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과학과 1차대전

도입: 전쟁과 테크노사이언스

20세기 테크노사이언스와 정부(라고 쓰고 군대라고 읽음)의 관계

  • 전쟁은 과학이 정부에 봉사하는 전형적인 계기 제공
    • 역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과학의 쓸모를 깨닫는 계기 (그전까지 과학은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활동에 불과)
  •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 “인류 역사에서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 (에릭 홉스봄)
    • 군대/전쟁과 과학기술 발전 사이의 관계가 전례없이 긴밀하고 전면적인 것이 됨
  • 과학이 전쟁에 미친 영향만큼 전쟁도 과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1차대전 소략

  • 최초의 총력전(total war)이자 ‘산업혁명 이후 전쟁(post industrial revolution war)’
  • 총력전이란: 모든 국민이 전쟁을 경험
    • 공습의 존재 — 더이상 안전한 후방은 없다
    • 봉쇄의 존재 — 병기, 탄약뿐 아니라 모든 핵심 물자의 산업적 생산이 중요해짐
      • 독일은 북해에서 막혀서 칠레산 초석을 못 들여옴
      • 엽합국은 독일이 생산해오던 광학용 유리, 합성염료, 의약품을 못 들여옴
    • 진통제 아세타닐라이드 가격이 파운드당 20센트에서 3달러, 해열제 안티피린이 2달러에서 60달러로 폭등
    • 알렉스 롤랜드: “독일은 결코 전장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전쟁에 필요한 물자가 바닥난 것뿐이었다…”
  • 새로운 기술과 과학 실천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1차대전은 화학자의 전쟁, 2차대전은 물리학자의 전쟁), 결정적이지는 않았음
  • 과학자들의 ‘자발적’ 동원: 전쟁 말기로 가면서 군대에 흡수, 군복 입고 계급장 달고 일함 (2차대전 때 민간 과학자 신분으로 실험복 입고 일한 것과 대조적)
  • 1차대전의 첨단기술들
    • 기관총: 기관총은 원래 식민지에서 양민학살용으로 쓰던 것인데, 유럽인들끼리 서로 기관총을 쏴갈긴 건 이번이 처음 → 전선 교착
    • 전선 교착을 타개하려는 삽질들: 탱크, 독가스
    • 잠수함: 연합국의 봉쇄를 뚫으려는 독일의 노력 — 거기에 대응하는 잠수함 탐지기
    • 비행기, 비행선: 정찰 및 공습. 안전한 후방은 없음 → 총력전 그 자체

독일의 전시연구

  • 프리츠 하버
    • 독일에 동화주의적 유대인 (19세기-20세기 초만 해도 독일이 유대인한테 그나마 나은 곳이었음. 유럽 어느 곳이나 반유대주의는 편재했지만, 독일에서는 유대인이 관료도 될 수 있고 교수도 될 수 있고)
    • 질소고정 암모니아 합성법 개발 (N2 + 3 H2 → 2 NH3) — 1919년 노벨 화학상 수상
      • 질소는 거의 불활성이지만 암모니아는 매우 불안정하기에 질소를 암모니아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
      • 오랫동안 유럽인들은 칠레에 그냥 쌓여 있는 구아노 초석(새똥)을 질산염 재료로 사용.
      • 1908년 상업적으로 이용가능한 수준(5-10% 효율)의 질소고정 실험 성공, 1909년 초 오스뮴 촉매로 수율 향상
      • BASF의 화학 엔지니어 카를 보슈가 대량생산을 위한 공정 개발 (하버-보쉬 공정) → 질소비료
      • 개전 초기 질산염 생산 공정으로 개조
      • 1915년 5월, 매일 150톤의 질산염 생산 → 폭약 생산으로 독일의 전투능력 유지
    • 화학전 프로그램 책임
      • 개전 초기에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이 화학전 가능성 탐색
      • 독일이 많이 욕을 먹긴 하지만 일단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프랑스 (포로 화학탄두를 쏨) — 하지만 포탄의 열으로 화학물질이 변성, 폭풍에 의해 분산되는 등 별 효과가 없음
      • 1914년 말-1915년 초 전선의 정체 양상 → 이를 깨뜨리기 위한 새로운 전술로 하버가 염소가스와 실린더 살포방법 제안 (통째로 들이붓자!)
      •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 ∙ 전기화학 연구소 (1916년부터 군 산하)에서 연구 진행 (오토 한, 제임스 프랑크, 구스타프 헤르츠 등도 참여) → 종전 무렵에는 직원 1500명, 과학자 150명
      • 1915년 4월 22일 벨기에 이프르에서 최초의 독가스 공격 (6천 개의 실린더, 150톤의 염소가스) → 5천명 사망, 1만5천명 부상 (전세에는 별 영향 못줌)
      • 하버의 개인적 비극: 마누라 자살
  • 다른 국가들도 유사한 연구개발 및 생산으로 대응
    • 영국:
      • 1915년 9월 루스에서 염소 가스 사용 — 바람 방향이 바뀌어서 영국군이 더 많이 죽음 (병맛)
      • 포스겐(phosgene; 나중에 나치가 유대인 죽일 때 씀), 겨자탄(mustard gas) 등 더 독성이 강한 물질으로 맞대응
    • 독가스에 맞서는 방독면 개발 (군비경쟁 양상), 1차대전 때 124,500톤의 독가스가 전투에서 활용
    • 미국: 광산국(Board of Mines)에서 개발 담당
      • 1918년 화학전 부대(Chemical Warfare Service) 창설
      • 제임스 코난트의 주도 하에 독가스 연구: 겨자탄, 루이사이트(lewisite) 등 더 강력한 독가스와 대량생산 공장(30톤/day) 건설
      • 전쟁 말기에는 미국 화학자의 10% 이상이 화학전 부대 업무 조력
  • 군사무기 연구의 윤리성
    • 독가스 연구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도덕적 가책을 표현하지 않음
    • 하버: “전시에는 평화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기 마련”
    • 코난트: “내게 새롭고 더 많은 가스의 개발은 폭약이나 총포의 개발보다 더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미국의 전시연구

  • 1915년 해군자문위원회(Naval Consulting Board, NCB) 설립
    • 유럽에서의 전쟁 장기화로 불안감 고조
    • 해군 장관 조지퍼스 대니얼스가 주도: 토머스 에디슨이 위원장
    • 저명한 발명가 및 엔지니어들로 위원 구성: 레오 베이클런드(베이클라이트 발명자), 윌리스 휘트니(산업과학자), 프랭크 스프라그(노면전차 발명 및 사업가), M. R. 허친슨(에디슨 똘마니) 등
    • 미국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s, NAS]와 미국물리학회[APS] 소속 과학자들은 의도적으로 누락 (기자들이 "왜죠?" 라고 하자 허친슨 왈 "에디슨이 과학자들을 안 좋아함")
    • 운영방식도 에디슨식(19세기 발명가 모델): 독자적 발명 +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접수된 발명 아이디어들 검토
  • 물리학자들의 대응 — 에디슨이 모욕감을 줬어
    • "기본적으로 순수과학 신봉자들이지만, 우리가 손 더럽히는 일을 안 하는 거지 못 하는 게 아니다!"
    • 천체물리학자 조지 헤일의 주도: NCB 결성 직후인 1915년 6월 NAS 총회에서 조직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전시 대비에 봉사할 것을 대통령에게 청원할 것을 제안 (부결)
    • 1916년 4월 독일에 대한 최후통첩 후 다시 제안, 결의안 만장일치 통과 (A. A. 노이스, 로버트 밀리컨의 지지)
    • 윌슨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NAS 산하에 국가연구위원회(National Research Council, NRC) 설립
    • 배경: 물리학의 지위를 높이는 계기로 사고 (독일의 대학과 연구기관에 자리잡은 과학 체제의 수립을 목표)
    • 헤일: “미국에서 연구를 진작하기 위해 우리가 일찍이 가졌던 최고의 기회”
    • 위원: 휘트니(양다리), 베이클런드(양다리), J. J. 카티(ATnT 연구총책), 마이클 푸핀 등 (대체로 물리학 관련자) + 정부 및 군 관계자 → NCB와 전시 연구의 주도권 다툼 (← 독립발명가와 과학자들 사이의 갈등)
  • 잠수함 탐지기 연구: NCB vs. NRC
    • 1917년 2월 해군의 잠수함 탐지장치 개발 요청
    • NCB의 휘트니가 매사추세츠 주 나한트에 연구 기지 설립 (쿨리지, 랭뮈어 등 GE와 AT&T의 산업체 과학자들 참여, 대학의 물리학자 배제)
    • NRC에서는 밀리컨의 주장에 따라 코넥티컷 주 뉴런던에 연구 시설 마련 (대학 물리학자들 참여)
    • 밀리컨: "순수하고 간단한 물리학의 문제" → 영국과 프랑스에서 고안한 음파 탐지 방식을 개선한 잠수함 탐지기 개발 (NCB의 탐지기보다 더 우수)
  • NCB의 실패
    • 일반 국민들이 보내온 발명들을 검토하는 프로그램은 대실패 (11만건 중 개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110건, 생산 단계까지 도달한 것은 1건)
    • 에디슨이 고안한 45개 장치도 해군에서 거부됨
    • 허드슨 맥심(기관총 발명자 하이럼 맥심의 아들): “지금은 전문가의 시대이며, 어떤 발명가, 과학자, 엔지니어라도 쓸만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해군과 육군이 처한 문제의 특수한 요구조건들에 많은 시간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영웅적 발명가의 시대는 저물고 전문 과학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

1차대전의 과학계 여파

과학 국제주의의 후퇴

  • 19세기 후반 국제적 과학자 공동체 등장
    • 1860-1899년 사이에 23개의 국제 과학연맹 결성
    • 1899년 국제학회연합(International Association of Academies, IAA) 설립: 1913년에 14개국 23개 학회 참가 (이 중 14개 학회가 1차대전 교전국 소속)
    • 올림픽 국제주의(Olympic internationalism) — 국경을 초월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자국 과학의 우수성을 강조(입으로는 올림픽 정신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메달 개수 세어보듯). 당대 민족주의와 충돌하지는 않지만 1차대전이 일어나면서 각 과학계가 자국에 신속하게 복무한 배경으로 생각해 볼 법.
  • 1914년 10월 독일 대학교수 ∙ 과학자 선언 (”An die Kulturwelt!”, 일명 ‘93인 선언’) 발표
    • 독일의 벨기에 침공 정당화
    • 독일의 군국주의는 문명의 첨병이며 과학자와 지식인의 참여는 숭고한 임무
    • 프리츠 하버, 에른스트 해켈, 발터 네른스트, 빌헬름 오스트발트, 막스 플랑크, 빌헬름 뢴트겐, 빌헬름 빈 등 저명한 과학자 13명 서명
    • 하버: “과학은 평화시에는 인류에 속하며 전시에는 조국에 속한다”
  • 영국과 프랑스의 보복 대응
    • 영국 왕립학회: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적 회원을 모두 제명하자는 제안
    •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선언에 서명한 회원들을 모두 제명
  • 이의제기 움직임도 존재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주도로 영토 병합 없는 정의로운 평화를 요구하는 대항 선언문 발표
    • 1914년 말 9명의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평화운동 단체 Bund Neues Vaterland (New Fatherland League) 결성 → 이후 독일인권연맹으로 발전
  • 전후 국제 과학계 재편
    • 1919년에 IAA를 대신해 만들어진 국제연구협의회(International Research Council, IRC)는 독일 등 추축국 배제 (ICSU의 전신)
    • 1926년 제재를 풀었지만 독일이 가입 거부 → 2차대전까지 긴장 계속

산업연구 부상에 기여

  • 독일 제품의 수입이 중단되면서 대체재 생산 노력 증가 → 미국 산업 R&D의 급격한 증가 (특히 염료, 제약산업)
  • 적국자산관리국(Alien Property Custodian)이 독일의 화학물질 특허 몰수 → 미국 회사들에 공개 사용허가
  • 화학전 부대의 독가스 연구 및 대량생산도 화학산업의 부상에 일조

조직화된 군사 연구의 선례 제공

  • 전쟁이 끝나자 대체로 전쟁 이전으로 회귀(“return to normalcy”)
  • 과학(자들)을 동원해 신속하게 전시 노력에 통합한 선례 확립
  • 군대의 대학 연구 지원: 전쟁 말기에 육군과 해군이 40여개 대학의 실험실에 연구자금 지원
  • 군의 보안 규제도 처음으로 등장

제도적 변화와 그 한계

  • NRC는 영구 인가를 얻어 1차대전 이후에도 존속
  • 1915년 설립된 항공자문위원회(National Advisory Committee on Aeronautics, NACA)가 전쟁 이후에도 유지 (대학과 민간의 과학자들에 대한 연구 지원의 전통)
  • 독일 스타일의 국립 과학연구소를 설립하려는 헤일과 밀리컨의 노력은 좌절 (의회, 행정부 모두 정치적 통제에서 자유로운 기초연구 지원을 거부)
  • 전미연구재단(2천만 달러 기금)을 만들려는 노력 역시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