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식민지 과학기술을 넘어서

일제강점기의 과학기술자들

  • 이태규, 이승기, 김양하 — 일본에서 활약
    • 일본 사람도 얻기 힘든 직위, 연구를 수행

일제강점기의 박물학자들

석주명(1908년-1950년)

  • 평양 출생
  • 개성 송도고보,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졸(1929년)
    • 지도교수 오카지마 긴지의 영향으로 조선 나비 연구
  • 송도고보 교사(-1942년)
    • 조선 나비는 일본, 서양 과학자들의 연구가 많이 된 분야.
    • 일본인들은 한국 나비가 844종이라고 정리. 석주명은 동종이명을 밝혀 248종으로 압축
    • 미국 지질학자 모리스와의 우연한 인연(만주에서 경성으로 돌아가던 모리스가 개성을 경성으로 혼동), 미국의 박물관과 동물표본 교환. 하버드 대학교 비교동물학과와 교류.
    • 영국 왕립학회에서 연구비를 받아 한국의 나비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1940) 작성, 출판. 일제시대 유일한 영문 연구서.
    • 평생 75만 마리 나비 표본 수집. 철저히 "조선산" 나비 연구
    • 나비연구를 자연과학에서 역사, 미술로 확장 (나비학이 국학의 일부. 일본 학자와 협력, 교류한 적이 한 번도 없음)
  • 제주도 생약연구소 근무. 방언연구(최초의 제주어 연구).
  • 해방 후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
  • 1950년 국립박물관 재건회의에 가다 남한군에게 피격당해 사망 (어깨 부딪혔다고 인민군 소좌로 몰아 학살당함)

조복성(1905년-1971년)

  • "한국의 파브르"
  • 평양고등보통사범 — 생물 교사 도이 히로노부(1884년-?)의 영향
  • 황해도 해주에서 교사를 하다 경성제대 예과 교수 모리 타메조(1884년-1962년)의 조수(조교 이상 강사 아래)로 연구활동
  • 일본인 위주의 조선박물학회 활동. 최초의 생물학 논문 「울릉도산 인시목」(1929년)
  • 1930년대 경성제대의 만주 연구에 참여
    • 1931년 만주사변, 관동군의 여론조작 시작. 경성제대는 만몽문화연구회, 대륙문화연구회 결성
    • 제1, 2차 몽강학술조사(군인들 호위를 받음)에 모리 타메조 참여, 조수인 조복성도 따라감.
      • 모리 타메조: "만주는 사막이 아니라 초원. 생명체, 물자, 동물이 풍부"
    • 단순 침략이 아닌 학술조사의 이유: 일본이 구상한 동아신질서 — 만주, 대륙문화, 정치경제, 환경, 성격 등 연구
    • 만주의 곤충에 대해 많은 연구, 논문. 난징, 항저우 박물관 파견근무(리터럴리 흑역사. 박물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밝혀진 것이 없음. 스스로 밝힌 것도 없음)
      • 만주에 대한 논문 없고 일본인과 교류 없는 석주명과 비교
  • 조선박물연구회 활동. 곤충 우리말 이름. 과학지식보급회 관여.
  • 해방 이후 국립과학박물관장
  • 저서 『곤충기』(1948년)

정태현(1883년-1971년)

  • 농사를 짓다 양잠학교, 수원농림학교 임학속성과 입학. 일본의 "문명화의 약속"을 믿음
  • 수원 임업사무소 발령. 한일합방 이후 강등, 감봉. 이후 비슷한 일의 반복
  • 조선 식물을 연구하던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의 조수가 됨
    • 울릉도 탐사 수행, 조선총독부 『울릉도 식물조사사』(1918년)
    • 나카이는 서양인들이 일본 식물종을 분류했듯 조선 식물종을 자기가 분류하고자…
    • 거의 주종관계에 가까운 수직적 권력관계
  • 임업시험장의 이시도야 츠토무: 보다 수평적이고 호혜쩍인 관계.
    • 이시도야 『조선삼림수목감요』를 정태현과 공저. 조선의 전통과 문화에도 관심.
    • 이시도야가 있을 때는 임업시험장에서 정태현의 지위도 괜찮은 편
  • 이시도야가 경성제대로 발령나가자 정태현은 지위 추락
    • 식민지 지식인의 전형. 고위직에 편입될 수 있지만 그것은 구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정적인 일본인 개인을 우연히 만나 그 호의에 의한 것이며 끈이 떨어지면 순식간에 지위 하락.
    • 조선인이라는 자각.
    • 조선문화에 관심, 특히 실학 연구
    • 조선박물연구회의 『조선식물향명집』(1937년) 출간
  • 해방 이후 전남대, 성균관대 교수 역임.
  • 학술원 회원, 국민훈장 모란장, 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

사례비교:

  • 석주명은 "조선" 나비를 연구, 국어학(제주어 연구), 국사 등 민족문화와 연결
  • 박물학은 식민지 과학에서 예외적으로 조선 사람들이 적극 참여한 유일한 과학분야.
    • 연구 대상이 조선 특화적인 것 (조선의 동식물)
    • 화학이나 물리학처럼 값비싼 설비, 고등한 교육 필요없음
    • 그러나 이런 분야도 우연한 인연, 동조적 일본인의 후원에 힘입음
  • 일본인의 동조는 총독부가 조선인의 과학활동을 국가구조적으로 지원했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님. 자신들의 필요에 의한 조수 채용 혹은 우연히 발전한 호혜적 관계
  • 이광수 소설에서 봤듯 조선인의 삶에 깊게 뿌리박히지 못한 과학. 문명의 상징인 과학에 대한 동경, 갈망과 안 맞는 옷을 입은 불편감이 공존.
  • 조복성, 정태현은 친일파인가? 부역과 민족운동의 경계는?
    • 일본에 협력해 배운 것을 조선을 위해 기여한다?

식민지 과학의 한계

  • 과학기술 분야 대학의 부재
    • 경성고등공업학교 (공업전습소가 발전, 1916년)
      • 1939년 경성광산전문학교 분리
    • 연희전문 수물과 (1924년)
    • 경성제국대학 (1924년 — 의학부, 법문학부)
      • 고등학교 체제가 부실하기에 경성제대 예과가 역할을 대신. 교양 수준의 과학지식 교육
      • 이공학부는 1941년 설립
    • 일본은 물론 중국, 인도와도 다름
      • 국내박사를 적극 육성하는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인도에도 현지 대학교 교수는 인도인들
      • 다른 식민지와 비교해 보아도 교육의 기회가 심하게 제한되어 있던 드문 경우
  • 해외 유학은 개인적 결정
    • 관비유학은 매우 힘들고 정책에 따라 좌우됨
    • 민족자본가, 문중회, 가족의 개인적 지원
    • 과학기술 경시
  • 졸업 후의 진로도 밝지 못함
    • 식민지 상황: 고급 일자리는 일본인에게
    • 경성고공에 한국인 교사는 한 명도 없었음
    • 총독부의 과학기술 관련부서, 중등학교 교사
    • 학회 결성 등을 꾀하기 어려운 상황 → 제도화, 전문화의 부재

식민지 과학자의 고충

  • 과학은 장기적 안정이 필요한 학문, 직업
    • 오랜 공부에 대한 보상, 인정이 따라야 함
  • 식민지 상황: 과학기술자의 꿈을 원대하게 갖지 못함. 장기적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못함
  • 당시 사회과제 — 민족독립, 차별철폐, 물산장려
  • 과학기술의 수준이 낮음
    • 사회과제에 관심이 있는 사회 상층부 관심에서 멀어짐 (의사가 되어 하방을 한다던지,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사람 도와준다던지)
    • 중소농민, 소상업자 출신이 관심을 가짐
    • 사회문제 대신 자기 출세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몰림
    • 과학을 한 동기: 남들이 안 해서, 내성적이어서, 수학을 잘 해서…
  • 과학운동이 계몽, 문명화 등을 주장했지만, 전반적으로 조선 과학은 독립, 저항, 진보, 발전 같은 당대 중요 이념들과 관련을 맺지 못하고 발전하게 됨
    • 사회 과제와 과학 진흥이 연결이 안 되고 멀어짐
    • 박성래 교수의 "중인의식": 양반 사대부들은 학문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학문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지 고민하는 사람들. 반면 중인들(산학자, 천문학자, 의원…)은 "내 할일이나 잘 하면 돼"라는 마인드 — 큰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고 자기 할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