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오락영화로 봐주세요

최근 들어 전 시사회에서 배우들이나 감독들이 이런 말들을 하는 걸 자주 듣습니다. "그냥 오락영화로 봐주세요", "큰 기대는 마시고 그냥 즐겁게 봐주세요. 우리 영화는 대단한 예술영화가 아니고 그냥 오락영화거든요."

듣다보면 맥이 탁 풀립니다. 대부분 이런 '경고' 뒤에 딸려나오는 영화들은 다 그저 그렇거든요. 하긴 만드는 영화들이 모두 다 걸작이 될 수는 없겠죠. 배우들이나 감독들이 자기 작품에 가해지는 평가에 민감한 것도 당연하고요. 평론가들이 엉뚱한 잣대를 들이밀며 멀쩡한 작품을 과소평가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죠. 따라서 전 누군가가 시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비난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 이런 변명의 논리가 굉장히 싫습니다. 뻔한 클리셰들이 그렇듯 이런 변명엔 진짜 사고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무사고의 논리'는 많은 경우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안이한 태도와 연결되어 있거든요.

논리를 검토해보기로 하죠. 이런 사람들이 '그냥 오락영화'라고 말하는 작품들은 척봐도 오락영화인 게 분명한 작품들입니다. 아무도 주성치의 코미디 영화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심각한 주절거림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나 기자들 역시 거기에서 오락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임무는 '훌륭한 오락영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훌륭한 오락영화'라고 하지 않고 '그냥 오락영화'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첫째, 오락영화는 처음부터 높은 질을 갖출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런 운명을 받아들여 처음부터 예술적 도전을 할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때가 기억납니다. 그 때 보도자료에 곽재용 감독이 심각하게 쓴 글이 있었어요. 지금 그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인용이 어렵지만 곽재용은 그 영화를 지금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을 예술적으로 통합하는, 의미있는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었지요. 전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가 시시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곽재용의 그 진지한 선언은 여전히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곽재용과 같은 자신감을 갖출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만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 정도는 하고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뻔한' 오락영화에 그친다 해도요. (05/03/10)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