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개는 산다

1.

이 클리셰가 최근들어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순전히 한동안 유행했던 재난 영화 때문이었습니다. [단테즈 피크], [볼케이노], [데이 라잇]과 같은 영화들이 모두 위기에 빠진 개들이 살아남는 장면들을 수록하고 있었죠. 심지어 개 주인들이 죽어가는 도중에도 개는 살아 남았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개의 목숨과 사람의 목숨을 저울로 재기 시작했고 그게 웃기는 헐리웃식 계산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헐리웃에서는 개를 죽이지 않는 걸까요? 아뇨. 죽일 때도 있습니다. [분노의 폭발]에서 제프 브리지스의 개는 악당에게 살해당합니다. 디즈니 가족 영화 [올드 옐러]의 주인공 개는 총에 맞아 죽습니다 ([프렌즈]에서 피비가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뭐 이런 개 스너프 영화가 있어!"라고 외쳤던 에피소드를 기억하시는지요?) 영화는 아니지만 [X-파일]에서 스컬리의 개였던 퀴쿼크도 죽죠. 사실 개가 죽는 영화들은 꽤 많습니다. 특히 공포 영화나 액션 영화들에서 그렇습니다.

흠, 그렇다면 [단테즈 피크]나 [데이 라잇]에서도 그렇게 개를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별로 보기가 좋지 않았을 겁니다. 왠지 궁금하다면 [분노의 폭발]을 다시 보면 됩니다. 그 영화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만 개가 죽을 때만큼 정서적으로 강한 충격을 주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로이드 브리지스의 캐릭터가 죽을 때도 개 죽을 때보다는 충격이 덜 합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꽤 불쾌한 뒷맛이 남죠.

[단테즈 피크]와 같은 영화에서 개를 살린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개 구출 작전은 영화의 뒷맛을 덜 불쾌하게 만들었죠. 영화 하나만 보면 이상한 느낌이 그렇게까지 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영화 세 편이 모두 개를 살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 우스꽝스러워졌죠. 그러다보니 개를 살리는 헐리웃 영화들이 뒤를 따라 우리 기억 속으로 들어왔고요.

2.

왜 개의 죽음은 관객들을 불쾌하게 만들까요? 그건 "왜 단역 악당들의 죽음은 그렇게 가볍게 보일까요?"라는 질문의 답과 같습니다.

개는 그냥 동물이 아니라 애완 동물입니다. 다시 말해 개들은 인간의 귀여움을 받는다는 이유로 우리와 공생하는 존재입니다. 보더 콜리처럼 실용적인 경제적 목적 때문에 공생하는 개들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의 대체 수단일 경우가 많죠. 귀여운 동물들은 많은 경우 아기나 친구의 대체 수단이 됩니다. 다시 말해, 영화 속의 개들은 정서적으로 인간 캐릭터들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 작품에서 논리나 법, 도덕 규칙보다는 정서적인 흐름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때문에 사회 규범 속에서는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행동들이 영화 속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행해지는 거죠. 액션 영화에 자주 나오는 수많은 불법적인 복수 행위는 극히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또 사실 진정한 예술은 그런 것을 건드려야 하는 겁니다. 감정 대신 법과 도덕 규칙을 따르면 그건 선전 팜플렛이 되죠. 심지어 훌륭한 정치 예술작품들이 따르는 것도 감정이지 논리는 아닙니다.

개 한마리가 수많은 악당보다 더 중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아무리 악당이라고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의 생명은 개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적 산수 계산일 뿐입니다. 예술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주인공 또는 관객과의 정서적 연관 정도에 따라 평가 받습니다. 그리고 개들은 자동적으로 캐릭터들과 강한 정서적 연관성을 부여받습니다. 바로 그게 애완 동물의 존재 이유니까요. 게다가 개들은 친구보다는 아기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아기의 죽음을 보는 건 늘 불쾌한 일이죠.

헐리웃 주류 대중 영화가 개를 될 수 있는 한 살리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1시간 반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들어오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원한다면 대충 맞추어 주는 편이 좋죠.

예술이 꼭 사람들 우위에 서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예술도 소비를 목적으로 한 생산품이고 그 목적은 고객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니까요. 여기에 대해 꼭 냉소적이 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99/02/12)

D&P