소, 대우의 거제도 옥포조선소 등이 건설. 해외의 대형 탱커 등을 수주해 건조.
  • 기계: 창원기계꽁업단지 건립. 플랜트의 국산화
  • 전자: 정부 지원을 통해 전자산업이 수출산업으로. 1977년 삼성전자가 컬러 TV 수출 시작
  • 석유: 1960년대부터 화학섬유산업 → 석유화학산업. 1972년 울산석유화학단지 완공. 1979년 여천석유화학단지 완공.
  • 자동차: 현대자동차 1975년 국산화율 90%의 포니 개발. 1976년부터 수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