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해방정국과 과학기술

서울머의 탄생과 국대안 파동

  • 1945년 8월 16일 경성제국대학 → 경성대학 (총장 김태준: 경성제대 강사. 조선인 교수는 없었음)
  • 미군정 1946년 7월 "국립종합대학 설치계획안(국대안)"
    • 경성제국대학,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공업고등학교 등 9개 교육기관 통합
    • 총장으로 엔스테드 박사(육군대위) 임명
  • 국립서울대안 공동대책위원회
    • 학원의 관료화; 미군정의 학원간섭; 단과대학의 자주성 상실 등을 이유로 국대안 반대
    •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이공학부 교직원 38명이 국대안 반대의사 표명
  • 1946년 10월 15일 서울대 개교
    • 단과대학교 학생들 동맹휴학, 교수 일부 사의 표명
    • 총 520명 교수 중 380명 파면, 사임. 46년 6월 서울대 문리대 교수 물리학자 도상록 횡령 누명 쓰고 파면. 학생 4000여명 퇴학. 2500여명은 구제되지만 1500명은 그대로 퇴학.
    • 이공계 교수진의 40%에 해당하는 22명 + 학생들이 월북. 당시 학자 월북의 큰 이유 중 하나가 국대안 반대 내지 실망

"과학조선"을 위한 노력과 좌절

  • 조선학술원 등 기관, 협회의 설립: 조선공업기술연맹, 조선과학기술연맹, 생물학회, 약학회, 의학회, 조선화학회…
  • 과학잡지의 창간: 현대과학, 대중과학, 인민과학, 과학전선…
    • "우리 사회의 혼란이 과학기술정신의 결핍"
  • 좌우익이 모두 공유한 이념
    • 과학기술의 발전 → 신생조국 건설에 기여
    • 과학대중화, 비과학적 태도 척결
    •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조선교육심의회

  • 미군정 산하 "조선교육심의회" 중 고등교육분과 중 "과학교육진흥": 1946년 초 이태규 임명
  • 안동혁의 "공업기술 비상대책" (1946년)
    • 일본인이 운영하던 기업,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과학기술인력, 전문학교 이상 졸업의 고등과학인력 수요 추산.
    • 일제시대 종사하던 10,330 명(해방되며 대부분이 일본으로 귀국). 현상유지에 새로 뽑아야 할 인원수 39,830 명.
    • 최근 40년간 배출된 한국인 졸업자 1,876 명. 그 중 실제로 유능한 사람 1,106명.
    • 당시 경성대학이공학부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평양공업전문학교 졸업생 다 합쳐서 100명이 안 됨
    • 어디서 어떻게 38,000명을 더 뽑지? ← 교육기관의 대폭 확충 필요성
  • 이태규의 과학기술부 설치안
    • 과학기술부를 문교부, 상무부에서 독립, 산하에 기술행정국, 특허국, 과학진흥국, 제1연구국, 제2연구국 설치하여 일제시대에 따로따로 운영되던 전국의 20여개 과학기술 연구기관을 통제하도록
    • 과학심의회 및 그 산하 종합연구소 설립 제안
    • 탁상공론이 아니고 미군정 산하 위원회에 정식으로 제안된 안. 엄계의 높은 기대감
    • 종합연구소는 일제강점기부터 과학기술인들의 드림, 로망
    • 이태규의 계산: 이 요구가 무리더라도 문교부 산하에 국장급으로라도 과학국을 만들어 주겠지?

"우리가 과학기술부의 설치를 강조하는 이유의 하나는 체제에 그 중핵기관인 종합연구소를 창설하려는 데 있다"
"미국의 럭펠러 연구소, 소련의 과학학사원연구소, 독일의 카이저윌헬음 연구소, 일본의 이화학연구소와 같은 종합연구소를 우리 조선에도 창설하고 싶다"

이태규

미군정의 판단

  • 과학교육의 확대는 대규모 예산 소요.
  • 단과대 위주의 일본식 교육기관들은 분산되어 예산낭비.
  • 일제의 적산기업들은 기술집약적이라기보다 노동집약적. 고급 기술인력이 필요없다고 판단.
    • 이런 사정의 결론이 "국립서울대학교"로의 통합인 국대안
  • 과학기술부, 혹은 심지어 문교부 내의 과학국도 설립이 안됨.
  • 국내 과학자들의 요구는 모두 거절당함. 하나도 들어준 게 없음
    • 좌절된 "과학조선"의 꿈, 교육과 연구의 기회
    • 우리는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미군정은 줄여야 한다고 결정 → 학교가 줄면 교수와 학생 수도 주는 것이 명약관화.
    • 식민지 시절 좌절되어 왔던 과학기술에 대한 갈망, 원대한 비전이 모두 묵살, 좌절, 그 좌절을 상징하는 존재로 등장한 국대안 → 국대안 파동.
    • 국대안 투쟁 실패 이후 남한은 이제 텄다고 판단한 학자들은 월북을 선택(북한은 인프라는 있지만 학교가 없는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