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68과 70년대

총의의 종식

Consensus (선형적 과학기술모델, 기초과학 중시, 과학연구의 순수성에 대한 신화…)의 종막

1960년대 후반의 변화

  • 새로운 사회운동의 등장과 부상 (반핵운동, 환경운동, 민권운동, 페미니즘 등)
  • 베트남전의 실패: 1965년 존슨의 월남전 추가파병 결정 이후 전사자 수, 전비 규모 급증
  • 대학 내 소요: 베트남전 반대, 군사연구 반대 → 대안적 과학 체제 주장
  • 원자탄 투하 이래로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비관적 논의 확산 (허버트 마르쿠제, 자크 엘륄, 루이스 멈퍼드)
  • 엘리트 과학자-정치인 밀월관계 종식임
    • 아이젠하워, 케네디 시절에는 과학자들이 대통령의 자문단으로 기능, 하지만 존슨 말기, 본격적으로는 닉슨 때부터 상황 변화, 과학자들이 하는 말을 안 들어처먹음
    • 대표적인 사례: 탄도탄 요격체계 ABM을 과학자들(텔러 제외 ㅋ)이 온갖 근거로 반대했지만 닥치고 밀어붙임
    • 과학자들이 사표 던지고 나간 자리에 방위산업체 공학자들이 등장, "군산학"에서 "학"이 빠지면서 문자 그대로 "군산복합체"가 되어버림
    • 과학, 국가 안보, 국가 위신 사이의 자명한 연관성에 대한 총의 붕괴
    • 전후 과학 체제의 중대한 전환기

학내소요

1960년대 중반 이후 대학의 정치적 변화 → 국방 기구와 민간 기관(대학) 사이의 연관에 대한 근본적 의문제기

배경

  • 1950년대의 정치적 분위기 (반공주의) 해빙
  • 2차대전 후 (특히 스푸트니크 충격 후) 과학 연구에 대한 대대적 지원 → 대학에 자리잡은 과학자 급증, 평균 연령 하락
  • 대학을 휩쓸고 있던 베트남전 반대 운동: 민주주의학생연합(Students for Democratic Society, SDS) 등 학생운동 단체가 주도
  • 대학에서의 군사연구에 대한 반대: 대학의 기관 및 연구소와 군대와의 밀월관계를 조사, 폭로

MIT

  • 1969년 “March 4” 운동
    • 1968년 11월, 4명의 MIT 대학원생들이 조직화 시작 → 과학행동조직위원회(Science Action Coordinating Committee, SACC) 결성
    • 처음에는 전쟁 반대 탄원 서명운동 조직: 교수집단(촘스키 등)의 지지 & 참여
    • 1969년 1월 하루 연구중단을 캠페인 방편으로 제안 → 수십 개의 다른 대학들로 확산
    • 과학의 “오용”이 아닌, 과학 그 자체의 제도적 기반(대학)과 군대의 지원을 받는 대학 연구에 대한 공격 (좀더 온건한 교수집단과의 온도차)
    • Cf. 우려하는 과학자동맹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 3월 4일: 1,400 명이 참여해 군사 연구의 전환, 군비 통제, 대학-정부 관계, 지식인의 책임에 대한 논의 → “전쟁 연구”와 “전환”을 당면 의제로 올려놓음

유체역학연구소(Fluid Mechanics Laboratory): '전환'의 성공적 사례

  • MIT 기계공학과 산하의 학제적 연구소 중 하나
  • 1967년까지 군대의 지원을 받아 제트엔진 연구와 우주선 및 탄도미사일의 대기권 재진입 물리학에 치중(교수 6명, 직원 1명, 대학원생 20명, 연간 예산 30만 달러)
  • 1966년 말 연구소 구성원들이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 연구 방향을 "사회적 지향을 가진" 문제들로 재전환하기로 결정 (대기오염, 수질오염, 생의학 연구, 탈염)
  • 학과장 애스처 샤피로(제트엔진→생의학), 로널드 프롭스틴(탄도미사일→탈염), 제임스 페이(분자열역학→대기·수질오염)
  • 1969년 60만 달러의 연간 예산 중 2/3가 민간 연구(10개 프로젝트), 대학원생 절반이 민간 산업 취업

계기연구소: 분리(divestment)냐 전환(conversion)이냐

  • March 4 이후 급진적 학생들의 요구: 방위산업과의 협동교육 강좌 폐지, 기밀 연구 및 논문에 대한 학술적 인정 중단, 전쟁관련 연구 중단, 링컨 연구소와 계기연구소의 우선순위 변화
  • 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계기연구소가 집중적인 공격 대상 → 1969년 4월 22일 50여명의 학생들이 포세이돈 미사일 개발에 항의하는 연구소 방문 시위
  • 4월 25일 MIT 총장 하워드 존슨이 Review Panel on Special Laboratories (“Pounds Panel”) 소집: MIT에서 특수 연구소들의 역할 재평가 → 연구 프로그램의 다각화, 기밀연구의 비중 축소, 캠퍼스와의 협력 강화, 미래의 연구 계약을 관장할 감독위원회 설치 권고
  • 9월 감독위원회 설치, 계기연구소 소장을 토목공학자 찰스 밀러로 교체 (드레이퍼는 자문위원이자 기술 책임자로 잔류)
  • 드레이퍼와 연구소 선임 직원들의 반응: 민간 기술 개발에 들어갈 1000-1500만 달러를 어디서 융통할 것인가?
  • 11월 5일 새벽 350명(MIT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대)의 학생 시위대가 계기연구소 앞 피켓 시위
  • 연구원들의 냉담한 반응:

“내가 설계하고 있는 것이 언젠가 몇 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데 쓰일지도 모르죠 … 난 신경 안 써요. 그건 내 책임이 아녜요. 나는 흥미로운 기술적 문제를 제시 받았고 그걸 푸는 데서 재미를 느끼는 것뿐이에요.”

  • 학내의 광범한 논의와 논쟁 촉발 → MIT 당국의 중대한 결단 요구 (유체역학연구소처럼 어떻게 잘 해 볼 것이냐, 아니면 학내 분란을 일으키는 조직을 내보낼 것이냐)
    • 학생들이 원한 방향은 전환. 연구소를 학교 밖으로 내보내서 군사 연구를 계속할 거면 뭐 하러 시위를 함
    • Cf. 애스처 샤피로(유체연학연구소장): 전환은 현실적인 목표 아님(조그만 연구소면 모를까 5천만 불 짜리 연구소를…), 대학과 연구소의 관계 단절 촉구
    • 1970년 6월 1일 MIT에서 분리 결정 → 1973년 7월 Charles Stark Draper Laboratory, Inc.가 비영리 연구 회사로 출범
    • 드레이퍼: "우리는 희생당했다" 음모론 주장 "30년 동안 학내 최고 효자 연구소였는데 불과 1-2년 사이에 개새끼 되어서 쫓겨났다"

스탠퍼드

변화의 조짐

  • 옆 학교들(캘리포니아, 버클리 등) 에선 난리가 났는데 스탠퍼드는 1966년까지 조용
  • 1966년 초 교수 및 학생들이 캠퍼스 내 기밀 연구에 관한 질의 → 대학 당국이 SEL에서 CIA가 후원하는 전자 통신 감시 연구를 8년간 해왔음을 시인
  • 5월 2일 50명의 학생과 교수들이 스탠퍼드 대학 본부 앞 피켓 시위
  • 기밀연구 특별 소위원회 구성: 1년간의 조사 후 현재 상태 옹호
  • 1967년 4월 4일 학생단체 The Experiment(SDS 관련 단체)가 캠퍼스 내 “(베트남) 전쟁 연구” 현황 폭로 → 스탠퍼드 대학과 이사회를 “전쟁 범죄 동조 혐의로 고발”하는 대규모 시위 호소
  • 스탠퍼드연구소(Stanford Research Institute, SRI)가 급진적 학생들의 집중 공격 대상

SRI: MIT의 계기연구소나 링컨에 해당하는 위치

  • 1946년 비영리 연구소로 설립: 상업적 연구 계약을 통해 지역경제 성장에 기여 + 스탠퍼드대학의 교육 목표 증진 (원래 목적: 산학협동을 잘 해보자)
  • 초기에는 대학이 지원한 60만 달러로 적자 운영
  • 딴 대학들은 막대한 정부 연구비로 흥청망청 하는데 이건 아니다
  • 군사 R&D 유치로 방향 전환 (연구 계약 수입이 2백만 → 1천만 달러로 급증)
  • 1955년 (한국전쟁 이후) 수입의 절반이 국방 계약 → 1965년 수입의 82%가 정부 용역(그 중 78%가 국방 계약)
  • 베트남의 토지개혁, 태국의 폭동 진압 감시, 화학무기 연구 등
  • 1968년 SRI 연구원 1,500명, 연간 계약액 6,400만 달러 (스탠퍼드대학 전체와 맞먹는 규모)

군사연구 반대시위

  • 1967년 4월 17일 SRI 본부 건물 앞 SDS 반전 시위
  • 총장 로버트 글레이저가 교수-학생 공동 스탠퍼드-SRI 연구위원회 소집 → 분리(계약 제한), 전환, 수익추구 등 다양한 방안 논의
  • 1969년 4월 3일 April 3 Coalition 결성
  • SRI에 대한 엄격한 지침 마련, 모든 기밀 연구 중단, 화학무기 및 폭동 진압 연구 중단, 전쟁 연구에 대한 이사회 소집 요구
  • 4월 9일 대학 당국이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AEL 건물 점거 → 9일간 농성, 이후 1주일간 연구소 폐쇄
  • 4월 18일 8천명이 참가한 대규모 야외집회 → 4월 22일을 “Days of Concern”으로 선포
  • 공대 학장 조셉 페팃이 기밀 연구계약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선언
    • 이미 연구 하고 있던 교수들은 참피행 (계약을 도로 반납해야)
    • 4월 24일 캠퍼스 내 기밀 연구를 금지하는 대학 평의원회 지침 통과
  • 5월 13일 이사회에서 SRI의 제약없는 분리 독립 의결 "아이고 골치아프다 그냥 니들 나가라"
    • 5월 16일 SRI 진입로를 봉쇄한 학생들의 항의 시위 "무슨 소리냐 학내에서 우리가 통제하자는 거지 밖에 내보내서 군사연구를 고삐풀라고?"
    • 폐타이어로 바리케이드 쌓고 불지르는 등 폭력시위 → 학교본부, 휴교령 "아이고 니들도 집에 가"
    • 개강해 보니 SRI는 없어져 버렸고 공격 대상이 없어짐
  • 1969년 10월, 학생들이 대안적 교육 실험의 일환으로 Stanford Workshops on Political and Social Issues(SWOPSI) 조직
    • 스탠퍼드의 후원 연구 현황 조사 (교수, 학생, 군 장교 인터뷰, 계약 내용 조사)
    • 교수 연구자들과 DOD 계약 담당자간에 중대한 인식 차이 발견
      • 공군: "그건 국가안보에 필수적인 연구로서 우리가 필요해서 주문하는 것"
      • 교수들: "뭥? 이건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연구인데? 기초연구인데? 그런 줄 알았는데?" → 빡친 교수 몇 명은 연구를 때려치기도
      • “기초연구란 마치 미인이 그렇듯, 제 눈에 안경이다.”

학내 소요의 쇠퇴

  • 1970년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 닉슨 "호치민 루트 때문에 우리만 국경 지켜가며 전쟁해선 이길 수가 없다"
  • 완전히 빡쳐버린 학생들, 시위 폭력화
  • 5월 4일에는 켄트 주립대에서 주방위군이 발포, 4명 사망하고 10명 부상 → 여론은 죽은 애들이 잘못했다는 반응이 압도적(주방위군이 잘못했다는 의견은 15%에 불과)
  • 8월 24일 위스컨신-매디슨 대학 전현 대학생 4명이 작당을 하여 스털링 홀(육군수학연구소 입주) 1톤 트럭 폭발물 테러: 육군연구소는 멀쩡하고 지나가던 물리학 교수 한 명 사망
  • 학내 시위의 소수화:
    • 래디컬해진 사람들은 학교도 때려치고 지하조직 들어가고, FBI 수배를 받는 등 인생이 망함
    • 대부분의 사람들: "어미 베트남전 반대하려면 총 맞을 각오 해야 하는구나" 시위의 소극화

군산복합체에 미친 영향

대학의 군사연구 비중 하락

  • 기초과학에 대한 군대의 기대 감소
    • Cf. Project Hindsight(1963-1967): 최신 군사무기의 혁신 중 9퍼센트가 과학, 91퍼센트가 기술에서, 0.3퍼센트만이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기초연구(undirected science)”에서 유래
  • 과학 연구의 초점 이동: 비군사 응용 연구에 대한 의회의 강조, “사회적으로 관련된” 연구 (환경문제, 도시 하부구조, 공중보건) 추구
  • 1970년 의회가 군수권법(Military Authorization Act)의 맨스필드 수정조항(Mansfield Amendment) 통과
    • DOD 자금은 “특정한 군대의 기능 내지 작전에 직접적 내지 명시적 관계”가 있는 프로젝트에만 지출할 수 있다고 명시 → 군대의 자금을 민간 프로젝트 지원에 사용하는 것을 제한
  • 1970년대 전반에 DOD의 대학 기초연구 지원이 50퍼센트 이상 급감
    • 1960년 대학 연구비의 1/3 이상 → 1975년 1/10 이하

평가: 찻잔 속의 태풍?

  • 대학 지원 감소가 무기 연구에 대한 연구개발 지출 감소를 의미하지 않음
  • 존스홉킨스 대학처럼 끝까지 군산복합체 체제를 버팅긴 대학들에게 정부 지원이 집중되는 효과
  • 드레이퍼 연구소, 링컨 연구소, 스탠퍼드 연구소의 규모와 영향력은 지속. 예컨대 드레이퍼 연구소의 경우:
    • MIT에서 분리된 이후 해군의 트라이던트 유도탄, 공군의 MX 유도탄, NASA의 관성유도장치 개발,
    • 레이건 시대 제2차 냉전의 군비증강에 직접적 수혜 (1973년 수입 7100만 불 → 1984년 수입 2억 6천만 불)
    • DOD 지원이 90% 이상, 나머지는 NASA
    • MIT 대학원생 지원, 학부생 지원 프로그램 계속 운영

1960년대에 대한 재해석

핵심질문: 반문화(counter-culture)는 반과학, 반기술적이었나?

  • 히피 문화: "땅으로 돌아가자", 코뮌 운동, 소비주의와 현대기술 거부 ← 헨리 소로, 존 뮈어, 알도 레오폴드, 스콧 니어링
  • 대학 기반 신좌파: 베트남전 반대, 군산복합체 반대, 대학의 군사연구 반대 ← 엘륄, 마르쿠제, 멈퍼드
    • 2차대전 이후 의료 및 환경에서 터진 사건들: 탈리도마이드, DDT 남용, 교외 확장으로 인한 환경파괴(suburban sprawl)
    • 결과: 현대적 기술과 이를 떠받치는 과학적 합리성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 주요 타겟: 텐타곤, IBM, AT&T, 다우케미컬(네이팜), 몬산토(고엽제) 등

또다른 대항문화

  • 기술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술(= 정부와 대기업이 주도하는 거대과학기술)을 거부
  • 대안적 기술 모색 "기술의 문제는 기술로 해걸"
  • 환경운동과 정보화(컴퓨터)운동에 영향
  1. 실용적 환경주의
    • 예전 환경주의의 이념에서 탈피, 자연 vs. 기술이라는 이분법 거부
      • 1950년대 이전 미국의 환경운동: conservationist vs. wilderness movement
    • 기술 그 자체에 긍정적, 다만 정부와 대기업이 이를 오용했다는 입장
    • 산업혁명기 이후 잊혀진 예전의 단순하고 견고하고 유용한 기술 발굴, 복원 (기술이 빚어낸 문제의 해법은 기술에 있음) → 적정기술, 대안기술
    • 영국: E. F. 슈마허의 Small is Beautiful(1973년): 제3세계의 당면 과정을 해결하기 위한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 주창
    • 미국: 스튜어트 브랜드의 Whole Earth Catalog(1968년)
      • 단순하면서도 유용한 예전 기술, 제품들 소개 → 교외생활자와 코뮌 개척자들에게 어필
      • 150가지 판본이 수만 부 판매, 전국도서상 수상
    • 이후 미친 영향
      • 생태건축, 생태설계 → 1980년대 이후 제도화, 확산
      • 우주선 지구(spaceship earth) 개념 → 우주 식민지 논쟁
      • 환경운동의 주류가 되지는 못함. 현대기술에 대한 환경주의자들의 경멸과 의심 (현재까지도)
  2. 컴퓨터의 대중화
    • 1960년대 이전의 컴퓨터
      • 대형 메인프레임, IBM이 주도, 극히 제약된 접근성(대학과 연구소의 이공계 교수, 대학원생, 연구원 등)
      • 컴퓨터는 핵재난을 빚어낼 냉전 국가의 도구, 고도로 합리화된 관료제의 상징
    • 1960년대 말 반문화와 전산의 결합
      • 샌프란시스코 만 지역(스탠퍼드, 록히드, 히피 코뮌들이 혼재)이 진원지
      • 이를 가능케 할 컴퓨터는 반문화적 해방의 도구
    • SRI의 증강연구센터(ARC)
      • 1966년-68년에 더글러스 엥겔바트와 엔지니어들이 온라인 시스템(NLS) 개발
      • 마우스 + 쿼티 키보드 + CRT 모니터로 문서 공유, 변경, 하이퍼링크 → 사용자들의 평등한 작업관계
      • 개발 과정에서 엥겔바트와 샌프란시스코 코뮌과의 연결 및 영향
      • 1968년 12월 9일 "The Mother of All Demos"
      • 연구팀 중 일부는 제록스의 팔로알토 연구소(PARC)로 이직해 작업 계속 → GUI의 개발자들
    • 민중컴퓨터(People's computer) 운동
      • 샌프란시스코 지역 컴퓨터 과학자/엔지니어들 주도
      • 컴퓨터를 개인용 기술로 재정의, 군대나 방산업체가 아닌 스스로를 위한 컴퓨터 제작
      • 1972년부터 격월간 소식지 발간, 상점 운영
      • 1971년 리 펠첸스타인과 반전 기술자들이 Community Memory 프로젝트 시작: 지역사회 곳곳에 컴퓨터 단말기 설치, 공유된 디지털 게시판 운영
      • 1975년 펠첸스타인 주도로 Homebrew Computer Club 결성, 자작 컴퓨터와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 공유 (잡스와 워즈니악도 여기 회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