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군산복합체

냉전 초의 연구개발

군대의 과학 연구 지원

  • 군대는 대학에서 진행되는 다수의 ‘기초연구’ 지원
    • ex. 대학과 그 부설 연구소의 지구과학 연구(지진학, 기상학, 해양학, 측지학…)
  •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학-군대-산업연구의 구분이 점차 흐릿해짐
  • 대학은 도저히 ‘기초연구’로 생각할 수 없는 무기개발 프로젝트 유치
  • 전시에나 볼 수 있었던 군대-산업체-대학의 긴밀한 협력관계 재등장 → 아이젠하워의 군산(학)복합체 경고의 배경 제공

군산복합체

군산복합체

  •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개념: 1961년 1월 17일 아이젠하워 대통령 고별 연설에서 제시
  • 사석에서는 “권력의 삼각주(delta of power; 의회, 군대, 방위산업체의 신무기 개발 압력)”를 경계해야 한다고 피력
    • 군대는 소련의 위협을 들먹이며 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돈줄인 의회에 로비
    • 방산업체는 군대에 무기를 팔아먹고 싶으니 채택을 해달라고 군대에 로비
    • 또한 방산업체는 일자리 창출을 내세워 그 시설이 위치할 지역구 의원(즉 의회)에게 로비
    • 이 와중에 정부 예산은 블랙홀로 빠지고, 군대는 쓰지도 않을 첨단무기를 가지고(무기 써야 하니까 전쟁 일으킬지도?), 방산업체는 무기를 팔아먹고, 의회는 지역구에 일자리 창출했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철밥통의 삼각형

평화 유지에 있어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우리 군사력의 확립입니다. 우리의 군사력은 어떠한 잠재적인 침략자도 스스로의 파괴를 가져올 위험한 도전을 감행할 유혹을 느끼지 못하도록 강력하고 즉각적인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
이 방대한 군사적 체제와 대규모 무기 산업의 결합은 미국인의 경험에서 새로운 것입니다. 그 전체적인 영향력 ― 경제적, 정치적, 심지어 영적 영향 ― 은 모든 도시, 모든 주 의회, 모든 연방 정부 관청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발전의 긴급한 필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심각한 함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과 자원과 생계가 모두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 자체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부 위원회들에서, 우리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군산복합체에 의한 부당한 영향력의 획득을 경계해야 합니다. 잘못 주어진 권력의 파괴적 발호 가능성은 지금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결합의 무게가 우리의 자유나 민주적 절차를 위협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당연시해서는 안됩니다. 방심하지 않고 식견을 갖춘 시민들만이 거대한 산업적, 군사적 국방 기제를 우리의 평화적인 방법 및 목표와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안보와 자유는 함께 번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후 학자들은 아이젠하워의 용어에 대학(academia)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 — 군-산-학 복합체
    • ← 미국의 국방 체제에서 연구대학들(MIT, 스탠퍼드, 존스홉킨스 등)이 수행하는 역할
    • Cf. 아이젠하워 자신은 이를 “과학-기술 엘리트”에 대한 별도의 경고로 제시

오늘날 자신의 작업장에 틀어박혀 혼자 일을 하는 발명가는, 실험실과 시험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프로젝트 팀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자유로운 사상과 과학적 발견의 원천이었던 자유로운 대학도 연구 수행에서 혁명을 겪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거기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정부의 계약이 사실상 지적 호기심의 대체물이 되고 있습니다. 낡은 칠판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수백 대의 신형 전자 컴퓨터가 들어섰습니다. 미국의 학자들이 연방 고용, 프로젝트 할당, 돈의 힘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는 전망은 엄연히 존재하며 심각하게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의당 과학 연구와 발견을 존중함에 있어, 우리는 공공 정책이 그 자체로 과학-기술 엘리트의 포로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동등하고 정반대 되는 위험도 경계를 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 자유 사회의 지상 목표들을 향해 나아가면서 새롭고 낡은 이들 세력과 여타 세력들을 우리 민주적 체계의 원칙 내에서 주조하고, 균형을 맞추고, 통합하는 것은 정치가들의 과업입니다.

Stuart Leslie, The Cold War and American Science (1993)

  • MIT와 스탠퍼드는 어떻게 군산(학)복합체의 일부가 되었는가 (2차대전에서 수혜를 받은 대학(MIT)과 그렇지 못한 대학(스탠퍼드)의 행보 수렴)
  • 미국의 첨단산업단지(Route 128, Silicon Valley)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 전자공학, 항공공학, 물리학, 재료과학을 중심으로:

MIT — 전자공학

전쟁 이전 (전자공학 아니고 전기공학이던 시절)

  • 1920년대 MIT 전기공학과: 학과장 두갈드 잭슨의 제너럴일렉트릭과의 산학협력 프로그램(예컨대 장거리 송전)이 지배 (협동교육, 교수의 기업 컨설팅, 장거리 전력 네트워크 문제에 관한 학부, 대학원 교육)
  • 라디오 마니아들(줄리어스 스트래턴, 에드워드 보울즈 등)은 노버트 위너, 바네바 부시 등 젊은 교수들 강의 수강 (장거리 송전 그거 뭐 에디슨 시절부터 갖고 놀던 거, 재미 없다!) → 전파공학 분야 강화를 위해 제너럴일렉트릭 대신 AT&T를 물주로 선택
  • 1920년대에 이들이 학위를 가지게 되면서 서서히 분위기 변화, MIT 전기공학과가 마이크로파 이론 및 실천의 중심지로 변모 → 1933년 전기공학과 커리큘럼을 전자공학과 전자기이론 중심으로 개편
  • 국제정세 악화로 인해 마이크로파 연구 프로그램의 중요성이 재차 부각: 비행기의 탐지 및 유도 용도

전시 연구

  • NDRC가 마이크로파 위원회 소집 → 마이크로파 레이다 관련 기술 조사
  • 영국에서 개발한 공동 자전관의 우수성 확인 → 1940년 10월 대규모 레이다 연구소 설립 결정
  • 방사연구소(Rad Lab)는 MIT 전기공학과가 아니라 외부에서 온 물리학자들에게 연구소 관리 맡김(2차대전 당시 물리학자들의 위세!): 리 두브리지(로체스터), I. I. 라비(컬럼비아) 등
  • 1944년 여름 ‘래드랩 이후’ 논의 시작
    • 존 슬레이터(물리학과 학장), 해롤드 헤이즌(전기공학 학장), 스트래턴(돌아온 탕아), 칼 컴프턴(총장): “마이크로파 분야에서 우리의 위치를 어떻게 공고하게 할 것인가” 고민
    • 슬레이터가 학과간 연구 프로그램의 틀 제시: “기존 진공관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좀더 철저하게 이해하고, 이러한 지식을 활용해 진공관을 개량하거나, 새로운 종류의 진공관을 개발하거나, 더 짧은 파장에 적용하는 것이 목표” ← "기초전자공학"
    • 래드랩이 만든 패턴을 작은 규모(직원 70명)로 따라가는 새로운 연구소 구상
    • 1945년 초까지 후원자 불투명, 그러나 이내 군대가 “continuing working relationship”를 원하고 있음이 분명해짐

전자공학연구소(RLE)

  • 군대가 래드랩의 기초연구 부서를 전자공학연구소(Research Laboratory of Electronics, RLE)로 바꾸는 데 개입
  • 래드랩 해체 이후 6개월간 자금지원 & 1백만 달러 상당의 남는 장비 지원
  • 1946년 3월 합동전자공학프로그램(Joint Services Electronics Program, JSEP)을 만들어 RLE와 하버드, 컬럼비아의 유사 연구소 지원
  • 물리학과, 전기공학과 교수 17명, 직원 27명, 래드랩에서 일했던 대학원생들, 60만 달러 예산으로 개소
  • 초기 2-3년은 기밀이 아닌 기초 전자공학 연구 중심, 자유로운 결과 발표 및 공유, 교육에 높은 우선순위
  • Project Meteor(해군의 대공미사일 프로젝트)를 시발점으로 기밀 군사연구 비중 높아짐
  • 한국전쟁 이후 기초연구와 응용연구의 구분이 흐려짐: 세 개의 대규모 기밀 프로젝트 수주 (1950년대 내내 DOD가 연구비의 97퍼센트 지원)
    • ex. 주파수 확산(spread spectrum)을 이용한 보안 통신 개발
    • 1958년까지 크게 성장: 교수 68명, 연구 조수 44명, 대학원생 124명, 지원 인력 107명
  • RLE 연구의 성격과 영향
    • 전시연구의 경험과 도구에 의해 평화시 연구 재형성
      • e.g. 마이크로파관 연구실(Microwave Tube Laboratory): 전시 레이다 연구를 고주파와 고출력으로 연장
    • 산업체 엔지니어와 군 장교들을 위한 일련의 technical conference, summer study 개최: RLE 최신 연구 프로그램 소개, 견학, 강의
    • 지역 전자공학 산업 부양에도 기여: 졸업생 고용, 교수 컨설턴트 고용
      • e.g. 레이시언(Raytheon)의 방위 사업 비중: 1951년 1/3 → 1956년 4/5로 증가
    • 교수들과 연구 조수들이 창업기업 설립: 처음 20년간 14개 회사 스핀오프 → Route 128 산업단지의 근간
    • 학부 및 대학원 커리큘럼에도 영향: 전기기계 실험실 해체 & 전자공학(진공관), 통신, 전자기 및 회로이론으로 대체

“교수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가르치며, 자기가 가르치는 것에 관한 교과서를 집필한다. 그들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주로 그들 자신의 연구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대학에서의 군사연구가 군대 중심의 학부 커리큘럼으로 이어진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못될 것이다.”

— 칼 바루스

링컨 연구소(Lincoln Laboratory)

  • 1950년 12월 공군이 대공 방어를 위한 기밀 연구소(“a new Rad Lab”) 신설 요청
  • 배경
    • MIT의 물리학자 조지 밸리가 의장을 맡은 공군 과학자문위원회(SAB)가 소련의 원자탄 실험 이후 미국의 대공 방어태세 점검
    • 지상 레이다, 대공 무기, 디지털 컴퓨터를 통합한 대공 방어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결론
    • MIT의 고위 행정가, RLE 연구자, 육군-해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공군이 우겨서 관철
  • 1951년(번갯불 콩볶) 링컨 연구소 설립: RLE의 지적 연장이자 계약상의 연장 (MIT 인력 대거 이동)
  • 이내 그 규모에서 RLE 압도: 직원 2천 명(과학자, 엔지니어 7백 명, 1/3은 MIT에서 충원), 연간 예산 2천만 달러
  • 1954년 캠퍼스에서 20마일 떨어진 공군기지 인근으로 이전
  • SAGE
    • 첫 10년 동안 대공 방어 시스템 SAGE (Semi-Automatic Ground Environment) 개발
    • MIT 전기공학과의 제이 포리스터가 개발중이던 훨윈드(Whirlwind) 컴퓨터 편입
    • 산업체들의 하청 계약
      • IBM: 2세대 훨윈드(AN/FSQ-7) 생산 계약 (대당 3천만 달러에 60대 생산) → 1960년대에 항공기 예약 시스템 SABRE로 연결
      • AT&T: 전화선 연결 계약, 디지털 데이터 통신 우위 확보
      • SDC(System Development Corporation): 시스템 소프트웨어 작성
    • 총 80억 달러 소요

“링컨 연구소는 오늘날의 기술 최전선에 위치한 복합 분야들에서 연구하고 싶어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 이러한 시설들은 … 미래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환경이다.”

  • 링컨 연구소의 영향
    • MIT 교육 시스템의 일부로 간주
      • 링컨 연구자들은 교수직 유지, 캠퍼스로 출강, 대학원생 지도
      • 첫 10년간 연구소는 MIT 대학원생 수십 명 지원, 링컨 엔지니어 55명은 MIT 학위 취득
      • 상당수 대학원생들은 기밀 프로젝트에 관한 학위논문 제출
    • RLE보다 지역 전자산업에 더 큰 영향
      • 1986년까지 48개 회사 스핀오프(ex.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연간 매출 86억 달러, 10만 명 고용
      • 링컨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기술이전의 결과: 주요 고객은 역시 군대
  • SAGE 이후
    • SAGE가 시제품 단계에서 실제 대공 방어 시스템 단계로 넘어가면서 MIT와 Lincoln간 갈등 → 1958년 MIT에서 MITRE 분리(SAGE의 시스템 엔지니어링 담당)
    • 이후 Lincoln은 고성능 레이다와 탄도탄요격미사일(ABM) 개발에 집중
    • Lincoln과 MIT는 계속 긴밀한 관계 유지

MIT — 항공공학

  • 전후 MIT 항공공학과에 여러 연구소 설립: Gas Turbine Laboratory, Naval Supersonic Laboratory, Aeroelastic and Structures Laboratory 등
    • ← 압도적인 군대의 영향

계기연구소(Instrumentation Laboratory)

  • 1934년 찰스 스타크 드레이퍼가 MIT 항공공학 과정에 설립: 고도계, 속도계, 자기 나침반, 기타 항공기 계기 연구
  • 전쟁 이후 전략폭격기와 탄도미사일 중요성 급증 → 미사일에 탑재할 관성유도시스템(inertial guidance system) 개발
    • 관성유도 시스템: 정교한 자이로스코프와 가속도계를 이용해 외부 지령 내지 수정 없이 목표물까지 유도하는 기술
    • 주로 배에 탑재하는 거대한 장치를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도록 소형화가 관건 (무게와 오차를 모두 줄여야 하는 과제)
  • 공군의 Titan II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해군의 Polaris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을 위한 관성유도 시스템 개발 계약 수주
  • 1958년 계기연구소 예산 1290만 달러 중 해군 980만 달러, 공군 310만 달러
    • Cf. 같은 해 항공우주공학과 예산 1460만 달러 거의 전부가 DOD 지원, 대학원생 104명 중 59명이 특수 (기밀) 강좌를 수강하는 군 장교
  • 1961년 아폴로 항행유도 시스템 계약 수주: 440만 달러(첫해) → 1280만 달러 (이듬해) → 2590만 달러(1969년)
  • 1960년대 중반 이후 민간-군사연구 절반씩 → 1969년 군사 연구 2950만 달러로 증가
  • 1960년대 중반에는 286명의 산업체 엔지니어 상주(GM의 AC Spark Plug division이 가장 큰 비중)
  • 1965년까지 27개 회사 스핀오프: 매출 1400만 달러, 900명 고용

MIT의 초상

  • 1960년대 초 정부 후원 연구계약 매년 1억 달러 (국방부 4700만 달러, 연방계약 연구소들에 8000만 달러) → 1960년대 말까지 2배 증가
  • 1950-60년대 내내 후원 연구비가 운영 예산의 80% 내외 (연구비의 95% 이상이 국방부, AEC, NACA/NASA)
  • 대부분의 연구비는 RLE, 링컨, 계기연구소같은 학제적 연구소들로 들어감

“수많은 정부 연구소들이 MIT에 붙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부 연구소들이 밀집한 곳에 아주 훌륭한 교육기관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1962년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장 앨빈 와인버그

  • 1949년 루이스 위원회 보고서: “과잉팽창의 위험” 경고
    • 전후 바뀐 환경에서 MIT의 전망을 찾기 위해 화학공학자 워런 K. 루이스가 의장을 맡은 블루리본 위원회 발족
    • 연구 관리를 위한 낭비적 관료제의 문제점
    • 교수들의 에너지와 관심사가 창의적 교육 및 연구에서 협소하게 초점이 맞춰진 “수입창출” 프로젝트로 이동
    • 정부의 원조에 의지 → 만약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면?
    • 학생 수 폭증: 학내 일체감 희석, 학부-대학원 교육 균형 파괴
    • 하지만 열광적인 성장 속에서 조언 무시

스탠퍼드 — 전자공학

프레드릭 터먼(1900-1982, ‘실리콘밸리의 아버지’)

  • 스탠퍼드 전기공학과에서 해리스 J. 라이언의 지도를 받음: 장거리 고전압 송전(산학협동)
  • 1922년 MIT 대학원 진학: 바네바 부시 밑에서 학위 취득
  • 1926년 스탠퍼드 전기공학과 교수 취임 → MIT를 본떠 개혁 착수
    • 터먼의 교육철학: 학부에 시간낭비 말 것, 대학원에 노력을 투자할 것, “주류이론”과 “첨탑 개념(될 놈만 밀어줘라)”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말 것
  • 무선과 통신 분야의 대학원 프로그램 설립: 기업의 장비 기부(내지는 갈취), 산업체의 연구 문제에 집중, 논문 발표, 특허 출원, 교과서 집필, 대학원생 지원, 전파공학 기업들에 졸업생 취업
  • 지역의 전자공학 회사 육성: field trip, guest seminar
  • 1939년 터먼의 제자인 데이비드 패커드와 윌리엄 휴렛이 오실레

이터를 생산하는 회사 설립

2차대전

  • 1942년 2월 터먼은 래드랩 부속 전파연구소(Radio Research Laboratory, RRL)의 책임을 맡아 동부로 이동
    • 아직 스탠퍼드는 2류대학 취급 받았기에 군사 플젝을 하나도 수주하지 못하고 터먼 혼자 스카웃됨
    • RRL: 레이다 전파방해 및 대응 장치 연구, 1944년 말 직원 8백 명(과학자 & 엔지니어 2백 명)까지 성장
  • GE, RCA, Bell Lab, Westinghouse 등에는 제조법, 군 장교들에게는 사용법 교육 책임 → 연구소의 설계팀, 기업 엔지니어, 군 대표 월례 회동
  • 대학-산업체-정부의 파트너십이 전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확신: 대학의 전자공학 프로그램을 엄격한 과학적 훈련 중심으로 개편할 필요

“전후의 기간은 스탠퍼드에 매우 중요한 동시에 매우 결정적인 시기가 될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가진 잠재적 힘을 한데 합쳐 서부에서 동부의 하버드와 비슷한 지위의 기반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속내는 서부의 MIT겠지), 그렇지 못할 경우 다트머스 대학(학부대학)과 흡사한 수준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전후

  • 터먼은 1946년 스탠퍼드 공대 학장으로 복귀: 정부 지원의 중요성 인식

“우리가 그것을 활용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정부 후원 연구는 스탠퍼드에, 또 우리 공과대학에 훌륭한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 우리는 전시의 연구 활동이 제공한 이와 흡사한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지위를 만회할 수 있는 두번째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이를 놓친다면] 세번째 기회가 앞으로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 전후 전자공학 연구: 레스터 필드, 칼 스팡겐버그, 오스왈드 빌라드 2세 등이 ONR의 지원을 받아 진행파관(travelling-wave tube, TWT), 반사형 클라이스트론, 전리층 반사 연구 (모두 군사적 응용가능성)
  • 1947년 연구팀을 통합해 JSEP와 “Task 7”이라는 이름으로 지원 계약 체결
  • 관리 업무를 위해 전자공학연구소(Electronics Research Laboratory, ERL) 설립: 연간 225,000달러 예산 (교수 봉급 지불, 대학원생 지원)
  • 군사 응용 연구를 하지 않는 교수들은 승진에서 뒤쳐짐
  • 1950년 전자공학 프로그램이 MIT와 대등한 수준까지 성장

한국전쟁

  • 국가적 비상사태에서 JSEP가 기존 계약을 응용연구 계약으로 확대 요청 → 대학의 승인 (첫해 30만 달러, 이듬해 45만 달러) → 전자공학 프로그램 규모 2배
  • 응용전자공학연구소(Applied Electronics Laboratory, AEL) 신설: ERL(“기초” 비기밀 연구)과 구분되는 “응용” 기밀 연구 담당
    • 많은 교수, 대학원생이 양쪽에 관여하면서 구분 무의미
    • 기밀 연구를 공학교육의 정상적 일부로 간주(broadening the research “into very important areas in electronics otherwise inaccessible to universities”)
    • 그리고 그것을 중요한 이점으로 인식(“we have as graduate students an appreciable number of officers from the Military departments who come here with near mandates to do work in classified areas of research.”)
  • 1955년 ERL과 AEL을 합쳐 스탠퍼드전자공학연구소(Stanford Electronics Laboratory, SEL) 설립
    • 1960년 예산: 33만 달러(JSEP 계약), 230만 달러(육군, 해군, 공군), 20만 달러(그 외, NSF

는 33,000달러)

전자공학 산업의 부상

  • 한국전쟁 여파로 레이다용 마이크로파관, 전자 대응장치, 통신장치 수요 폭증 → 캘리포니아의 전자공학 회사들 급성장
    • 한국전쟁 기간 중 캘리포니아 주의 방위산업 계약 비중이 13.2퍼센트에서 26퍼센트로 증가(총액 130억 달러)
  • Varian Associates(1949년 매출 20만 달러 → 1951년 150만 달러), Litton Industries(한국전쟁 후 매출 3배[620만 달러], 직원 4배[2,115명] 증가)
  • 최신 마이크로파 기술을 상업화하기 위한 창업기업 양산: Huggins Laboratories, Microwave Electronics Corporation, Watkins-Johnson(1957년 설립, 매출 1958년 50만 달러 → 1961년 460만 달러 → 1964년 950만 달러)
  • 동부의 거대 회사들이 캘리포니아의 전자산업에 관심
    • Sylvania: 1953년 육군 통신대와 계약 하에 전자방위연구소(Electronics Defense Laboratory, EDL)를 스탠퍼드 인근에 설립
    • General Electric: 1954년 GE Microwave Laboratory 설립
  • 산학연계 강화 위해 1951년 대학 인근에 스탠퍼드 산학공원(Stanford Industrial Park) 설립
  • 명예협력 프로그램(honors cooperative program) 운영
    • 산업체의 젊은 엔지니어들을 파트타임 학생으로 받아 고등 학위 수여(수업료 2배)
    • 첫 3년간 등록 수 16명 → 243명, 1959년 324명 (공대 학생 750명)

스탠퍼드 — 항공공학

록히드 사(Lockheed Corporation)

  • 1912년 록히드 형제가 캘리포니아에서 창업, 1932년 파산 후 다시 설립
  • 2차대전 때 항공산업의 거물이자 주요 방위산업체로 급성장(항공기 2만 대 판매, 20억 달러 수주)
  • 한국전쟁 때 C-130 수송기, F-104 전투기 생산
  • 1950년대 후반 U-2 정찰기를 이용한 초고도 사진 감시 계약
  • 유도탄과 감시위성의 군사적 요구 감지 → 1954년 새로운 Missile Systems Division 설립 (1959년 Missiles Systems and Space Division으로 개칭)

록히드 유도탄 및 우주부문

  • 1956년 2월 스탠퍼드 인근의 산타클라라 계곡으로 이전
    • Cf. 스탠퍼드 전자공학과의 명성이 이전 계기 중 하나
  • 해군의 폴라리스 잠수함탄도유도탄(6200만 달러)과 공군의 감시위성 시스템(1200만 달러)계약 수주
  • 1957년 10월 스푸트니크 충격 이후 계약 수주액 폭증: 감시위성 계약액이 1년만에 1억 5000만 달러로 증가
  • 폴라리스 이후 2세대(포세이돈), 3세대(트라이던트) 잠수함탄도유도탄 개발 계약 (총 10억 달러)
  • 직원 수 증가: 1956년 200명 → 1958년 9,000명 → 1964년 25,000명
    • (1,200명은 스탠퍼드 산학공원 연구소에 근무)
    • 1960년대 이후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많은 인력을 고용한 기업

스탠퍼드 항공공학과

  • 1926년 이후 구겐하임 항공 기금의 지원으로 전성기
  • 1939년 기금이 바닥나고 전시 계약 수주에도 실패 (제트추진연구소는 칼텍으로) → 2차대전 이후 10여년간 암흑기
  • 1957년 록히드 미사일 시스템이 회생 방안 제시: 동부에 있던 니콜라스 호프를 스탠퍼드로 영입(처음 5년간 급여의 절반 부담, 컨설턴트 겸직)
  • 대니얼 버셰이더(산업체), 월터 빈센티, 밀턴 반 다이크(NACA) 등 새로운 교수 영입 → 대학원 프로그램 활성화
    • 1956년 교수 2명, 학생 12명(학부생 포함), 연구비 4500달러, 학위 2명 배출 → 1963년 교수 12명, 대학원생 179명, 연구비 657,000달러
  • 미사일의 대기권 재진입시의 초고온 상태를 연구: 항공기 구조, 초고온 풍동, 유체이론
  • 1959년부터 산학연계 프로그램 운영: 매년 5월 후원기업들을 초청해 연례 학술회의 (“slave market”)

스탠퍼드의 초상

  • 1960년대에 세계적 과학, 공학교육의 중심지로 부상(특히 전자공학)
  • 1946년 정부 연구비 127,599달러 → 1956년 국방부 연구 수주액 450만 달러 → 1966년 1300만 달러
  • 대학 중 국방 연구비 서열 3위

총론

MIT와 스탠퍼드 군산학복합체의 특징

  • 군대의 필요에 따른 막대한 연구개발 자금이 대학의 학과간 연구소 지원: 냉전 시기의 정세 변화가 크게 영향
  • 기초-응용, 기밀-비기밀 연구 구분 흐릿해짐
  • 대학원생 및 학부생 교육 및 훈련에 영향 (연구주제, 강의, 커리큘럼, 교과서 등)
  • technical conference, summer study, field trip, honors cooperative program 등 잦은 군-산-학 교류로 요구 전달, 지식 공유, 채용 기회 마련
  • 학과간 연구소의 교수, 대학원생, 연구 조수 등이 설립한 수많은 스핀오프 기업이 대학 인근에 집중: 군대를 주 고객으로 하는 첨단기술 산업단지 구축 (Route 128, Silicon Val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