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과학의 영구동원

전후의 군사적 연구개발

1차대전과 2차대전의 비교
1차대전 2차대전
NRC는 ‘대학의 과학자들’을 동원했지만 ‘대학’은 동원하지 않음 대학이 연구개발 자금에서 큰 몫을 차지
항공학(NACA)를 제외하면 군대의 역할 미미, 대기업은 사내연구에 집중, 대학은 지역 기업이나 민간재단(록펠러, 카네기 등)에서 연구비 충당 대학이 기업체보다 훨씬 많은 지원을 받음
MIT(1억 1700만 달러), 칼텍(8300만 달러), 하버드, 컬럼비아(3000만 달러) vs. 웨스턴일렉트릭(1700만 달러), GE(800만 달러), RCA, 듀퐁, 웨스팅하우스 (600달러 미만)
전쟁 이후에는 원위치로 회귀 (순수과학 이데올로기에 빠진 과학자들) 군대(수요, 방향 제시) - 대학(연구개발, 시제품 제작) - 산업체(대규모 양산)의 긴밀한 관계 및 역할분담 확립

왜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원위치로 회귀’하지 않았는가?

  • 답: 냉전과 소련의 존재
  • 대학(공급): 전시연구에서 직접 수혜 → 대학의 과학자들은 전후의 연구 재원 확보 방안을 고민
  • 군대(수요): 과학기술의 산물이 전쟁의 성패를 가른다는 새로운 인식 → 군사 지도자들이 전시의 협력연구 패턴을 연장하려는 의사 표현
  • 전쟁 대비의 성격 변화: 원자폭탄의 개발로 즉각적 파멸 가능 → 모든 대비는 전쟁이 터지기 이전에 이뤄져야 함 (항시적 준비 태세, 사전 연구개발)

연구개발 예산 폭증

  • 2차대전기에 정부 연구개발 예산 10배 증가: 5천만 달러(1939, 18%) → 5억 달러(1945, 83%)
  • 전쟁 이후에도 증가세 지속: 한국전쟁이 결정적 계기(2배 증가) [→ 31억 달러(1955)]
  • 1957년 스푸트니크 충격이 또다른 계기 [→ 100억 달러(1961) → 170억 달러(1969)]
  • 1940년 이후 20년간 연방정부 예산 11배 증가, R&D 예산 200배 증가
  • 절반 이상이 국방 관련 연구개발 자금에서 지출(1969년 R&D 예산 중 국방부 82억 달러, NASA 45억 달러)

전후 연구개발의 전망

Science, the Endless Frontier

  • 배경
    • 1944년 11월 루즈벨트 대통령이 바네바 부시에게 자문 요청: 전시 협력연구의 실험이 평화시에 던지는 교훈? 과학과 연방정부의 적절한 관계?
    • 1945년 7월 25일 부시의 보고서 Science, the Endless Frontier 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
  • 보고서 내용
    • 전시연구의 성과는 기초연구(basic research)를 통해 축적된 새로운 과학지식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음
    • (기초연구 = “실용적 목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수행되는 연구 = “민간 공공 사업의 동력이 되는 물줄기” = “과학 자본”)
    • 기초연구의 문제: 전시의 단절로 지식기반 고갈, 유럽의 피폐화, 민간재단의 지원 하락세, 산업체는 상업적 압력에 노출 → 정부가 기초연구 지원을 담당해야 함! (새로운 ‘프론티어’를 열어젖히는 것은 미국 정부의 사명)
    • 기초연구 지원은 아무런 조건없이 이뤄져야 함: 전시의 통제 제거, 연구의 자유 회복 (미지의 탐구에 대한 호기심에 의해 스스로 선택한 주제에 관한 연구)
    • 연구 지원을 담당할 민간 기구로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설립 제안: 대학과 연구소에 자금 지원, 지원 대상은 자율적으로 결정, “군사적 문제에 관한 장기적 연구”도 포함
  • 보고서의 함의
    • 정부 지시 프로젝트의 놀라운 성공 모델을 평화시로 이전하면서 동시에 과학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시도
    • ‘기초연구’ 개념의 발명 → 정부지원의 정당성 확보
      • Cf. 순수연구(pure research), 근본연구(fundamental research) = 과학자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연구
    • 비판: 과학 → 기술 → 사회 진보로 가는 일방향적 흐름(‘조립라인 모델’) → 과학과 기술, 과학과 실용 세계의 관계 왜곡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NSF) 설립 논쟁

  • 킬고어 법안: 상원의원 할리 킬고어(포퓰리즘적)가 제안
    • 부시 식의 "과학의 낙수효과"에 반대.
    • 대통령이 임명한 각계 대표자들의 위원회가 관리하는 재단 (뉴딜의 연장)
    • 거기서 연구하는 주제는 ‘사회적 선(social good)’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응용연구, 특허는 정부에 귀속
    • 민간의 군사연구를 포함한 모든 과학 및 의학,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와 교육 지원
  • 마그누선 법안: 상원의원 워런 마그누선이 제안
    • 민간인 과학자들의 자율적 위원회가 관리 (정부의 간섭 차단)
    • 연구자들이 제출한 프로젝트 제안서를 독립적 과학위원회가 동료심사를 통해 평가해 지원
    • 군사관련 민간 연구, 사회과학 연구 배제
  • 두 법안이 5년을 투닥투닥거리다가 회기를 넘겨 의원들을 새로 뽑고 1950년에야 표결하여 부시의 전망에 가까운 절충안 통과(군사연구는 배제) → NSF 설립

국방연구의 부상

  • NSF의 설립은 과학 연구지원의 측면에서 too little, too late!
  • 전쟁 이후 해군연구청(Office of Naval Research, ONR), 국방부(DOD), 원자에너지위원회(AEC),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의 과학 연구 지원 → NSF 압도
    • Cf. 1951년: DOD가 연방 R&D 예산의 70퍼센트 지출(13억 달러), NSF는 15만 달러
  • 초기에는 ONR이 주도적 역할: 순수연구에 대한 후한 지원
    • Cf. 1948년 미국물리학회 학술대회 발표 논문의 80퍼센트가 ONR 지원
  • 이후 DOD, AEC, NIH 지원 증가

스푸트니크 쇼크

  • 1957년 10월 4일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 미국 사회 전반에 엄청난 충격
    • cf. 우주에 띄울 수 있는 로켓의 개발 = 대륙간탄도유도탄[ICBM]의 개발
  • 새로운 ‘전장’으로서 우주에 대한 관심 폭증 → 1958년 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 설립 (새로운 과학 연구개발 자금원)
  • ‘국가적 위신’을 위한 과학 연구의 중요성 부각
  •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 급증 → NSF 예산 매년 20%씩 증가(~1966), 국가 연구시스템에서 대학의 위상 급상승
    • 1953년 이전까지 대학이 연구개발 분야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25% 정도에 불과. 대학에서도 응용연구를 더 많이 함
    • 60년대까지 기초연구 투자비용이 100배 뛰고 대학이 연구개발에서 담당하던 비중이 2배, 대학에서 기초연구와 응용연구의 비중 역전

사례연구 — 냉전과 지구과학

대전기 전후 지구과학 약사

  • 2차대전 이전
    • 일부 분야에 연방정부 지원(지질학, 해안선 측정)
    • 대부분의 지구물리학 연구는 석유회사나 대학의 지원에 의존
  • 2차대전: 지구물리학에 대한 군대의 지원 증가
    • 전시의 즉각적 필요 충족
    • 소나 탐지(Woods Hole), 해안의 파도 및 너울 예측(Scripps), 일기 예보, 지도 제작 등
  • 냉전 초기: 군대의 지구물리학 지원 폭증
    • 새로운 무기 시스템의 요구 (잠수함전, 미사일 유도 등)
    • 지정학적 관심사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지식 요구)
    • Cf. 1957-58년 국제지구물리관측년(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 IGY) 행사

국방부 산하 연구개발위원회(Research and Development Board, RDB)

  • 전시의 육해군합동신무기장비위원회(Joint New Weapons and Equipment Committee)를 대신해 1946년 설립
  • 지구과학 분야의 중요성 인식
    • 총괄 조직인 지구물리과학위원회(Committee on the Geophysical Sciences)와 분야별 패널(해양학, 기상학, 지구 전자기학, 지진학, 화산학 등) 구성
    • 각각의 패널은 군 장교와 민간인 과학자를 동수로 구성
    • 역할: 군대가 처한 응용 문제 전달, 과학자들이 필요로 하는 연구자금과 대학원 훈련 지원 로비, 기밀분류 자료에 접근
  • 지구물리과학위원회 1948년 연차보고서 = 전후 지구과학의 변모 방향을 들여다볼 수 있는 ‘로제타 스톤’
    • 지구물리과학은 “근본적 성격을 갖는 … 미해결 문제들”을 다룰 기초 연구 자금을 필요로 함
    • 이러한 각각의 분야들은 냉전기의 특정한 군사적 목표들에 기여할 수 있음
    • 이 두 가지 목표는 상호배제적이지 않음
    • → 대다수 연구자들은 둘 모두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 고안

사례: 지진학

지진학: 지진 및 그와 연관된 현상의 과학

  • 1950년대 내내 규모가 작은 학문 분야
  • 1950년대 말 미-소 핵군축 협상의 맥락 → 핵실험 금지조약 이행 여부를 감시하는 방법이 주요 과제로 부상
  • 지진 탐지능력 향상을 위해 1959년 Project Vela Uniform 시작: 1960년대 미국의 거의 모든 지진학자 지원
  • 1959-1961년 사이 지진학 지원 30배 증가, 1960년대 내내 유지
  • 1960-1971년 사이 미국 정부는 지진 탐지능력 향상에 2억 5천만 달러 지출
  • → 규모가 작고 미발달된 학문 분야가 거대한 군산학 기획으로 변모

Vela Uniform 이전

  • 19세기 말에 기구를 이용한 지진파 기록 시작(seismogram) → 체계적인 수학적 분석 가능성 제시
  • 1930년대에 국지적 지진학에서 전지구적 지진학, 지구의 깊은 내부에 대한 연구로 확장
  • Caltech, Berkeley, Columbia(Lamont Geological Laboratory), St Lewis 등에 지진학 프로그램 설치
  • 2차대전기에도 별다른 기여 못함
  • 1950년대에 매년 평균 박사학위 6명 수여, 미국 내 활동중인 연구자 50명 내외
  • 연방정부 지원은 극히 제한적: 1950년대 중반에 매년 50만 달러 내외
  • ex. Caltech Seismological Laboratory: 1957-58년 연간 예산 18만 달러, 연구비 지원 3만 달러 이내

지진학과 군축협상

  • 미국과 소련이 포괄적 군축협상의 첫걸음으로 핵실험 금지협정 논의
    • (미-소의 입장 차이: 소련은 정치적 합의 먼저, 미국은 과학자들간의 합의 먼저)
  • 1958년 7월 제네바 전문가 회의: 핵실험 통제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데 합의 (전세계에 관측소 170곳 + 선상 관측장치 10곳 설치)
  • 지하핵실험 탐지 가능 여부가 쟁점 (미국은 안정적인 탐지 방법 확보에 초점)

Vela Uniform의 기원

  • 1958년 10월 핵실험 금지 외교 협상 개시
  • 문제점: 지하 핵실험에서 나온 새로운 지진학 데이터 등장 + 지하 핵폭발을 감출 수 있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이론(‘decoupling theory’) 제안 → 전문가 회의의 기술적 합의에 의문 제기
  •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응: 대규모 연방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지진 탐지능력 향상 추구
  • 과학 행정가 로이드 버크너가 의장이 된 전문가 패널에서 거대 지진학 연구계획 제시 (Berkner Report)
  • 국방부 산하에 신설된 고등연구계획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ARPA)이 관장하는 Project Vela Uniform 발족

Vela Uniform의 영향

  • 1960-1963년 사이에 1억 1070만 달러 지출
  • 이 중 30%가 기초 및 응용연구에 책정: 지진 탐지 문제 이외의 학술 연구도 폭넓게 지원
  • 지진학의 양적 성장
    • 1960년대에 매년 평균 박사학위 13명 수여(2배 증가), 1972년 39명으로 정점
    • 지진학 연구자 수 5배 증가
    • 1960년대에 학술지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의 수록 분량 3배 증가
  • 기기의 발전
    • 전지구적 연구 네트워크 World-Wide Standard Seismograph Network; WWSSN) 출범
      • 60여개국에 120개의 표준화된 지진 관측소 설치
      • 1960-1967년 총 설치 비용 950만 달러, 매년 운영비 1백만 달러
      • 판구조론을 뒷받침하는 지각판의 존재를 제기한 1968년 Isacks et al.의 논문에 중대한 기여
    • 대규모 배열식 지진 관측소(large seismic array) 건설
      • ex. Large Aperture Seismic Array(LASA)
      • 1964년에 주로 지하핵실험 탐지를 위해 건설
      • 몬태나 주에 525개의 지진계를 21개 그룹으로 나눠 설치
      • 정교한 데이터 전송 장비와 신호 처리 및 디스플레이를 위한 범용 컴퓨터 설치

사례: 기상학

  • 기상학은 19세기부터 이미 군대와 압도적으로 밀접한 관계
    • 1891년 미국 기상국(Weather Bureau) 설립: 육군 통신대의 날씨 예보 기능 이전
    •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둘 사이의 경계는 흐릿
  • 2차대전: 기상학의 폭발적 성장
    • 전쟁 기간에 육군 항공대와 해군이 8천 명의 기상 장교 훈련
    • 신설된 육군의 항공 기상 부대(Air Weather Service)는 1945년에 인원 19,000명(장교 4,500명), 냉전기에도 11,000명선으로 유지
  • 냉전기
    • 1954년 NSF 조사: 미국의 기상학자 5,273명 중 현역 군인(43퍼센트), 공군 예비역(25퍼센트), 해군 예비역(12퍼센트) → 전쟁 10년 후에도 80퍼센트가 군대와 직접 연결
    • 1965년 군대는 기상국보다 관련 예산 2배(1억 8,900만 달러 vs. 1억 400만 달러), 인력 3배(14,300명 vs. 4,500명)
    • 군대의 기상 관련 예산 중 많은 부분은 날씨”예측”이 아닌 기상”조절”에 직간접 지원 (1950년대 기상학 연구 지원금의 절반 가량이 날씨 및 기후 통제에 관한 군사 프로젝트)

날씨 및 기후예측

  • 컴퓨터화된 날씨예측 모델 개발
    • 2차대전 이후 존 폰 노이만이 새로운 디지털 컴퓨터의 비군사적 용도로 구상 (cf. 핵무기 설계시 요구되는 비선형 유체역학과 유사)
    • 1955년까지 수치 날씨예측(numerical weather prediction) 기법 개발 (데이터 분석 + 컴퓨터 시뮬레이션) ← 해군과 공군이 크게 지원
  • 대기대순환 모델(general circulation model) 개발
    • 날씨예측의 시간 규모를 더 연장하려는 야심 (“the infinite forecast”)
    • 폰 노이만이 프린스턴에 설립한 연구소에서 최초의 대기대순환 모델 원형 개발 → Geophysical Fluid Dynamics Laboratory로 발전
    • 핵무기 설계와 중첩 (핵폭발의 충격파 분석에 필요한 유체역학 방정식과 흡사, 동일한 교과서 사용)

기상조절

  • 과학적 기상조절 시도는 19세기에 시작
    • 제임스 폴라드 에스피: thermal theory of storms (모든 대기 요동은 뜨거워진 공기의 상승 기류에 의해 내부로 공기가 빠르게 유입되고 잠열이 방출되어 발생)
    • → 인공적으로 큰 불을 내어 열에 의한 상승 기류를 만들어 인공 강우를 만들려는 계획(“pluviculture”) 추진
    • 대규모의 폭약 사용으로 강우를 촉발하려는 시도(“concussion theory” of rainmaking)
  • 현대적 기상조절의 출발점: 1946년 제너럴 일렉트릭 연구소 실험
    • 드라이아이스를 가정용 냉동고에 집어넣을 때 차가운 수증기에서 얼음 결정이 생기는 현상 발견 (빈센트 셰퍼)
    • 임대한 비행기로 6파운드의 드라이아이스를 구름에 투하해 눈이 내리게 하는 실험 성공
    • 요오드화은 역시 모립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발견 (버나드 보네것)
    • 어빙 랭뮈어가 대규모 기상조절에 대한 웅대한 전망을 대중에게 설파
    • 기상 조절로 인한 재산피해와 민사소송 우려 → 군대에 프로젝트 이관
  • 군대의 기상조절 프로젝트
    • RDB 산하 지구물리과학위원회: 기상조절의 가능성, but 수많은 불확실성 → 추가 연구 권고
    • 1947년 미 육군과 제너럴 일렉트릭 계약으로 Project Cirrus 개시
    • 강우 형성의 물리학과 화학에 대한 기본적 지식 탐구 + 이를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할 가능성 탐색 (랭뮈어, 셰퍼는 자문 역할)
    • 1947-1952년까지 180회의 현장 실험 → 인공 모립 살포의 유효성 입증 실패
    • 1952년부터 여러 건의 후속 프로젝트 지원
  • 냉전적 맥락
    • 조지 C. 케네디 장군: “기단의 경로를 정확하게 그려내고 강우의 시간과 장소를 통제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알아내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할 것”
    • 루이 드 플로레즈 해군 소장: “날씨를 통제하면 적의 작전과 경제를 교란시킬 수 있다 … 냉전에서 [그런 통제력은] 농업 생산을 감소시키고 상업을 방해하고 산업을 지연시키는 강력한 숨겨진 무기가 될 것이다.”
    • Cf. 기상조절과 핵무기와의 비교가 널리 대중화
      • 하워드 오빌의 『콜리어스』 기사(1954): 기상학전의 가능한 시나리오 제시, 완벽하게 정확한 일기예보의 가능성
      • 『뉴스위크』 기사(1958): 기상학전의 형태를 띤 새로운 군비경쟁 진행중
  • 베트남전에서의 인공강우: Operation POPEYE(1967-1972)
    • 몬순 기간에 호치민 이동로에 더 많은 강우를 만들어내려는 작전 (“making mud, not war”)
    • 항공 기상 부대가 책임: 태국에서 2,600회 이상 출격, 5만 개 이상의 요오드화은/납 폭탄 살포 (연간 비용 360만 달러)
    • 철저한 비밀 작전: 전모를 아는 장군 4명뿐, 의회와 관련국 대사들에게도 비밀
    • 1971년 Jack Anderson이 『워싱턴 포스트』에 이 사실을 폭로
    • 이 사건을 계기로 환경 조절 기법을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제조약 체결(1977)
    • 기상학 공동체와 군대 사이의 긴밀한 연계도 점차 약화되기 시작 ← NSF와 NASA의 후원을 받은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 출현

사례: 해양학

해양학(oceanography): 2차대전 이후 해군의 지원으로 급성장

  • 2차대전 이전
    • 미국에 두 곳의 연구 중심지 존재: 우즈홀 해양학 연구소(1930년 설립)와 스크립스 해양학 연구소(1924년 설립)
    • 모두 규모가 작고 고립, 개인 후원이나 자선재단의 지원에 의존
    • 해양학자들은 자신들의 분야를 폭넓게 정의: 특정한 분야라기보다 특정한 장소에 대한 연구 (생물학, 화학, 물리학, 지질학 등 다양한 배경)
    • 다양한 주제 연구(해양 생물, 해양 화학 과정, 해저 지형, 기상학, 수중 음파전달 등): 어업과 관련된 해양생물학이 연구의 중심
    • 1930년대부터 물리해양학, 지질학, 지구물리학 쪽을 지향하는 경향 등장: Harry Hess, Maurice Ewing, Edward Bullard 등의 젊은 학자들
  • 2차대전: 해군과 해양학 관계 변모의 계기
    • 1930년대까지 해군의 해양학 지원은 제한적
    • 해양학의 전시 기여: 해저 음향 전파, 기뢰 제거, 상륙작전 수행 등에서 과학자들의 역할
    • Cf. 많은 해양학자들이 군 복무: Roger Revelle 등
    • 해군과 해양학자들 모두의 인식 전환: 해양학 지식의 유용성 발견 & 어업의 실용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후원자 발견 → 전쟁 말기 우즈홀, 스크립스 연구소에 대한 지속적 지원 기반 확립
    • 물리해양학과 해양 지구물리학을 지향하는 경향이 결정적으로 커지는 계기
  • 해군과 과학자들의 밀월관계
    • 2차대전의 경험(핵무기 개발과 전략 폭격)에서 새로운 군사전략 등장 → 새로 창설된 공군의 급부상과 해군의 주변화
    • Cf. 1949년 해군 예산 삭감에 항의한 “제독들의 반란(Revolt of the Admirals)” 실패
    • MIT 과학자들에게 돌파구 마련을 위한 대응전략 주문: Project Hartwell → 하트웰 보고서(1950)
      • 1950년대 해군의 과학기술 활동과 새로운 목표를 위한 청사진 제공 (“bible of undersea warfare”)
      • 핵무기가 지상 발사 or 공중 발사와만 연결된다는 관점 거부 → 잠수함과 전술핵무기 통합 주장
      • 소련의 잠수함 위협 대응을 위한 장거리 탐지능력 강화 주문: Project Jezebel → low frequency analysis and recording(LOFAR), Project Carsar → sound surveillance system(SOSUS)
  • 해군의 해양학 연구 지원 급증
      • 1940년대 후반에는 ONR의 역할
      • 새로운 전장으로 부각된 북대서양, 북태평양에 대한 해양학 원정 지원 (MIDPAC, TRANSPAC, NORPAC 등) → 새로운 연구기회 제공
      • 수심수온기록계(bathythermograph), 음향 측심기(echo sounder) 등을 이용한 데이터 축적: 변온층(thermocline) 파악, 해저 지도 작성

군대 협력의 문제: 비밀주의

  • 해군은 해저 지형, 염도, 수온 등 원정의 성과를 국제적으로 공유하는 데 소극적: 안전 위주 정보 운용, 소련에 대한 불신
  • 데이터의 (국제적) 공유를 추구하는 과학자들과 종종 충돌: basic research vs. operational information
    • Cf. 1954년 우즈홀 해군 해양학 연구소 개소식에서 Harry Hess 연설
  • 1950년대 말까지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민간인 과학자는 20여명 수준(“invisible college”)
  • 1960년대 중반까지도 해양지질학과 지구물리학 분야에서 전세계에서 5개 기관 정도만 기여 가능: Woods Hole, Scripps, Lamont Geological Laboratory, National Institute of Oceanography(UK), Department of Geodesy and Geophysics(Cambridge University)

비밀주의

기밀 정보의 양산: 기밀 연구, 기밀 프로젝트, 기밀 세미나, 기밀 학위논문…

  • 기밀 정보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공개 정보와 비교해 상대적인 양은?
    • → 대단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 (기밀취급 허가가 없으면 기밀 정보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Peter Galison, Removing Knowledge (2004)

  • 공개 정보의 규모
    • 미국 의회도서관 장서: 1억 2천만 종의 자료, 75억 쪽 (이 중 도서는 1800만 종, 54억 쪽)
  • 기밀 정보의 규모
    • 25년이 지나 기밀해제 대상이 된 1978년 이전 자료 16억 쪽 가운데 11억 쪽이 지난 20년간 공개
    • 1978년 이후 25년간 새롭게 기밀로 지정된 문서의 규모는?
    • 일각에서는 1조 쪽 규모로 추산 — 에이 그건 좀 많은 거 같고…
  • 좀더 현실적인 기밀 정보 추산치
    • 2001년 한 해 동안 3300만 건(최초 분류 26만건, 파생 분류 3276만 건)의 자료가 기밀로 분류
    • 건당 10쪽으로 계산하면 3억 3천만 쪽이 새로 기밀 정보에 포함
    • 25년간 계속되었다고 가정하면 80억 쪽이 새로 기밀로 분류 (이 해에 기밀해제된 정보의 3배 → 기밀 정보의 순증가분은 2억 5천만 쪽)
      • Cf. 하버드대학 도서관 시스템 전체에서 2001년 1년간 증가한 자료: 22만 권, 6천만 쪽
      • Cf. 2001년에 Information Security Oversight Office가 기밀 정보 유지 및 관리에 지출한 비용: 55억 달러
      • Cf. 미국의 대학교수 50만 명, 기밀취급 허가 보유자 4백만 명
  • Galison의 결론: 기밀 정보의 규모는 공개 정보의 5-10배 수준 (이 중 상당부분이 자연과학, 공학 관련)
    • → 냉전기 군사 연구의 유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의 의미 재정의. e.g. 최초의 컴퓨터가 에니악인가 콜로서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