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화재

마지막 화재는 주로 구식 호러 영화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특히 목제건물이 많았던 과거를 무대로 한 고딕 호러물에서요. 특히 해머 영화사에서 제작된 호러물들은 거의 모든 작품이 화재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죠.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로저 코먼의 에드거 앨런 포 영화들도 만만치 않았고요.

설정의 차이는 있습니다. 악당이나 주인공이 일부러 불을 지르기도 하고, 횃불이나 촛대가 떨어져 화재로 번지기로 하고, 미치광이 과학자의 연구실이 폭발하기도 하죠. 시작이 무엇이건 순식간에 불은 기둥과 대들보에 달라붙고 주인공들은 아슬아슬하게 탈출하며 악당들은 불타는 저택 안에서 장엄한 최후를 맞습니다.

왜 이런 결말이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 걸까요? 일단 이런 식의 시대물 호러들은 거창한 저택을 무대로 하는 경우가 잦았고 그 저택들은 종종 자기 개성을 가진 하나의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택에게도 퇴장의 기회를 주어야죠. 그냥 맹숭맹숭하게 집을 나서는 대신 불을 질러주는 게 예의인 겁니다. 게다가 이런 식의 저택들은 불타는 모습이 굉장히 포토제닉해요. 그림이 되는 겁니다. 현대 건물에도 불을 지를 수는 있지만, 나무 기둥과 대들보가 화염 속에 조금씩 먹혀가는 그 장중한 느낌은 따라잡기 힘들죠. 이런 식의 화재가 조성하는 위기와 서스펜스도 무시할 수 없고요.

'마지막 화재'의 가장 큰 부작용은 모든 화재 장면들이 다 비슷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니, 종종 정말로 똑같기도 해요. 해머 영화나 로저 코먼 호러나 다 저예산 소품들이었기 때문에 한 번 좋은 화재 장면을 찍으면 그걸 뽕을 뽑을 때까지 재활용했거든요. (07/03/02)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