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여인

남자 옷을 입은 여자들이 이야기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그거야 옛날엔 여자들의 행동반경이 좁았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으니까요. 안전을 보장받고 행동반경을 넓히려면 남자로 변장하는 게 유리할 때가 많았습니다. 고로 남자들만 갈 수 있는 학교나 군대에 들어가거나, 남자들이 지배하는 험악한 세계에서 살아남거나 남자들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편하게 여행하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들이 현실세계에서도 많았던 거죠. 현실세계의 규칙을 보다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허구의 세계에서는 더욱 많았고요.

여기에는 다른 요인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윌리엄 셰익스피어 희곡에 남자로 변장한 여자들이 그렇게 많았던 건 당시엔 여자배우들이 없어서 여자역을 모두 변성기 이전의 소년들이 연기했기 때문에 남자 옷차림이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캐릭터는 남성이지만 여성배우들을 쓰는 경우도 많죠. 사라 베른하르트는 햄릿을 연기했고 피오나 쇼는 리처드 2세를 연기했습니다. 오페라의 경우는 종종 남자 주인공 역할을 메조 소프라노에게 넘겨주는 경우가 많지요. 타카라주카나 여성국극처럼 모든 역할을 여성배우가 하는 경우엔 당연히 남자주인공도 여자배우들이 하게 되지요.

이런 경향은 현대로 가면서 줄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여성들은 옛날엔 남자로 변장해야 간신히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당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변장할 이유가 사라진 거죠. 게다가 요샌 순수한 남장이란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자가 남성용 평상복을 입었다고 해서 그게 남장이 되는 건 아니죠. 그건 그냥 편한 평상복으로 보일 겁니다.

그래도 이런 경향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닙니다. [L 워드]의 배우 다니엘라 시는 실제로 중동에 살았을 때 남자로 변장하고 다녔다는군요. [태양의 딸들]이나 [오프사이드], [오사마]와 같은 이슬람권 영화들이 남자로 변장한 소녀들을 다루는 것도 그 지역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엔 또 다른 이유가 있으니, 남자 옷을 입은 여성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동성애 판타지일 수도 있고 이성애 판타지일 수도 있고 동성애 판타지로 본다고 해도 남녀에 따라 또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원인들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잘 조율되면 무척 패셔너블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마를레네 디트리히나 그레타 가르보와 같은 스타들의 예를 꼭 들어야 할까요?


(Q님 제공)

위의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잘 조율되면'입니다. 세상엔 남장여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좋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프사이드]나 [태양의 딸들]도 좋은 영화들이었죠. 하지만 그것을 생기없이 그냥 가져다 쓰면 그건 장난만도 못한 것이 됩니다.

얼마 전에 전 두 편의 한국 사극 영화를 봤습니다. 하나는 [전설의 고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진이]였죠. 우연이었지만 두 영화 모두 남자로 변장한 여자들이 몇 분 동안 나왔습니다. 역시 우연이었지만 그 설정 모두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의미했다는 것도 같았죠. [황진이]는 어설프게나마 핑계라도 달아주었지만 [전설의 고향]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순전히 '여자배우에게 남자 옷을 입혀주자!'라는 흐릿한 목적의식만 보였죠. 두 장면 모두 실없어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07/06/25)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