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홀로코스트와 시민

유대인 절멸 정책의 형성 과정

박해와 배제 (1933~1939)

  • 1933년 4월 나치는 유대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 조직적으로 전개
  • 유대인의 정치적 권리 박탈: 1935년 9월 13일 뉘른베르크법 제정-유대인과 비유대인의 혼인금지, 유대인의 정치적 참정권과 공직 취임 권한 등 시민권 박탈
  • 유대인의 경제적 기반 와해 조치: 1938년 3월 모든 유대인 공동체의 법인 권리 박탈, 4월 모든 유대인의 자기 소유 재산 신고 의무화, 7월 유대인 식별 카드 도입, 9월 유대인 의사의 아리안족 치료 금지, 10월 유대인 여권에 붉은색의 ‘J’자 인쇄, 11월 유대인 변호사의 활동 금지 & 유대인 아동의 독일인 학교 등교 불가
  • ‘수정의 밤’ 유대인 학살 사건(1938년 11월 9일 밤~10일 새벽): 나치 돌격대원과 당원들은 유대인 회당에 방화, 유대인 상점과 주택 파괴, 약탈, 유대인에 대한 테러 (91명의 유대인 사망), 뒤이어 3만 5천 명에 달하는 유대인 남성들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감, 유대인들은 소요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배상금을 나치에게 지불
  • 경제 활동으로부터 유대인의 완전 축출: 유대인은 일체의 자영업 금지당함, 유대인 소유 상점․공장․회사들이 독일인 수중으로 넘어가거나 해체됨, 유대인의 처분금도 인출이 금지된 은행계좌에 입금된 후 국가가 몰수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 유대인의 유가증권과 주식은 매매 금지됨, 모든 유대인은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됨

격리: 게토(ghetto) (1939~1941)

  •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이후부터 나치는 유럽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을 한데 모아 비유대인과 격리시키기 위해 게토 설치
  • 게토는 부족한 식량, 열악한 주거 환경, 위생시설의 결핍 때문에 사망의 장소

최종해결: 절멸(학살) (1941~1945)

  • 살인특무부대(친위특공대)의 학살
    • 1941년 6월 소련 침공 직후부터 소련 지역에 살인특무부대 즉, 친위대 산하의 학살 전담 엘리트 부대 투입
    • 살인특무부대는 1941년 6월부터 1943년 봄 독일군의 퇴각 때까지 소련 지역에서 125만 명의 유대인과 수십만 명의 전쟁포로를 포함한 소련인들 학살
  • 강제수용소(노동수용소와 절멸수용소)를 통한 학살
    • 소련 침공 이전인 1941년 봄에 이미 나치 지도부는 유대인에 대한 절멸 계획을 수립
    • 1942년 1월 20일 반제 회의는 새로운 학살 정책을 결정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지에서 주도한 절멸 작전을 추인, 절멸 대상 유대인을 1,100만 명 이상으로 산정
    • 나치 수용소 정책의 목표는 교화나 격리, 감시나 처벌이 아니라 절멸
    • 아우슈비츠(오슈비엥침) 수용소:
      • 1940년에 설립, 전 유럽의 유대인들 학살 담당, 수감자의 70~80%가 유대인 → 아우슈비츠의 희생자 수는 약 110만 명, 그 중 유대인은 100만 명
      • 1943년부터 세 구역으로 분할 (수용소 본부․행정부서․비밀국가경찰 사무실․일반 생산시설․군수 생산시설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절멸수용소인 제2수용소 일명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여러 생산시설이 자리잡고 있는 노동수용소인 제3수용소 아우슈비츠-모노비츠 수용소)
      • 1944년 여름에는 하루에 2만 4천여 명을 죽일 수 있는 최대형 수용소로 확장

학살의 가해자들

  • 나치 지도부 인사들(제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재판들을 통해 나치체제를 대표했던 주요 인사들이 법정에 서고 최소 8만 명이 유죄 판결을 받음)
  • 나치의 절멸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협조했던 법률가들과 의사들
  • 수용소 안팎에 공장을 세워 유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독일의 일부 기업가들
  • 나치에 협력했던 각국의 현지 권력자들과 지역 주민들
  • 학살을 방관한 일반적인 독일 시민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하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원문 강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물론 공포정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거기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독일 국민은 전체적으로 저항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결국 그리 오래지 않아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수용소는 유럽에서 파시즘이 강세를 떨치고 가장 기괴한 모습을 보일 때 가장 번성했다. 그러나 파시즘은 히틀러와 무솔리니 이전에도 존재했고, 분명한 형태로 혹은 가면을 쓰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 이와 같은 끔찍한 교훈이 우리의 경험 속에 들어 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많은 수용소 생존자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매년 젊은 순례자들을 데리고 ‘자신들의’ 수용소를 찾아간다. 나 자신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홀로코스트의 현재적 의미

  • ‘우리 자신’이 홀로코스트와 같은 야만적인 행위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될 수 있다 → ‘악의 평범성’

재판 자체뿐 아니라 피고와 그의 행위의 본질이 예루살렘에서 고려된 문제들보다 훨씬 넘어서는 일반적 본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은 물론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원문 강조]…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분명코 아주 일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