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산업연구소

산업연구소의 의미

산업연구소 또는 기업부설연구소

  • 기술혁신의 주된 원천 + 과학 활동의 제도적 기반
  • 학계와 산업계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 공간(boundary space)
    • 산업체 과학자(industrial scientist) — 형용모순?
    • 산업체에 고용된 월급쟁이로서, 그 산업체-기업에 득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순수과학자라고 할 수 있나?
    • 통념과 달리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산업체 과학자가 과학자의 절반 이상
  • 20세기 후반 ‘과학의 상업화’ 논의의 기원
    • 19세기 말 독일의 화학산업(유기염료), 미국의 전기-통신산업(전신·전화) — “제2차 산업혁명”
    • 20세기의 후발자들에게 모델을 제공한 것은 미국의 사례

산업연구개발 전사(前史)

독립발명가의 시대

  • 산업연구소의 존재이유 — 기술혁신. 그럼 산업연구소 존재 이전에는 누가 기술혁신을? "발명가"들.
    • 새뮤얼 모스(전신), 토머스 에디슨(직류전기, 특허 1천여 개), 알렉산더 벨(전화), 니콜라 테슬라(교류전기), 라이트 형제(뱅기), 엘리후 톰슨(특허 600여개), 엘머 스페리(자동제어시스템), 리 드 포리스트(진공관), 에드윈 암스트롱(FM 라디오) 등
    • 연구개발(RnD) 개념이 19세기 말에 그 역할을 한 것이 "발명"
    • 19세기 말의 주요 첨단기술 산업들(전신, 전화, 전기)이 이들의 발명에서 유래
    • 이들 분야의 주요 기업들(전신의 웨스턴유니온, 전화의 벨텔레폰, 전기의 제너럴일렉트릭과 웨스팅하우스)은 초기 새로은 기술(특허)를 외부 발명가들에게 의존
      • 발명가라는 인종들은 월급쟁이 일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 두고 그들이 특허를 등록하면 그것을 돈을 주고 사는 방식
      • 대기업 내 실험실/과학자는 1876년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의 화학자 고용이 최초인데 표준화, 장비 시험, 공정 개선 등에 활용되었지 신지식, 신제품의 연구개발이 주 업무는 아니었음
  • 일부 발명가들은 발명(과 그 이후의 특허취득)을 위해 자체적인 "발명공장"을 설립, 전문화된 직원, 도서실(특허문서가 그득그득), 기계작업장(머신 샵. 필요한 기계를 바로바로 만들어 씀), 실험실 등 구비
    • e.g. 토머스 에디슨의 멘로파크 연구소 (1876년)
    • 산업연구소의 전신일까? 발명공장들은 이름은 연구소지만 과학 지식/연구에는 무관심했고 특허를 통한 상업적 이득이 우선.
    • 예컨대 백열전구를 오래 켜면 유리가 검게 타는 "에디슨 현상" ← 정작 에디슨은 그 원인을 밝히거나 해결하는 것에 관심 없음

과학의 전문직업화와 순수과학 이념

  • 19세기에 미국 과학계는 별 볼일 없음 — 독일, 영국이 대세였던 시기. 미국이 과학의 중심지가 된 것은 1930년대 이후
  • 19세기 말쯤 되면 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하고 사회로 나가는 졸업생 수 증가
  • 독일의 전례를 따라 ‘연구대학(research university)’ 등장:
    • "연구중심대학"의 개념은 1840년대 독일이 시초.
    • 그 전까지 미국의 "역사가 오래된 대학"들은 소위 전인적 인간을 키우는 인문학 중심의 대학.
    • 미국의 경우 존스홉킨스 대학(1873년)이 최초, 교육과 연구의 결합이 이상
  • 연구대학에 자리를 잡은 과학자들이 ‘순수과학(pure science)’의 이상 추구 요청
    • 물리학자 헨리 롤랜드(존스홉킨스 교수)의 1883년 AAAS 연설 — 과학을 위한 과학 vs. 이윤을 위한 과학
    • 미국 대중이 발명과 과학을 혼동하고, 발명가 따위를 과학자로 오인하는 것에 분노 (지위상승 욕망)
    • → 독일의 모델에 눈을 돌림 (이야 독일 애들은 자유롭게 연구하는구나!)
      • 사실 오해인데, 독일 과학자들에게 연구 자율성은 있었지만 그들이 (미국놈들이 이상으로 삼는) "순수"과학만을 연구한 것이 아님 (19세기 독일 과학자 대부분이 특허 소유자)

독일의 연구개발 모형

  • 1차대전 이전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발전된 연구 시스템
  • 대학의 연구에 대한 기업의 후원: “기업과 대학교수의 이해관계는 상호적” (교수와 대학원생에게 투자, 새로운 과학지식 습득과 고등교육을 받은 졸업생 채용)
  • 정부와 기업이 후원하는 연구소(e.g. 카이저 빌헬름 협회 산하 연구소들): 대학교수와 기업 과학자에게 모두 중요한 기초지식 창출
  • 대학과 연구소에서의 과학 연구와 대학원 교육의 높은 수준 (대학교수의 연구주제 선택 자율성 보장)
  • 1900년경까지 바이엘, BASF, Hoechst, 지멘스 등 화학(합성염료), 전기회사들이 사내 연구개발 조직 설립
    • 합성염료 산업의 특징: 의상과 관련된 ‘유행’에 민감, 가격 변동 격심 (염료에 대한 특허를 받아 봤자, 특허 보장기간보다 유행기간이 짧음) → 지속적 기술개발 요구
  • 화학산업 → 제약산업 다각화: 합성염료는 미생물에 착색해 현미경으로 관찰할 때 쓰임
    • → 숙주 세포는 죽이지 않고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죽일 수 있는 ‘마법의 탄환’ 추구 (e.g. 폴 에를리히, 살바르산, 1911)

미국의 산업연구소

최초의 산업연구소들 — 1차대전 이전 시기

  • 제너럴 일렉트릭(GE), 미국전화전신회사(AT&T), 듀퐁(DuPont), 이스트만 코닥(Eastman Kodak) 등 10여개 회사
  • 산업연구소의 정의: 회사의 단기적 이익에 매여 있지 않고 비교적 중장기적 접근을 하지만 어쨌든 회사의 필요에는 부합하는 활동을 하며 그 과정에서 학술적 탐구도 겸사겸사 하는 곳

“생산 시설과 분리되어, 과학과 고등 엔지니어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직원으로 일하고, 회사와 관련된 과학기술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하며, 회사의 즉각적 요구에서는 다소 면제돼 있지만 장기적인 회사의 필요에는 응답하도록 조직되고 관리되는 연구소”

Leonard Reich

공식적 연구개발 프로그램의 설립 배경

  • 독립 발명가들의 특허가 이때쯤 만료되기 시작함 → 회사의 사업이나 핵심 기술에 대한 경쟁 위협이 동기 (산업적 “생명보험”)
  • 연방정부의 반독점 활동: 1892년 셔먼 반독점법 통과로 특허를 보유한 회사의 인수 합병이 어려워짐 (수평적 합병에서 수직적 통합으로)

과학연구소일까? — 발명가들이 아닌 과학자들을 고용한 이유?

  • 경제적 이유
    • 1870-1900년 미국 대학의 (과학연구) 팽창 → 매년 수백 명의 박사급 인력 배출
    • 공급이 과학 교수 수요 초과 → 과학자들이 산업계 경력에 눈을 돌림
  • 문화적 이유
    • 발명가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개인적, idiosyncratic한 것으로 제시 (eureka moment, flash of insight, genius…) → 예측불가능, 불확실성 해소에 도움 안됨
    • 산업체 과학자들은 효율적이고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신기술 개발 약속 (체계적인 과학적 방법 활용, 팀 작업)

“Nowhere any trace of a flash of genius.”

카를 뒤스베르크(바이엘 연구소장)

“No geniuses here; just a bunch of average Americans working together.”

몬산토 사의 채용 홍보 필름

미국 산업연구소의 실례

제너럴일렉트릭

  • 연구소 설립 배경
    • 에디슨의 탄소 필라멘트 전구 특허 만료(1894) & 독일과 미국에서 새로운 조명장치 개발
    • 수석 컨설팅 엔지니어인 찰스 스타인메츠가 새로운 제품 개발을 위한 연구소를 설립하도록 이사회 설득
  • 1900년 MIT의 물리화학자 윌리스 R. 휘트니를 초대 소장으로 영입: 순수과학 이데올로기와 회사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
  • 1907년까지는 회사의 당면 과제인 새로운 전구 필라멘트 개발에 실패
  • 연성 텅스텐 필라멘트 개발(윌리엄 쿨리지, 1910) & 불활성기체를 채운 전구 개발(어빙 랭뮈어, 1913) 성공 → 텅스텐-아르곤 전구 "마즈다"(상표명)의 상업적 성공
    • 1932년 랭뮈어가 전구 개발 연구를 더 밀여붙여 계면화학 연구로 노벨 화학상 수상
    • 휘트니의 개인적 희생: 자신의 과학 연구 포기, 세 차례의 신경쇠약 진단

미국전화전신회사(ATnT)

  • 연구소 설립 배경
    • 벨의 전화 특허 만료(1893년. 그 전까지는 벨이 100% 독점) & 다수의 독립 전화회사 등장 (1907년에 전화 회사 6천 여 개, 그리고 이 전화회사들은 서로 연결이 안 됨)
    • 1900년대 접어들어 새로운 경쟁자(라디오) 등장: 방어적 전략
    • 1907년 J. P. 모건이 인수한 후 공세적 독점주의 방식으로 회귀 → 혁신주의 시대의 반독점 공격 야기
  • 1907년 신임 회장 시어도어 베일의 대응 전략
    • 통신부문 독점의 이득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 e.g. 1914년 파나마-퍼시픽 만국박람회에 맞춰 대륙횡단 전화선 부설 결정 (“One Policy, One System, Universal Service — 누구나 전화 한 통만 있으면 아무나와 전화할 수 있다”)
    • 회사의 엔지니어링부를 계열 제조회사인 웨스턴일렉트릭 산하로 통합: 수석 엔지니어 J. J. 카티가 책임
    • 1910년부터 물리학자 프랭크 주잇이 이끄는 최초의 연구 부서 설립.
    • 신호 감손 효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 1880-1890년대에 대학에서 훈련받은 과학자 고용 (조직된 과학 연구 프로그램의 일원 아닌 엔지니어로서 활동)
    • 대륙횡단 전화를 위한 전자식 증폭기 개발 (드 포리스트의 삼극진공관[triode]에 기반) → 1915년 대륙횡단 전화 시범 성공
  • 벨 연구소(Bell Laboratories) 설립
    • 1925년 웨스턴 일렉트릭의 엔지니어링부를 반독립적 회사로 독립시키기로 결정
    • 초대 소장 프랭크 주잇, 첫해 3600명의 스탭, 1200만 달러의 예산 운용 (같은 해 제너럴일렉트릭은 140만 달러, 듀퐁은 200만 달러 예산)
    • 기초 연구에 상당한 비중 (진공관 부서)
    • e.g. 1927년 클린턴 데이비슨 – 레스터 저머의 전자회절 실험 (193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1930년대 이후 고체에 대한 양자역학적 이해에 기반한 고체물리학 연구 확립 → 1947년 트랜지스터 발명 (1956년 노벨상 수상)

듀퐁

  • 연구소 설립 배경
    • 19세기 초부터 미국 군대에 오랫동안 흑색화약 공급(거의 독점), 1890년대부터 무연화약(니트로셀룰로스) 생산능력 개발
    • 1903년에 미국 의회와 군대가 특정 회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로 결정
    • General Research Laboratory(1903), Eastern Laboratory(1902, 고폭약 부문) 등 여러 개의 연구소 설립 → 무연화약, 고폭약의 생산 공정 개선, 생산비 절감, 좀더 깊은 과학적 이해 목표 (화학자 찰스 리스가 주도)
    • 1912년 반독점법 위반 판결 이후 무연화약 부문만 유지
    • 1917년 이후 회사의 방향을 유기염료 등 다양한 화학물질 제조로 다각화
  • 1926년 중앙 연구부서 책임자 찰스 스타인이 ‘순수’(기반)연구로의 방향 전환 제안
    • 독일 화학회사, 제너럴 일렉트릭의 선례
    • 근거: 회사의 과학적 위신 제고, 새로운 화학자 영입 용이, 다른 회사와의 물물교환 수단(당장 쓸모가 없는 결과물이라도 일종의 딜 칩으로), 실용적 응용가능성
    • 이사회의 재가로 신규 연구소 건설 (“Purity Hall”) — 대학에서 하는 연구와 비슷하게 하겠다며 과학자들을 끌어들임
  • 월러스 캐러더스와 나일론
    • 하버드 화학 강사에서 1928년 유기화학 연구 담당으로 영입
    • 중합체(polymer) 연구로 국제적 명성
    • 1930년 4월 새로운 합성고무(Neoprene), 새로운 합성섬유(3-16 폴리에스테르) 발명. ← 듀퐁의 이윤보다는 순수과학 연구를 하다 부산물로 얻어진 것
    • 1930년 6월 연구소 소장 스타인이 부사장으로 승진 → 신임 연구소장의 실용적 응용(당장 돈값을 하라거)에 대한 강조, 논문 발표에 대한 제약 → 1934년 3월 최초의 나일론(Nylon) 섬유 추출
    • 캐러더스는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1937.4)
    • 1938년 10월 뉴욕만국박람회에 맞춰 나일론 개발 공표
    • 나일론: 듀퐁 최초의 상업적 대박 (1939년부터 1990년대까지 200-250억 달러 수입)

산업연구소 후사

산업연구소와 순수과학 이데올로기의 충돌

  • 대학의 과학자들의 산업연구소 취직을 기피
    • 윌리스 휘트니 같은 연구소장들의 고충
    • 최대한 대학과 흡사한 자유로운 연구 환경 조성(연구주제, 논문발표)
    • 많은 급여로 유혹 (대학 강사 연봉의 2-3배)

”[Michelson] thought that when I entered industrial life, which was a field where patents was a part, I was prostituting my training and my ideals.”

마이켈슨의 제자 프랭크 쥬윗 (1900년대 중반)

  • 화학자 제임스 코난트(쿤의 스승으로 쿤이 과학사 프로그램 만드는 걸 지원했던 양반): 듀퐁의 개인적 자문 요청 거부, 하지만 “a much less able man”의 취업은 장려 (산업체 과학자 = 이류 시민권)

“I never expected to go into industrial work but the thing which makes a decision so difficult in this case is that I don’t have to sell my soul at all…”

코난트의 제자 루이스 피저 (1920년대 말)

산업연구의 확대

  • 1차대전 이후 산업연구소 급증: 1919-1936년 사이 1150개의 산업연구소 설립 (일종의 유행)
  • 산업연구소의 연구 전문인력 증가: 2775명(1921) → 6320명(1927) → 10927명 (1933) → 27777명(1940)
  • 산업체의 과학교육 지원: 1918년 듀퐁의 연구원(fellowship), 장학금(scholarship) 지원이 최초 → 1940년 200개의 회사가 700개의 fellowship 제공
    • 오히려 이것이 독일식 과학기술 모델을 제대로 수입한 것 (독일은 순수과학 집착 X)
  • 과학 연구와 제품 개발이 결합된 잡종 조직(hybrid organization)으로서의 정체성 확립
  • 모든 과학자들이 산업연구소에서 성공한 것은 아님 (e.g. 자괴감에 빠져 자살한 캐러더스)

산업과학자 — 과학자의 새로운 정체성

  •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며 산업과학자가 과학계의 다수집단으로 부상
  • 1920년대 말 코난트의 한탄: “1907-1917년 하버드 화학 박사는 모두 학문적 경력을 지향, 1917-1927년 박사의 절반 이상이 즉시 혹은 몇 년 후에 산업체 고용”
  • 1913년 미국물리학회(American Physical Society)의 회원 중 산업과학자 10% → 1920년 25%, 양차대전 사이 GE와 AT&T에 고용된 물리학자가 APS 회원의 40%
  • 1940년대 말에 박사학위를 받은 모든 화학자 중 54%가 산업연구소, 10%가 정부연구소, 33퍼센트가 대학에서 일함
  • 1950년 센서스: “자연과학자와 물리과학자” 15만 명 중 33,000명만이 고등교육기관에서 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