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원자시대

냉전 소략

냉전의 기원

  • 2차대전 중에 연합국간에 불신의 뿌리가 자라남
    • 제2전선: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유일하게 독일과 맞설 때 영국과 미국이 제2전선 개설을 지연시킴
    • 원자폭탄: 영국과 미국은 이 사실을 비밀로 했고, 일본에 대해 실제로 사용
  • 전쟁 말기에 서유럽에서 독자행동 → 이미 동서의 경계선이 그어지기 시작
  • 소련은 전쟁 이후 원자폭탄 개발에 전력투구

핵무기 통제

전쟁 이후 핵 연구와 관련 시설은 어떻게 할 것인가?

  • 메이-존슨 법안 제출(1945.10):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장. 군 주도 기구 창설 및 무기개발에 역점, 비밀엄수 강조
  • 전후 생겨난 원자과학자 운동의 강력 반발: 핵에너지는 민간 용도로도 활용될 수 있음, 핵무기는 문민 기구의 통제를 받아야 함
  • 맥마혼 법안(1945.12)이 대안으로 등장 → 1946년 6월 원자에너지법(Atomic Energy Act) 통과
    • 1947년 1월 원자에너지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가 문민 기구로 설립: 위원장(데이비드 릴리엔탈)과 5명의 민간 위원으로 구성
    • 오크리지, 핸퍼드, 로스앨러모스, 아르곤 등을 산하 연구소 및 시설로 편입
    • 오펜하이머가 의장을 맡은 일반자문위원회(General Advisory Committee, GAC)가 주요 의사결정에서 과학 자문 제공 (코난트, 두브리지, 페르미, 라비, 시보그)
    • 법 제정 과정에서 군대의 영향 → 핵무기 개발과 생산을 담당하는 사실상의 준군사기구로 기능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

  • 1943-44년 닐스 보어의 국제주의 전망: 국제적 사찰을 통해 각국의 핵무기 야망을 상호감시 (유일하게 안전한 세계는 ‘개방된 세계’. 핵억지라는 것을 믿지 않음) → 과학자들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침
  • 유엔 산하 원자에너지 기구 논의
    • 트루먼이 국무부 차관 딘 애치슨에게 보고서 작성 지시
    • 애치슨-릴리엔탈 보고서(1946.3)(←오펜하이머): 핵문제에 관한 한 각국이 주권을 포기하고 국제 원자개발기구에 위탁, 우라늄 광산, 핵 연구소 공동관리,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촉진
    • 미국 군인, 매파의 반발 "우리한테만 짱쎈 무기가 있는데 그걸 폐기하라고? 미쳤음?"
    • 매파의 로비를 받은 트루먼이 버나드 바룩에게 유엔에 상정 지시(바룩 계획) "이거 유엔에 그대로 상정되면 큰일난다" → 소련이 받아들일 수 없는 단서조항을 삽입해 훼방
    • 소련은 핵무기의 전면 금지를 대신 주장하며 대치 "헛소리하지 마라. 핵무기 갖고 있는 게 미국 뿐인데 미국이 먼저 핵 포기하면 끝날 문제"
    • 결국 죽도밥도 안됨. 과학자들의 이상주의적 구상 좌초. 국제적 통제의 기회 상실.

군비경쟁의 시작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

  • 스탈린은 모드 보고서, 로스앨러모스에서 온 첩보를 입수,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불신 (제국주의자 놈들이 일부러 안 되는 걸 흘리는 거 아니냐?)
  • 1943년(동부전선 전세 반전 이후) 원자폭탄 프로젝트 시작 (전쟁 시작 이후 국제 저널에서 핵분열 이야기가 싹 사라짐, 즉 광범위한 정보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전력 추진 (물리학자 이고르 쿠르차토프가 개발 책임)
  • 1946년 12월 최초의 임계상태 도달 (cf. 미국은 1942년 12월 시카고)
  • 미국과 흡사한 거대 플루토늄 분리공장, 핵무기 연구소 건설
  • 1949년 8월 카자흐스탄에서 최초의 원자폭탄(Joe-1) 시험 성공
    • 소련은 공표도 안 했는데 미국이 정찰기 띄었다가 절대 자연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감지
    • 1949년 9월 미국 신문에 보도. 미국 예상(한 20년은 걸리지 않을까?) 보다 훨씬 빨랐음. 서구 사회에 엄청난 충격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은 내생적인가 외생적인가? — 소련이 스스로 한 거냐 훔쳐온 거냐?

  • 로스앨러모스에 적어도 3개 이상의 스파이 조직 침투.
    • 소련이 심은 스파이가 아니고 영미 좌익들이 자발적으로 제공.
      • 테드 홀: 죽을 때까지 스파이임이 밝혀지지 않아 천수 누림
      • 클라우스 푹스: 영국인. 핵심인 플루토늄 내파 기술을 유출. 발각되어 14년형 만기출소 후 동독행.
      •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로젠버그 부부의 남동생/처남.
    • 소련의 핵개발 과정에서 불필요한 낭비(쓸데없는 우라늄 농축)와 막다른 골목을 피할 수 있게 해줌
    •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Joe-1은 사실상 팻 맨의 복제품
  • 스파이 활동이 없었다 해도 소련의 핵개발에 큰 지장은 없었을 것
    • 냉전 초기 소련의 과학기술 역량에 대한 과소평가 작용
    • 스파이 정보가 갖는 미묘한 성격: 역정보에 대한 의심 때문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움

수소폭탄 논쟁

  • 맨해턴 프로젝트에 참여한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가 1942년부터 구상
    • 수소와 같은 가벼운 원소의 핵융합 반응 이용 → 원자폭탄의 수백~수천 배 위력
    • 원자폭탄의 크기 한계(임계질량) 탈피
  • 1946년 GAC에서 논의: 수소폭탄 개발보다 기존의 원자폭탄 보유고 확충에 우선순위
  •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 이후 가능성 급부상
  • 1949년 10월 GAC의 검토 보고서: 수소폭탄 개발에 만장일치로 반대 결정
  • 1950년 1월 트루먼은 GAC의 의견을 무시(더 쎈 폭탄 만들라는 유권자들의 아우성)하고 수소폭탄 개발에 나서기로 결정 (클라우스 푹스 스파이 사건 폭로, 중국 공산화, 한국전쟁 발발)

수소폭탄 개발

  • 1951년 수학자 스타니슬라프 울람과 텔러의 아이디어가 결정적 계기: 텔러-울람 구상
  • 아이비 마이크 실험(1952): 최초의 열핵융합 폭탄(10메가톤) — 유명한 비키니 실험. 제5후쿠류마루 피폭사건.
  • 캐슬-브라보 실험(1954): 비행기에 탑재가능한 최초의 수소폭탄(15메가톤)
  • 소련은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주도 하에 1955년 11월 수소폭탄 개발 → 냉전기 군비경쟁 시작 (1980년대 말까지 6만 기의 핵무기 제조)
  • 미국은 냉전 동안 핵무기 생산에 도합 5조 5천억 달러 지출

오펜하이머 청문회

1950년대 초 빨갱이 선풍

  • 냉전 초 미국 내의 공산주의 동조자를 색출해야 한다는 광적인 움직임 ← 알려진 원자 스파이 사례의 폭로 (앨런 넌 메이, 클라우스 푹스, 줄리어스 & 에델 로젠버그)
  •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 하원 반미행위특별위원회(House Un-American Committee, HUAC), FBI 국장 J. 에드가 후버가 주도
  • 과학자들에게 미친 영향: 일자리 상실, 여행 제한, 입국 거부, 이민…
    •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레지스탕스 활동했었던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입국 비자 발행 거부
    • 라이너스 폴링 출국 비자 발행 거부 (이때 왓슨과 크릭이 영국에서 이중나선 발표하고 있는데 폴링은 출국을 못해서 혼자 미국에서 삼중나선 삽질)
    • "수상한 과학자"의 특징: 2차대전 종전 직후 핵무기의 국제관리 주장했던 놈, 수소폭탄 개발 반대했던 놈, 반대하지는 않아도 유보적이었던 놈, 미국 정부에 "충분히" 동조하지 않은 놈 등등…
  • 특히 이론물리학자들이 집중적 주목 대상: 머리는 좋은데 순진해 빠져서(eggheads) 원자 “비밀”의 누출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으로 지목

오펜하이머 사례

  • 전쟁영웅이었던 오펜하이머, 10년도 못 되어 몰락
  •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좌익 활동 경력. 공산당에 입당하지는 않았지만 돈을 많이 댔고, 주변인들(마누라, 처제, 친구…)이 죄다 공산당원 (대공황기 지식인의 일반적 초상)
  • 1941년부터 FBI의 감시 대상, 1942년부터 육군 방첩대, 전후에 다시 FBI의 감시 대상
  • 로스앨러모스에서 지인과 제자들의 공산주의 활동 밀고
  • 1949년 6월 HUAC 청문회에 출석해 제자에게 불리한 증언
  • 수소폭탄 개발 반대 입장으로 수많은 적을 양산 (에드워드 텔러, 루이스 스트로스, 윌리엄 보든…)
  • 1954년 AEC 청문회 심사를 통해 기밀취급 허가 박탈 (Oppenheimer is “loyal”, but is a “security risk”)
  • 냉전 시기 “공공적 지식인”으로서 과학자의 역할과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 → “과학자 = 양심적 지식인이 아닌, 국가에서 시키는 거나 하는 협소한 전문가” 관점의 승리 (“수도꼭지 같은 존재on tap”, not “꼭대기의 존재on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