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과학과 2차대전

2차대전 소략

  • 과학에 기반한 신기술이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놓음 (중대한 전환점)
  • 물리학자의 전쟁(physicists’ war). ↔ 1차대전은 화학자의 전쟁
  • 월러 밀리스: 1차대전은 전쟁의 “기계화”를 가져온 반면(기술이 결정적 요인), 2차대전은 전쟁에 “과학혁명”을 일으킴
  • 과학자, 엔지니어, 기업가, 군인 사이의 전례없이 완전한 협력관계 출현
  • 전시 연구의 ‘성과’
    • 신무기: 레이다(+관련 장치), 원자폭탄, 제트기, 로켓, 소이탄, 화염방사기
    • (군)의학: 말라리아약, 페니실린, DDT 등 살충제
    • 파생된 새로운 도구 및 분야: 디지털 컴퓨터(암호해독), 사이버네틱스(궤적 추적), 오퍼레이션 리서치(레이더 운용)

군사연구의 제도화

  • 1차대전 시기 과학의 과학의 전시 동원은 임기응변적(과학자들의 자발적 참여, 군복 입히는 지랄… 비일관적 땜빵식)
  • 독일: 1937년 새로운 과학 연구 중앙기구인 Reichsforschungsrat (Reich Research Council) 설립, 군사 R&D 확대
  • 프랑스: 전시 대비를 위해 1938년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CNRS) 설립
  • 영국: 군대와 기존의 연구회(research council)들이 연구 조율
  • 미국의 전시 연구
    • 배경: 유럽 전쟁 발발 후 엘리트 과학자들의 우려 (바네바 부시, 칼 컴프턴, 프랭크 주잇, 제임스 코난트)
    • 1940년 6월 부시의 주도(이 양반이 전후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RnD 체제를 정립시킴)로 국방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 NDRC) 설립 → 민간 과학의 군사적 동원 임무
    • 미국 내 전시 동원가능 과학 자원 조사: 775개 대학, 산업연구소, 비영리기관의 인력 및 시설 목록 확보
    • 1941년 대통령 직속 과학연구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으로 확대 개편
    • 연방 연구 계약을 통해 산업체와 대학들이 특정한 군사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함 (전쟁 이전부터 존재하던 NACA의 모델)
    • 부시는 NACA 모델을 군사개발에 도입 — 소수의 엘리트 기관들을 집중 지원
      • 따로 연구소를 설립하지 않고 기존 연구소나 대학에 외주 (맨해튼 프로젝트는 예외. 그건 존나 기밀이니까)
      • 대학 지원금의 90%가 8개 기관에 집중(MIT, Caltech, Harvard, Columbia, UC Berkeley 등)
      • 간접비(overhead) 지원을 통해 해당 기관 수혜 — 연구비를 받음으로써 감사니 뭐니 절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것을 커버하기 위한 목적으로 줌. 지원금을 많이 받은 만큼 간접비도 많아짐 ← 연구자 개인 말고 대학이라는 기관에게 주어지는 인센티브. 대학들이 교수에게 돈 벌어오라고 닥달하는 이유임.
      • 산업체 연구소는 Western Electric(AT&T), Dupont, RCA, General Electric 순서
    • 일본의 진주만 공습 전에 이미 1700명의 물리학자가 전쟁 연구에 종사

레이다

  • 목표물에 부딪쳐 돌아오는 전자기파를 이용해 목표물의 위치와 이동 속도를 탐지하는 장치
    • = ‘무선 탐지 및 조준(RAdio Detection And Ranging)’의 약자
  • 기본 원리는 20세기 초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음
  • 1930년대 중반에 미국, 영국, 소련, 독일, 일본 등 주요 교전국들이 자체적인 레이다 개발 착수

영국의 레이다 개발

  • 최초의 실용적인 방어용 레이다 시스템 개발
  • 배경: 영국 본토에 대한 전시 폭격 대비
    • Cf. 이전까지의 조기경보 시스템: 육안 관측 + 소리 탐지 → 조기경보 효과 미미
  • 발단: 1935년 초 헨리 티저드의 Committee for Scientific Study of Air Defense에서 ‘death ray'의 가능성 검토
  • 기상학자 로버트 왓슨-와트: death ray는 불가능하지만, 무선으로 비행기의 위치 탐지는 가능
  • 1935년 2월 데번트리 실험: 8마일 밖의 비행기 탐지 성공 → ‘Radio Direction Finding’ 개발 착수
  • 체인 홈(Chain Home) 시스템의 건설
    • 독일의 영국 본토 공습에 대비하기 위한 조기경보 시스템
    • 영국 동쪽 연안에 일련의 송수신탑을 세워 영국 본토로 다가오는 비행 물체 탐지: 1937년 100마일 바깥의 비행기 탐지 가능
    • 1939년 완성 & 본격 가동 시작
    • 1940년 여름 브리튼 전투(Battle of Britain)에서 독일 공군(Luftwaffe)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 역할: 영국 공군(RAF)의 취약한 항공력 보충
    • 레이다를 뒷받침하는 정보처리 시스템의 중요성: 여과실(filter room), 작전실(operations room) 등에서 다양한 정보들을 취합해 현재 상황을 파악한 후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고 조치를 취함 → 오퍼레이션 리서치(operational/operations research, OR)의 기원
  • 체인 홈 시스템의 한계
    • 목표물의 위치와 방향 예측 부정확: 요격 및 대응을 위한 지시는 개략적인 수준
    • 장비의 규모가 커서(거대한 철탑들) 다양한 용도로 활용 불가능
    • 해법: 새로운 디스플레이 장치, 고주파를 활용한 레이다 개발 → 평면 위치 표시기(plan position indicator), 공동 자전관(cavity magnetron)이 1940년에 개발

영미 공동 연구개발

  • 처칠이 미국과의 정보 공유 및 공동 개발 결정: 1940년 9월 티저드를 미국에 파견 → NDRC의 레이다 부서(Microwave Committee) 책임자 앨프리드 루미스 면담, 공동 자전관 전달
  • 영국의 요구: 공동 자전관을 이용한 전투기 탑재 레이다 개발
  • 레이다 부서가 항공기 탑재 요격 시스템(AI-10) 개발에 최우선 순위 부여
  • 대규모 레이다 연구소(Radiation Laboratory, “Rad Lab”)를 MIT에 설립 (리 두브리지가 조직 책임)
  • 1941년 봄 AI-10의 시제품 완성, but 항공기 탐지 레이다로는 긴급성 감소
  • 잠수함 탐지로 방향 전환: 소나로는 탐지하기 힘든 적 잠수함이 수면으로 부상했을 때 항공기 탑재 레이다로 탐지
  • 1941년 8월 Rad Lab ASV: 선박(20-30마일), 잠수함(2-5마일) 탐지 성공 + Plan Position Indicator와 결합
    • → B-18 폭격기에 탑재,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 인한 동부 연안의 물자 손실 방어
    • (1942년 말, 독일 잠수함을 연안에서 300마일 바깥까지 추방)

Rad Lab의 진화

  • 진주만 습격, ASV의 성공 이후 군과 Rad Lab의 관계 밀접화 (수십 명의 육군, 해군 장교들이 연구소에 상주, 군과 물리학자 가교 역할)
  • Research Construction Corporation 설립 (시제품 모델 생산 전담)
  • 십여 개의 부서로 세분화 → 150가지 의 레이다 시스템 개발(화기 제어, 위치 송신, 장거리 항행, 지상 폭격)
  • 파생 연구 성과 양산
    • 1942년에 하버드대학에 레이다 대응장치 연구소(Radio Research Laboratory) 설립
    •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근접폭발 신관(proximity fuse) 개발
  • 1942년 말 월간 예산 115만 달러, 직원 2천 명 → 1945년 직원 4천 명(물리학자 5백 명)으로 규모 폭증
  • 레이다 관련 생산 비용으로 15억 달러 지출

레이다의 유산

  • 2차대전의 성패에 결정적 기여: “The atomic bomb ended the war, but radar won it.” (두브리지)
  • 임무지향적 학제 연구(interdisciplinary research)의 전통 확립
  • 전쟁 후 민간에 응용: 전파천문학의 탄생(1946년 1월 달 탐지), 지형 탐사, 기상 예보 등
  • 전자레인지(microwave oven) 개발
    • 1945년 Raytheon의 레이다 엔지니어 퍼시스펜서가 발견해 특허 출원
    • 1947년 "Radarange" 상업화

원자폭탄

발단: 우라늄 핵분열 발견

  • 레이더처럼 애초부터 군의 요청을 받은 게 아니고, 통념상의 "순수연구"에서 파생된 것
  • 1938년 12월 (전쟁 발발 8개월 전!) 독일의 오토 한/프리츠 슈트라스만 연구팀의 우라늄 핵 중성자 포격실험 → 원자번호 56인 바륨 발견
  • 공동 연구자 리제 마이트너(여성 과학자!)가 스웨덴에서(유대계라서 안슐루스 이후 도망가 있었음) 이론적 설명 제시: 우라늄 핵 '분열(fission)'
  • 핵분열 과정에서 사라진 질량(양자 질량의 1/5)이 에너지로 변환
  • 1939년 초 미국과 프랑스 연구팀(이렌 졸리오퀴리)이 핵분열 연쇄반응 발견 → 군사무기의 개발가능성 제시
  • 전쟁 발발하면서 독일과 연합국 사이의 연락 두절. 유대계 과학자들이 탈출했지만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한 등 많은 우수한 과학자들이 여전히 독일 국내 잔류. 연합국의 불안 → 미국, 영국, 독일, 소련, 일본 등 주요 교전국들이 원자폭탄 개발에 나섬

미국의 원자탄 개발

  • 발단-개시
    • 2차대전 발발 후 레오 질라드(독일 탈출한 유대인. 이탈리아의 페르미와 핵분열 실험)가 아인슈타인(마찬가지이며, 1930년대에 신적 존재로 취급받던 우상)을 설득해 루즈벨트에게 서신(사실 질라드가 다 써준 거)을 보냄.
    • 하지만 아직 미국은 전쟁 참여하기 전 시점이었고, 조그만 연구소 하나 만들어준 뒤 심드렁 (원자탄은 만들기 어려우며, 만든다 해도 이번 전쟁 끝나기 전에 완성될지 의문이고, 그 비용으로 재래무기 만들기도 벅차다)
    • 1941년 9월 영국의 모드(MAUD) 보고서 전달 → “우라늄 폭탄은 근시일에 실현가능하며 전쟁에서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음. 그리고 독일에서 이미 2년 전부터 연구를 개시했을지도 모름(연락이 두절되어 안에서 뭘 하는지 모르니까)”
    • 1941년 12월 원자탄 개발에 본격 착수 (진주만 공습 하루 전에 승인) → 1942년 여름, 미 육군이 관할하는 맨해턴 프로젝트 개시. 레슬리 그로브즈 공병 준장(원래 대령이었는데 박사들 통제해야 한다고 이거 하면서 별 한개 달아줌)이 총책임,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과학 부문 담당. (아인슈타인은 편지 한장 보내는 데 이름만 빌려주고 한 거 없음)
    • 오크리지, 핸퍼드, 로스앨러모스 등 미국 전역에서 프로젝트 진행: 총 22억 달러 소요
  • 핵분열 물질 조달
    • 테네시 주 오크리지와 버클리대 방사연구소(Radiation Laboratory)에서 전자기분리법(Y-12), 기체확산법(K-25), 열확산법(S-50)을 이용해 U 235 를 분리농축 (여러 대기업이 용역업체로 참여)
    • 시카고대학의 금속 연구소(Metallurgical Laboratory)에서 U 238 로부터 플루토늄 분리 공정 개발 → 듀폰의 참여 하에 1944년 말부터 워싱턴 주 핸퍼드에서 플루토늄 대량생산
  • 최종 폭탄 설계 및 조립
    • 1943년 3월부터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 3000여명의 과학자 참여
    •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연구개발 책임
    • 포격결합법(U 235)과 내파법(플루토늄)의 두 갈래로 폭탄 제조
    • 1945년 7월 16일 플루토늄 폭탄에 대한 트리니티(Trinity) 실험
  • 실전 투입
    •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리틀 보이’)와 나가사키(‘팻 맨’)에 사전경고 없이 투하
    • 일본 항복, 그 해 말까지 20만 이상의 민간인 사망

맨해턴 프로젝트의 특징

  • 맨해턴 프로젝트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흔히 로스앨러모스에 초점
    • 노벨상 수상자들을 포함한 영민한 물리학자들에 대한 주목
    • 다른 집단들(엔지니어, 청부회사, 군인 등)의 기여에 대한 경시 (보수적 태도, 기술적 관행, 비밀주의 제약) → 맨해턴 프로젝트의 전체적 상을 심대하게 왜곡
  • 실제로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과 자원 결합(과학 연구 + 공정 개발 + 공장 건설)
    • 엄청난 자원이 오크리지와 핸퍼드의 핵연료 제조단지에 투입: Stone & Webster, M. W. Kellogg Co., Union Carbide and Carbon, Dupont 등의 기여
    • 충분한 안전 여유를 두는 엔지니어들의 ‘보수성’이 프로젝트를 구해내기도
  • 원자폭탄이 순수 물리학의 성과라는 주장은 전후에 만들어진 ‘신화’
  • 원자폭탄 제조는 미 육군 공병대 책임의 군사적 프로젝트 (프로젝트를 총괄한 레슬리 그로브스의 역할)
    • 이를 과학 프로젝트의 연장으로 생각한 엘리트 과학자들의 인식과 충돌
    • 질라드 탄원서, 프랑크 보고서: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과학자들의 통제권 ‘회복’ 시도 ← 프로젝트 목적에 대한 과학자들과 군대의 이해 차이 (시범적 생산 vs. ‘생산라인’의 구축)
    • 원자폭탄 투하 작전의 시험은 1944년 3월, 이를 담당할 509 composite group 구성은 1944년 9월에 시작됨

페니실린

페니실린과 전쟁

  • 1939년 9월까지 유효성분 미분리 → 1944년 D-day 직전에는 대량생산되어 군인과 민간인들에게 공급
  • 다양한 과학, 공학 분야의 통합, 생명과학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규모의 협력적 연구팀 (세균학, 균류학, 화학, 엔지니어링…)
  • 발효를 통한 천연물질의 대량생산을 위한 신기술 개발 → 전후에 biotechnology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됨

발단

  • 영국 세인트메리 병원의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
  • 배경: 1920년대 초에 사람의 눈물에서 세균을 죽이는 효소(lysozyme) 발견
  • 1928년 9월의 우연한 사건 → 세균을 죽이는 푸른곰팡이 발견
  • 1929년 British Journal of Experimental Pathology 에 발표: 곰팡이의 학명 Penicillium notatum 을 따서 ‘페니실린’으로 명명. 하지만 발견하고 이름까지 붙였지만 유효성분을 분리해 내는 데는 실패
  • 상당한 주목을 끌었으나 이후의 발전은 파편화된 과학 공동체 때문에 지연 (세균학, 생화학, 병리학 등)

개발

  • 옥스퍼드대학에 병리학 교수 하워드 플로리가 이끄는 학제적 연구팀 결성(임상병리학, 실험병리학, 세균학 등)
  • 1937년 생화학자 에른스트 보리스 체인 합류 → 페니실린을 분리해 내는 과제에 도전 (의학이 아닌 생화학의 문제)
  • 1939년 11월 록펠러재단에 연구비 신청 → 과학지원 책임자 워런 위버의 추천으로 연구비 지원
  • 체인이 동결건조법을 이용해 생활성 분말 추출 성공 (순수한 페니실린은 1%)
  • 1940년 3월 40mg의 페니실린을 두 마리의 쥐에 주입하는 실험 → 페니실린은 단백질(효소)이 아님을 확인 → 과학에서 의학 프로젝트로 전환 (무독성 확인)
  • 생화학자 노먼 히틀리가 역추출(back extraction) 기법 제안 → 불순물 제거, 추출 효율 향상
  • 페니실리움 곰팡이를 키울 수 있는 bedpan fermenter 고안
  • 1941년 초까지 6명의 환자 치료 시도

미국으로의 이전

  • 1941년 6월 위버의 초청으로 플로리와 히틀리가 미국 방문
  • 미 농무부 산하의 Northern Regional Research Laboratory (Peoria Lab)가 중대한 기여
    • 액내배양(submerged fermentation) 기법(배양액을 계속 휘저어서 액면 아래까지 산소공급) + 옥수수 침지액(cornsteep liquor; 농업폐기물)을 배양액으로 활용(그전까지는 무슨 고기 끓인 물 같은 것을 배양액으로 사용) → 대량생산, 가격하락
    • 1942년 생산성이 훨씬 높은 페니실리움 균주 발견 (2단위/ml → 100단위/ml)
    • 개인의 기여가 아닌 팀 작업의 산물 (전후 크레딧 배분을 위해 누가 액내배양법을 개발했고 누가 옥수수 침지액을 쓰자고 했으며… 물어보았지만 "우리 다 같이 했기 때문에 따로 집어낼 수 없다"고 답변) ← 산업연구의 영향
  • 전쟁이 일어나면서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 회사 탐색: Merck, Squibb, Pfizer 등

대량생산

  • 1943년 여름까지 Chester County Mushroom Laboratories 라는 중소기업이 미국 생산량의 대부분 차지 (우유병에 배양액 넣고 균주를 넣어 표면양식하는 구식 방식)
  • 1943년 8월 Pfizer가 대규모 액내배양 시험공장 건설
  • 1944년 2월 최초의 상업적 공장 건설 → 미국 생산량의 절반 차지
    • 생산량 급증: 1943년 전반기 10억 단위 미만 → 하반기 200억 단위 → 1944년 1조 6630억 단위
    • 가격 급락: 1943년 1회 접종에 20달러 → 1945년 6.5센트
    • 1945년 순수 페니실린 생산량 4톤 (2년 전의 300배) ← 14개의 전시 페니실린 공장 건설에 정부의 대규모 지원

페니실린의 전시 효과

  • 다양한 종류의 감염증(폐렴, 류마티스열, 가스괴저, 매독, 임질 등)에 특효
  • 초기에 미국과 영국 육군은 미온적 태도 → 페니실린의 힘을 보여주는 극적인 시연과 선전 필요
    • 1942년 11월 코코넛그로브 나이트클럽(군인들 위락시설) 화재 — 500여명 사망, 350명 중상
    • 1943년 북아프리카 전투와 시칠리아 침공에서 부상자 치료
    • 특히 성병(매독, 임질)에 놀라운 효과 발휘
    • 당시엔 내성균이 없었기 때문에 주사 한대 맞으면 벌떡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의 약!
  • 1944년부터는 실험적 치료법이 아닌 일종의 ‘아이콘’으로 부상. D-day 때는 충분히 구비되어 위생병의 90%가 페니실린 소지
    • 1945년 플레밍, 플로리, 체인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 누가 페니실린을 만들어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였나?
    • 대중매체에서 영웅으로 떠받들어주는 플레밍? 유효성분을 분리해낸 휘틀리? 농업적 테크닉을 적용해서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페오리아의 이름없는 연구원들? 그 기술을 채택해서 생산하기로 결정한 피처 사장?

페니실린의 유산

  • 대중적인 인식(플레밍의 콧물)과 달리 맨해튼 프로젝트에 더 가까운 성격.
    • 학제적 연구의 성과, 거대하고 산업화된 과학의 개가
    • 플레밍이 페니실린의 ‘영웅’으로 부상한 것은 2차대전기의 선전에 기인
  • 힘의 균형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는 또 하나의 상징
    • 영국에서는 미국에 페니실린을 너무 값싸게 넘겨줬다는 피해의식 지속(미국엔 페니실린이 넘쳐나서 민간 병원에서까지 쓰기 시작하는데 영국엔 약이 없어서 전후 복구 과정에서 사람들이 픽픽 죽어나감).
  • 전시 선전이 만들어낸 ‘기적의 약(wonder drug)’ 이미지에 대한 대중의 맹신 → 전후의 부작용, ‘비극’의 시작

DDT

살충제와 화학무기의 상관관계

  • 1차대전 이후 합성살충제 연구 활발 ← 화학무기 개발의 여파
  • 미국: 화학전부대(CWS)의 자기정당화, 존재이유 확인 → 살충제 개발, 상업적 해충 방제 시장 진출
  • 독일: 초거대 화학회사 이게파르벤(I.G. Farben)에서 새로운 유기인산계열 살충제 개발 (cyanide + organophosphate) (파라티온, 말라티온)
    • → 1936년 게르하르트 슈라더가 신경가스 타분(Tabun), 사린(Sarin) 합성 — 즉 신경가스는 살충제 개발의 부산물. 다만 전쟁에는 쓰이지 않음 (2차대전은 화학전이 아니었음)
  • 즉 1차대전기의 화학무기 연구 → 전간기의 살충제 연구 → 2차대전기의 화학무기 연구…
    • 인간에 대한 전쟁과 곤충에 대한 '전쟁'이 종종 나란히 제시
    • 2차대전기에는 대상에 대한 박멸(annihilation)을 추구. 해충을 박멸하듯 적을 박멸하자!
    • 굳이 독일의 유대인 학살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미군의 대일본 선전에서도 일본인을 "바퀴벌레"로 그리면서 "박멸"할 것을 주장
    • 후일 레이첼 카슨이 DDT 금지를 주장하며 비판했던 망탈리테가 이것

2차대전

  • 질병을 옮기는 곤충 방제에 대한 군사적 요구: 이(티푸스), 모기(말라리아) → 모기 구제를 위한 에어로졸 분무기, 휴대가능한 이약(louse powder) 등장
  • 단점: 전시에 살충제의 원료가 되는 제충국 부족

해법: DDT(dichloro diphenyl trichloroethane)의 등장

  • 1930년대 말에 스위스의 염료회사 가이기(Geigy)의 화학자 파울 뮐러가 살충효과 확인
  • 살충제로서 이상적 특징: 낮은 농도로, 장기간에 걸쳐, 강한 살충효과, 인체에 낮은 독성
    • 뒤집어 말하면: 낮은 농도에서도 강력한 독성, 쉽게 분해되지 않아서 장기간 유효한(어디에 축적될지 모르는) 물질
  • 1941년 미국 자회사를 통해 판매 시도했으나 거부
  • 1942년 10월 농무부 산하 곤충학국(Bureau of Entomology)에 전달 → 야외 시험에서 “마술같은” 살충효과 확인
  • 1943년 9월 NIH 연구자들이 DDT의 안전성 보고. Cf. 인체 안전성은 완전히 확인된 바 없음: “이득이 위험을 압도” 판단

DDT의 실제 활용

  • 1943년 12월 연합군 점령지인 나폴리에서 티푸스 환자 발생
    • 1백만 명의 민간인들에게 이 약을 뿌리는 것으로 대응
    • 겨울에 이미 발생해 전파중인 티푸스의 유행을 중단시킨 최초의 사건
  • 태평양 전선(여기선 말라리아가 문제)에서 모기 구제를 위한 항공방제: 한번에 수천 에이커씩 DDT 살포 (실전 부대에 지급된 화학전 장비 활용)
  • 곤충들에 대한 “총체적 승리”의 희망 제시, 문화적 ‘아이콘’으로 부상
    • 뮐러는 194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화학자인데 생리의학상 수상 — 의미심장)
    • 전후 살충제 오남용의 중요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