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상업화

70년대 이후사

배경

  • 군대의 대학연구 지원 축소 또는 선별화 ← 학내 구성원들의 군사연구 반대 & 특수연구소의 독립
  • 전후 베이비붐의 종식
    • 1975년을 정점으로 대학 신입생 수 감소 (등록금 수입 감소)
    • 그전까지 받아주지 않던(교육법의 목적은 악의 축 소련에 맞서는 미국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 외국인 학생 수 증가
  • 1970년대의 경제성장 둔화(미국 제조업 좆망)를 극복할 수 있는 대학의 역할 강조
    • 미국 제조업의 기술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 (전자, 자동차)
    • "순수연구를 하면 언젠가 도움이 될 거야" ← "그딴 거 말고 당장 도움이 되는 걸 내놓으라우"
  • 법률적 환경 변화
    • 1980년 다이아몬드(특허청장)-차크라바티(GE 기술자) 판례: 살아 있는 생명체(원유 분해 미생물)에 대한 특허 허용 (지방법원에서 3대 2, 대법원에서는 5대 4)
    • 베이-돌 법: 연방정부 지원 연구를 통해 얻어진 특허에 대한 대학의 소유권 허용
    • 1980년 이전에는 외부의 특허관리기관(연구법인)에 의회

유전공학

유전공학

  • 1970년대 DNA화 재조합 연구에서 출발해 새롭고 흥분되는 응용 분야로 각광
  • 시험관에서 DNA 재조합(recombining) + 박테리아나 다른 유기체 내에서 DNA 복제(cloning) + DNA 암호를 단백질이나 RNA 분자로 발현(expressing)
  • 미생물, 식물, 동물(+인간)의 유전적 변형을 통해 유용한 물질 생산, 작물 개발, 질병 치료를 목표
  • 1980년대에 본격화된 지식 사유화, 상품화, 민영화 흐름의 첨병
    • 결과 발표방식 변화: 학술논문 → 의회 청문회, 기자회견, 보도자료
    • 특허 등 지적재산권 부각, 과학계의 공유문화 대체
    • 대학-기업 연계 강화(대학교수의 기업가화): 과거 산업체 과학자들은 교수직이나 연구자직 때려치고 기업 취직, 유전공학자들은 대개 교수가 장사를 함

시발점

  • 스탠퍼드 대학의 스탠리 코헨(순수과학자): 플라스미드와 항생제 내성 연구
  • UCSF의 허버트 보이어(히피): 당시 막 발견된 제한효소(DNA를 자르는 가위) 연구
  • 1972년 11월 둘이 호눌눌루 학회에서 첫 만남 → 각자의 전문성을 결합해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기로 합의
  • 1973년 3월 플라스미드와 제한효소를 이용한 DNA 재조합 및 복제 성공, 이 해 말에 고등동물(아프리카 두꺼비)의 DNA를 재조합 & 복제하는 데 성공 → 박테리아를 ‘살아 있는 공장’으로 만들어 인간에게 유용한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상업적 가능성 제시

상업화로 가는 길

  • 1970년(연구소가 날아가서 수입이 반토막났던 그 때), Sponcered Project Office → Office of Technology Licensing
  • OTL의 특허사무 책임자 닐스 라이머스가 DNA 재조합 연구의 상업적 잠재력 간파 → DNA 재조합 기법에 대한 특허출원 제안
    • cf. 당시의 대학 생물학의 맥락에서는 대단히 파격적: 물리학, 화학과 달리 당시 생물학은 대체로 ‘순수’ 연구 추구
  • 1974년 코헨, 보이어의 동의를 얻어 UCSF와 공동으로 특허출원 절차에 돌입 → 과학계의 전통적 문화와 충돌: 저자(공로 인정) vs. 발명가(돈벌이 수단) → 둘은 찍혀서 노벨상 못 받음
  • 벤처자본가 로버트 스완슨이 보이어에게 DNA 재조합 기법에 기반을 둔 회사 설립 제안 → 1976년 4월 제넨테크(Genentech) 설립

반문화의 영향

  1. 상아탑에서 벗어난 생물학
    • 1960년대 군사 연구 반대운동: 사회적으로 적절한 연구를 대안으로 제시 (“Research Life, Not Death”) → 연방정부의 정책 변화 유발
      • ex. 1971년 닉슨의 “War on Cancer” 선언
    • 1960년대까지 생물학계를 풍미하던 순수 연구 이데올로기에 문제제기 → 좀더 실제적인 주제를 탐구하도록 자극 → 보이어와 같은 과학자들이 DNA 재조합의 상업적 가능성 추구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함
      • cf. 코헨은 전통적인 academic biology의 이상 고수
  2.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생물학 → DNA 재조합 논쟁
    • 1973년 6월 보이어의 고든 회의(Gordon Conference) 발표 이후 재조합 DNA가 환경이나 인체에 유해할 가능성 우려 제기 → 미국과학원(NAS)과 의학원(Institute of Medicine)에 공식 서한 발송
    • 1974년 재조합 DNA 위원회 결성(폴 버그가 의장) → 이 해 6월 특정한 DNA 재조합 실험에 대한 자발적 일시중지(moratorium) 호소 → 과학자들, 18개월간 연구 중단
    • 1975년 2월 아실로마 국제회의에서 DNA 재조합 연구 규제를 위한 지침 논의
      • "격리(containment)" 개념의 등장 — 위험도에 따라 EK1-EK3, P1-P4 등급으로 분류
      • 연구를 시작한 것도 과학자들이고, 연구를 일시적으로 중단한 것도 과학자들이고, 연구 재개를 위한 지침을 마련한 것도 과학자들 (모두 과학계 내부 논쟁)
    • 1976년 6월 NIH의 규제 지침 공포: 위험 정도에 따라 DNA 재조합 실험 등급 분류 (아실로마 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
    • 1976년 이후 논쟁이 대학이나 (P3, P4) 연구소 인근 지역사회로 확산(케임브리지 등)
    • 지방 및 연방의회 차원에서 DNA 재조합 연구 규제 법령 제정 시도쟁
      • 하지만 다 부질없고, 과학계 내부 논쟁의 결과물인 NIH 규제지침만 생존

상업화의 승리

  • 1977년 11월 제넨테크가 DNA 재조합 기법을 써서 인간 단백질 somatostatin 생산 성공 발표
  • 1978년 9월 인간 인슐린 유전자 조립 + 인슐린 단백질 생산 성공 → ‘박테리아 공장’의 전망이 실제로 실현 가능하다는 강력한 증거
  • ‘수문을 열다’
    • 1980년 6월 다이아몬드 vs. 차크라바티 판결: GE의 과학자 아난다 차크라바티에게 ‘기름 먹는 박테리아’에 대한 특허 부여 (최초의 생명 특허)
    • 1980년 12월 코헨-보이어의 DNA 재조합 특허 부여 → 1997년 특허권 시한 만료시까지 2억 5천만 달러의 특허수입
    • 1980년 10월 Genentech 증시 상장 → 1980년대 이후의 열광적 생명공학 열풍의 시발점
    • 제약회사 Eli Lilly가 유전자조작 인슐린의 동물실험 시작(1979) + 상업적 생산(1982.10)
    • 1984년까지 생명공학에 누적 투자액 30억 달러

상업화 시대의 산업연구

R&D 투자의 양상 변화

  • 1970년대 이후 기업 R&D 투자액 급증
    • ← ‘지식기반 산업(knowledge-based industry)’의 부상
    • → 1980년을 기점으로 연방정부의 R&D 투자액 추월
  1. 산업연구소의 변화와 몰락
    • 1960년대 말 이후 연구의 주도권이 개별 과학자에서 부서장으로, 다시 최고 경영진으로 상향 이동
    • 군대와 마찬가지로 기업들도 "기초과학"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남
    • 기초연구에서 제품개발로 활동의 중심축 변화: R에서 D로 (← 1970년대 이후의 경쟁력 압박)
    • 1980년대 말~1990년대에 반자율적 중앙 연구소 중요성 축소
    • “연구 대학살(Research Massacre)”: 연구소에 대한 지원 축소, 분리, 독립의 물결
      • RCA Sarnoff: SRI International에 매각, 1987년에 Sarnoff Corporation로 독립
      • AT&T 벨 연구소 (노벨상 수상자가 여섯 명 있던 위대한 연구소): 1989년부터 규모 축소, 1996년에 Lucent Technologies의 일부로 분사, 2015년에 노키아에 팔려 현재 노키아 산하
      • 웨스팅하우스 피츠버그: 연구소 인력 감축 이후 지멘스에 매각
      • 철강(U.S. Steel)이나 석유(Gulf Chevron) 기업들은 아예 연구 부문 폐지
      • IBM: 1995년까지 연구 예산의 1/3 감축, 요크타운 하이츠 폐지, 취리히 분사
    • 이유
      • 1970년대 "경영 컨설팅", "구조조정"의 시대: 미국 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비대한 미국 기업의 복합적 구조에서 찾음 (신자유주의적 접근) → 기업 내부의 다각화, 수직적 통합 후퇴
      • 레이건(시발놈) 시기 시장지상주의의 득세 → 반독점 정책의 약화
  2. 기업 연구의 외주 관행 확산
    • 점점 더 많은 연구가 자금을 대는 기업의 테두리 바깥에서 수행
      1. 연구 목적 기업
        • e.g. 제약 분야에서 계약연구기업(contract research organization, CRO)이 신약 임상시험 수행.
        • 임상시험이 어떻게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지: 동유럽 구 사회주의권, 아프리카, 인도 등을 임상시험지로 사용 (존 르카레의 the Constant Gardener)
      2. 2 대학(연구 공원, 대학 창업회사 포함) e.g. 유전공학/생명공학 분야
  3. 기업 연구의 세계화
    • 연구 용역을 낮은 임금과 약한 규제의 환경으로 이전 → 규제 차익(regulatory arbitrage)을 추구
    • 제약, 전자, 컴퓨터 소프트웨어, 원격통신 등에 집중 가능케 한 요인들
      • 저비용의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기술 활용 가능
      • 무역관련 지식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 협정) 등을 통한 지식재산권 체계의 전지구적 표준화

상업화 시대의 거대과학

  • HGP vs. SSC: 거대과학의 “새로운” 모델과 “낡은” 모델 — 『프리즘』에 관련 논문 한국어판 수록

인간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 처음엔 기초연구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기업들이 뛰어들어 혼탁화, 조기에 종료

  • 배경
    • 1970년대 영국의 프레데릭 생어와 미국의 월터 길버트, 앨런 맥섬이 고안한 DNA 서열분석 기법에 근거
    • 1980년대 중반에 칼텍의 르로이 후드가 자동화된 DNA 서열분석기 개척 → Applied Biosystems, Inc.에서 생산 판매
  • 시작
    • 1984년 UC Santa Cruz의 총장 로버트 신사이머가 처음 제안
    • 1986년 미국 에너지부의 찰스 드리시가 로스앨러모스에서 워크샵 조직
      • 오랜 방사생물학 연구 경험, 연구 프로그램 다각화 추구
      • 월터 길버트가 인간 게놈 서열분석을 성배(Holy Grail)에 비유
    • 게놈 서열해독을 둘러싼 논란: 소규모 연구 희생, 거대과학의 관료화, 낭비적 연구비 소모
    • 1988년 2월 NRC 보고서가 프로젝트를 긍정적으로 조명
    • NIH의 개입
      • 제임스 왓슨을 National Center for Human Genome Research의 소장으로 영입 → 이후 프랜시스 콜린스로 교체
      • 1990년 프로젝트 공식 출범: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연구소들의 국제적 네트워크 형태 (기간 15년, 비용 30억 달러)
    • 영국: Wellcome Trust의 후원으로 1992년 Sanger Centre 설립 (선충 연구자 존 설스턴이 책임자)
  • 상업적 기획과의 경쟁과 성공
    • 상업화를 둘러싼 HGP 내부의 이견 표출 (NIH, Wellcome, 개별 연구자) → 1996년 “버뮤다 원칙”에 합의: 당시 뜨고 있던 인터넷에 염기서열이 밝혀지는 족족 업로드하기 (데이터의 신속한 공개 천명)
    • 상업적 게놈 해독
      • 버뮤다 원칙에 동의하지 않은 연구자들이 이탈
      • NIH 연구자였던 크레이그 벤터가 1992년 비영리 회사 TIGR 설립
      • 1998년 Applied Biosystems의 후원을 받아 Celera Genomics 설립 → 공공 프로젝트와의 경쟁 선언 (200-300개 특허출원 목표)
      • 게놈 전쟁(1998년-1999년 세기말): HGP와 셀레라의 격렬한 싸움. HGP "인류의 공동유산을 특허내고 사유화하겠다는 미친 놈들" 셀레라 "국민 세금이나 축내는 밥버러지들"
  • 공공 프로젝트에 미친 영향
    • 셀레라의 모회사(…)에게 설비 구입. 어플라이드 바이오시스템스 입장에선 셀레라가 실적을 내면 특허를 가지니 그것대로 좋고, 셀레라가 실적을 못 내도 HGP 쪽에 기계를 팔아먹으니 좋고
    • Wellcome Trust, NIH가 그에 맞춰 연구비 지원 증액
      • Cf. 언론에서 이를 “경주”로 그려내기 시작
    • 게놈 “초안(working draft)” 마련에 집중
    • 5개 센터에 게놈 해독 노력 집중: 독일, 일본 배제 (국제 협력 퇴색)
    • 2000년 6월 26일 미-영 공동 기자회견에서 초안 완성 발표
    • 2001년 2월 Nature(HGP) 와 Science(셀레라) 에 각각 논문 발표
  •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
    • 정부가 출원하는 기초연구로 시작 → 돈 냄새를 맡은 기업이 끼면서 경쟁화
    • 그런데 기업간 경쟁도 아니고 공공(정부 출원)과 기업(벤처)이 서로 경쟁하는 전무후무의 사태
    • 결국 기간과 비용을 모두 단축해 종료되는 발전적 결과가 나옴
  • 인간게놈 프로젝트에 관한 연구는 아직 완료되지 않음. 분쟁의 당사자들이었던 연구자들(설스턴, 벤터 등)의 서로 상충되는 회고록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서로 죽일 놈이라고 주장 중).

초전도 슈퍼충돌기(Superconducting Supercollider; SSC): 냉전기를 풍미했던 논리의 연장선에서 진행되다 실패한 사례

  • 배경
    • 냉전기 미국은 국가 안보와 국제적 위신 유지를 위해 거대한 입자가속기 건설 지원 → 1980년대까지 고에너지물리학과 연방정부의 밀월관계 유지
    • 소련이 아닌 유럽이 새로운 경쟁자로 부상: 1983년 CERN이 세 가지 boson(Z0, W+, W-) 발견 발표
    • 힉스 입자(Higgs boson) 검출을 위한 초거대 입자가속기 건설 요구
  • 건설
    • 1982년 기자회견에서 Fermilab 소장 레온 레더만이 초전도 자석을 이용한 국제적 입자가속기를 미국에 건설 제안
    • 1983년 CERN의 발표 이후 미국의 과학적 우위를 되찾기 위해 본격 추진
    • 1986년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에서 계획안 제시
      • 1990년대 초 완성, 비용 30억 달러, 둘레 52마일, 40TeV 달성 (CERN의 60배)
      • 근본적 수준의 물리 세계 탐구 + 새로운 세대의 물리학자 양성, 컴퓨터 기술의 발전, 새로운 의학적 응용
    •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의 재가 (예산 44억 달러) → 1989년 의회의 지원 결정 (예산 59억 달러)

“물론 과학자로서 우리는 해외의 동료 과학자들이 이뤄낸 훌륭한 업적에 기뻐해야 한다. 우리의 우려는 SSC가 1990년대에 제공할 기회를 포기할 경우, 단지 우리나라의 과학뿐 아니라 국가적 자존심과 기술적 자기확신이라는 폭넓은 문제에서도 손실이 입게 될 거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미국이 대부분의 것들에서 최고였다. 다시한번 그렇게 되어야 한다.”

1985년 글래쇼 & 레더만

  • 종언
    • 다른 물리학 분야 연구자들의 반감 (존 슈리퍼, 필립 앤더슨)
    • 1989년 설계 변경을 통해 제작비가 82억 5천만 달러로 상향 조정
    • 연방 정부 이외의 자금원 탐색에서 성과 거두지 못함 (적극성 결여)
    •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이 프로젝트 기간 3년 연장 발표 (예산 110억 달러)
    • 1993년 10월 하원 표결에서 프로젝트 지원 취소 결정 → 냉전 이후 변화한 우선순위 반영 (“전략적” “목표지향적” 연구로 중심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